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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y Elli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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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Stephen Daldry
주연 : Jamie Bell, Julie Walters, Gary Lewis


헤드 기어를 쓰고 글러브를 손에 낀 소년이 하얀 발레복을 입은 소녀들 사이에 어색하게 서 있다. 형의 레코드를 몰래 들으며 침대 위에서 몸을 흔들던 소년이었지만, 발레는 여전히 '여자애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탓이다. 그러면서도 끌리는, 결국 수줍어하면서도 다시 그 속에 서고 마는 소년. 그의 이름은 빌리 엘리엇(Billy Elliot)이다.

빌리 엘리엇은 발레를 하고 싶어한다. 왜 춤에 끌렸는지도 모르겠고, 구체적으로 무엇이 좋아서 그렇게 열중하는지도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자기 자신을 잊고 몰입하여 춤 속으로 녹아들어간다. 그것이 이 소년이, 영화가 가지는 기본적인 아름다움이다. 영화는 한 소년이 예술혼을 눈떠가는 성장 영화의 틀을 지닌다. 소년의 성장은 훈훈하고 즐겁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광산 노동자들의 시위 장면, 흐느끼는 아버지, 거리 곳곳의 경찰들. 이 영화에서 저변에 깔린 시대적 아픔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화를 절반만 본 셈일 뿐이다.

물론 영화는 소년이 시대의 아픔을 짊어진다던가 하는 교조적 스토리 라인을 밟지는 않는다. 소년은 단지 춤에 매료되었을 뿐이고, 주변의 환경에 대해서는 그 나이만큼의 눈높이를 유지한다. 다만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아버지를 탓하지도 않고, 죽은 어머니가 그리워도 눈물 흘리지 않는, 다소 의젓한 소년일 뿐이다.

영화에서 주목할 것은 두 세대의 대칭 구도('대립'이 아니다)이다. 감독은 발레화를 신고 연습에 몰두하는 빌리의 모습과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고 있는 그의 아버지의 모습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고 있다. 각각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는 두 세대. 한 쪽은 팍팍한 삶 속에서 주변의 편견을 딛고 자신의 꿈을 위해 싸우고 있으며, 다른 쪽은 팍팍한 삶 자체와 싸우고 있다. 그러나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이들 두 세대는 우선은 적대적인 관계로 출발한다. 전통적 남성관을 가진 아버지가 아들이 발레를 하고자 하는 것을 인정치 않기 때문이다. 왜?

'교육 현장과 계급 재생산'이라는 책을 쓴 폴 윌리스는 영국 노동계급이 전통적으로 남성중심적 가치관을 강하게 유지하는 이유를 '간파'와 '제약'이라는 개념틀로 설명한다. 이 개념은 사회계급적 관계가 문화적 코드로 반영되는 과정에서 도입되는 것인데, 육체노동을 도맡은 노동계급이 정신노동에 대한 사회적 열등의식을 만회하기 위해 남성적 가치관을 강화시킨다는 주장이다. 즉, '남자는 힘을 쓰는 일을 해야지, 책상머리에 앉아서 종이쪼가리와 씨름하는 계집애 같은 놈이 되어선 안된다'라는 식으로 자신들의 육체노동을 합리화한다는 것. 이는 남성적 문화가 현 계급관계에 대한 '간파'의 반영임과 동시에 그것이 다시 현 계급관계를 고착화시키는 '제약'의 코드로 기능함을 보여준다. 자본주의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나라일수록 이와 같은 계급문화는 강하게 힘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하기에 상층문화만을 맹목하는 한국 사회와는 달리, 이들은 자신들의 계급문화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소년의 형과 아버지로 대변되는 세대는 이와 같은 재생산 고리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할아버지가 물려준 권투장갑을 아들에게 주며 권투를 배우라