우리는 지금 매우 위대한 순간에 있습니다. 노마 데스먼드가 마침내 작별 인사를 고한 거예요.그리고, 의미심장하게도, Gloria Swanson의 다음 작품은 TV 드라마가 된다. 3. 화려했던 시절은 가고 그런데, 영화에서 흘러간 옛 영광을 상징하는건 노마라는 캐릭터만이 아니다. 노마의 집사인 맥스 역을 맡은 Erich von Stroheim은 20년대 전성기를 보낸 감독이었다. 노마가 집에서 자신의 옛 영화를 돌려보며 자아도취에 젖을 때, 맥스가 영사기를 돌리는 옛 영화가 바로 Erich von Stroheim이 감독하고 Gloria Swanson이 주연한 "여왕 켈리"다. 그리고, 노마의 집에 가끔 찾아와 브리지 게임을 즐기는 손님들 중 "유령같이 창백한 얼굴에 뻣뻣하게 굳은" 말라깽이 신사는 다름아닌 코미디 영화의 대부인 버스터 키튼이다. 도대체 이게 다 뭔가? 영화 안과 밖을 이렇게 뒤섞어 놓으면서 빌리 와일더가 하고 싶은 말이 뭐란 말인가. 본명으로 출연하는 세실 드밀 감독은 촬영장에 찾아온 노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잠시 앉아 촬영하는거 구경이라도 하고 있게나. 요즘은 영화 만드는 방식이 많이 바뀌었거든"물론 노마가 무성 영화 스타였기 때문에, 이 말은 유성 영화로의 이동을 뜻할 수도 있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노마가 자신의 머리 장식을 치고 지나가는 마이크를 보고, 그게 뭔지 몰라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1950년)가 미국 영화사의 중대한 대변화가 발생한 때라는거다. 1948년, 미 연방대법원은 메이져 스튜디오들이 극장 체인을 소유하는 것이 독과점에 해당한다는 이른바 "파라마운트 판결"을 내린다. 이 판결은 20세기 폭스, 유니버셜, 콜럼비아 등과 같은 메이져 스튜디오들이 막대한 자본력을 기반으로 영화 제작에서 배급, 상영까지를 수직적으로 연결해 운영하던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를 의미했다. 자신들이 만든 영화의 상영을 보장하던 극장을 잃음으로써 메이져 스튜디오들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줄어든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때마침 전국적으로 보급된 TV가 영화의 영역을 크게 잠식해 들어오면서 더 이상 과거의 거대한 스튜디오 시스템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결국 메이져 영화사들은 영화 제작에서 손을 떼고 배급에 주력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당시의 파라마운트사 스튜디오 입구. 물론 스튜디오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되는 것은 이 영화가 개봉되고 몇 년 후의 일이다. 하지만 변화의 바람은 이미 불어오고 있었다. 스튜디오 시스템이 흔들리면서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한 것은 스타들과 감독들이었다. 각 스튜디오에 전속으로 소속되어 얼굴마담 역을 했던 스타들은, 홍보부터 시작해 모든 분야에서 뒤를 받쳐주던 스튜디오가 사라지면서 오직 자신의 능력만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경쟁에 내몰리게 된다. 감독들 역시 마찬가지의 상황에 처하는데, 스튜디오 시스템 내에서 시스템이 요구하는 영화를 그저 찍어내기만 했던 시대가 가고 자신의 개성을 확실히 살려 대중에게 직접 어필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옛 영광을 잃어가고 있는건 바로 영화 산업 그 자체였던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빌리 와일더는 스튜디오 시스템의 총아이면서도, 포스트 스튜디오 시스템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몇 안 되는 감독 중 하나였다. 스튜디오 시스템은 획일적인 시스템 속에서 영화를 대량생산하는(이것도 포디즘의 영향일 듯 하다) 방식이었는데, 때문에 감독의 개성은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한 시스템 속에서도 자신의 개성을 확실히 살리는 영화를 만들어내는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그였기에, 변화의 바람을 누구보다 먼저 잡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영화 "Sunset Blvd."는 아직도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고 있는 헐리웃에게 보내는 빌리 와일더의 경고의 메세지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빌리 와일더의 태도는 거만함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는 주인공 조의 시체가 풀장에 둥둥 떠 다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정작 주인공은 자신의 시체를 보면서 "그렇게 풀장 있는 집에서 살고 싶어하더니 결국 풀장에서 죽었군. 꼴 좋다"며 조소한다. 이와 같은 자조적인 톤과 죽은 이의 회상이라는 설정은 영화의 분위기 전체를 이끈다. 이 우울한 냉소야말로 빌리 와일더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바로 스튜디오 시스템의 적자였으며, 그 시스템에 정부처럼 빌붙어 왔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풀장에 빠져 죽은 조의 시체를 경찰들이 건져내고 있다. 4. 완성도 높은 수작 물론,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빼 놓고도, 영화는 그 자체로 수작이다. 왠만한 영화 애호가들의 걸작선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이유는 사실 영화의 완성도 덕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느와르 영화에서 이어져온 높은 컨트라스트의 흑백화면은 강렬하면서도 깔끔한 느낌을 주고, 주연들의 연기는 캐릭터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진다. 특히 Gloria Swanson의 연기는 전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녀가 아닌 노마 데스몬드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당분간 노마 데스몬드라는 이름을 잊기는 힘들 것 같다. 약간 여담이지만, 옛 영화를 즐기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서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이다. 기술이 발달할 수록, 즉 감독이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늘어날수록 이야기의 얼개가 느슨해지는건 정말 아이러니다. 오늘날, 생각하며 볼 수 있는 영화는 극히 드물다. 눈이 즐겁고 신기한 장면이 늘어날수록 머리 속은 하얘지는건 결코 좋은 현상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의 영화가 그저 엔터테인먼트일 뿐이라는 생각은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우리 시대의 빌리 와일더는 어디에 있는걸까 싶다.]]>
학생들이 몰래 보던 Lola의 사진. 바람을 불면 사진에 붙은 깃털이 슬쩍 들려 올라간다.
거기서 Lola를 만난 Rath는 이내 그녀에게 매혹된다. 그는 어리숙하지만 그다운 방법으로 그녀에게 호감을 표현하고, 그녀 역시 자신을 숙녀로 대접하는 Rath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점점 더 Lola 에게 빠져든 Rath는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Lola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비록 교수로서의 지위와 사회적 인정을 포기하고 여기저기 공연을 위해 떠돌아야 했지만, Lola 와의 결혼에서 그는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생계를 위해 계속 쇼걸로 일하는 Lola와 아무런 벌이도 없이 그녀에게 의지해야 하는 Rath의 관계는 이내 역전되고 만다. 그녀의 사진을 사람들에게 팔지 않겠다고 호기롭게 외쳤지만 결국 술집의 손님들에게 사진을 팔러 다니게되고, 마침내는 직접 삐에로로 분하여 무대에 서게 된다. 그는 자존심의 상처를 입지만 여전히 Lola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전히 벌이가 넉넉치 못한 삶이 계속되는 가운데, 어느날 극단의 단장은 Rath에게 드디어 밥벌이를 할 기회가 왔다는 이야기를 한다. 말인즉, Rath가 떠나온 고향 마을로 돌아가서 공연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돌아온 교수"와 같은 문구로 홍보를 하면 그를 아는 사람들이 많이 보러 올 것이고 쇼는 흥행을 할 것이라는 계산이다. 당연히 Rath는 크게 분노하며 절대 가지 않겠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의 의견은 아무런 힘도 없을 뿐 결국 그는 고향 마을로 가게 된다. 자신의 옛 제자들과 동료 교수들 앞에 삐에로로 분장을 하고 무대에 선 Rath. 그런데 그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Lola가 마을에 있던 떠돌이 연주가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는다. 완전히 망신창이가 된 채 무대에 서 있던 Rath는 Lola가 이 떠돌이 연주가와 지분대는 모습을 보며 마지막 남아 있던 이성마저 잃어버린다. 공연 도중 광분하여 소동을 벌이던 Rath는 구속복을 입고 광에 갖히게 된다. 정신을 차린 후 그는 먼지투성이 외투와 찌그러진 중절모를 걸치고 술집을 빠져나오고, 비틀거리며 자신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김나지움의 교실로 향한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의 상징이었던 교탁 앞에 선 Rath는 교탁을 움켜쥔 채 쓰러져 숨을 거둔다. 유성 영화 시대가 열리다Prof. Rath 역의 Emil Jannings(왼쪽)과 Lola 역의 Marlene Dietrich
The Blue Angel(원제 : Der Blaue Engel)은 1930년에 제작된 영화다. 당시는 막 유성 영화가 처음 제작되기 시작한 시기였는데, 이 영화가 바로 독일에서 두번째인가로(확실치 않다 -_-) 제작된 유성 영화라고 한다. 일종의 과도기라고 할 수 있는데, 덕분에 이 영화에서는 무성 영화 시대의 미덕과 유성 영화라는 새로운 기술이 선사하는 매력을 모두 느낄 수 있다. 무성 영화의 미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는 바로 Rath 교수 역을 맡은 Emil Jannings다. 그는 무성 영화 시대부터 유명했던 배우인데, 때문에 대사보다는 연기 자체로 의미 전달을 하는데 능숙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극 중에서 가장 다양하면서도 격렬한 감정의 변화를 표출하는 인물인데, 그의 표정과 행동의 변화를 유심히 관찰하는 것도 영화의 큰 즐거움 중 하나다. (무대에서 Lola가 부르는 사랑 노래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 생각하며 부끄러워 하면서도 행복해하는 모습은 압권이다.) 아울러, 주위의 소품이 중요한 메타포로 사용되는데, 이것 역시 무성 영화 시대, 아니 정확히는 연극에서부터 이어온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배경이나 모자, 수염 등 어느 하나 허투루 스쳐 넘길 것이 없다. 반면, Lola 역을 맡은 Marlene Dietrich는 전형적인 유성 영화 시대의 스타다. 사실 그녀의 연기는 별로 대단할 것이 없다. 그녀는 시종 별다른 감정의 변화 없이 남자들에게 눈웃음을 흘리고 무대 위에 뻣뻣이 서서 노래를 부를 뿐이다. 그런데, 이 "노래"가 중요하다. 감독의 입장에서는 무성 영화 시대에는 없었던 강력한 무기가 새로 등장을 한 셈인데, 이 무기를 통해 Lola의 캐릭터를 강렬하게 관객들에게 각인을 시킨다. 예컨데, Lola가 부르는 Falling in Love Again의 가사는 아래와 같다. Falling in love again 다시 사랑에 빠지는건 Never wanted to 결코 그러려던건 아니었어요 What am I to do?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Can't help it 어쩔 수가 없어요 Love's always been my game 사랑은 항상 나한테는 게임 같은 것 Play it how I may 내가 하는 것처럼 즐겨요 I was made that way 나는 원래 그런걸요 Can't help it 어쩔 수가 없어요 Men cluster to me like moths around a flame 남자들은 불가의 나방처럼 내게 달려들죠 And if their wings burn, I know I'm not to blame 날개가 불에 탄다해도, 그건 내 탓이 아니에요 오! Femme Fatale 이여공연 중의 Lola
여기서 Lola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어쩌면 Lola는 영화 속 요부(Femme Fatale)의 효시일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Rath에 대한 Lola의 감정은 모호하다. 그의 친절에 감사하고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만, 그녀의 태도는 딱히 사랑이라기보단 "오는 남자 사양 않고, 가는 남자 잡지 않는다"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를 지배하며 복종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고, 이 힘이 Rath의 삶을 파멸로 이끈다. 비록 그녀는 자기 탓이 아니라고 노래하지만. 현대의 영화들에서 Femme Fatale은 보통 훨씬 더 적극적인 악역으로 그려진다. 그녀들은 음모를 세우고 미모로 남자들을 엮어 결국 그들을 파멸로 이끈다. 이런 기준으로 보자면 Lola는 Femme Fatale 이라기엔 다소 모호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Rath를 유혹하지도 않고, 그의 파멸을 부추기지도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행동하고 게임을 하듯 사랑에 빠질 뿐. 하지만, 거꾸로 보면 현대의 Femme Fatale은 어쩐지 괴기스럽지 않은가. 온 몸으로 덮쳐오는(?) 그녀들보다는 무대 위에서 슬쩍 눈짓을 주며 노래를 부르는 Lola의 매력이야 말로 진정 거부할 수 없는 Femme Fatale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무너져가는 구세계삐에로 분장을 한 Rath
하지만, Rath의 몰락을 단지 사랑 때문에 파멸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읽기에는 영화는 너무 많은 부분에서 두 세계의 대립을 보여준다. 영화에는 크게 두 종류의 세계가 등장한다. 하나는 김나지움으로 대표되는 권위와 규율, 시간엄수의 세계고, 다른 하나는 대중들의 천국인 술집 Blue Angel 이다. 이 대립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유럽에서는 아주 흔히 볼 수 있었던 장면일 것이다. 산업 자본주의와 매스 미디어의 발달은 이전 세대는 경험하지 못했던 "대중"이라는 강력한 사회적 집단을 만들어냈고, 이들 대중은 기존의 지배 계급의 권위를 인정치 않고 사회의 새로운 주류 집단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Rath의 비극은 바로 이 권력 이동의 과정에서 밀려나는 구세계의 비극이기도 하다. 예컨데, Rath가 고향 마을로 돌아와 삐에로 분장을 하고 무대에 설 때 객석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 동료 교수들과 대중들이 앉아 있다. 무대 위에 선 Rath의 머리에 마술사가 계란을 부딛혀 깨자, 그의 동료 교수들은 모욕이라며 발끈하지만 대중들(노동자의 복장을 한)은 환호한다. 화를 내던 교수들도 주변의 야유에 다시 조용히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대중은 더 이상 기존 지배층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분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대중 문화의 응집체이다. 영화관은 오페라 극장 들과는 달리 노동자와 귀족들이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이 역시 과거의 권위가 무너졌음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감독은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의 이동처럼, 구세계도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세계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Rath의 비극적인 죽음은 바로 구세계에 대한 엄숙한 사망선고이기도 한 것이다. 낯선 영화에서 고전의 향기를 느끼다 기술적으로만 따지자면, 이 영화는 오늘날의 영화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사실 거의 80년 전 영화다 -_-) 조악하다고도 할 수 있다. 빈약한 조명과 단선적인 편집, 움직임이 거의 없는 카메라 등 오늘날의 "기교"라고 할만한 것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덕분에 플롯의 힘과 배우들의 연기, 세트와 배경의 매력이 담뿍 드러나는 것이 바로 옛 영화의 매력이다. 그리고 이 영화 The Blue Angel은 그 매력들을 찌~인하게 느낄 수 있는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웰메이드 영화의 매끈함에 식상해진 당신이라면 꼭 한번 챙겨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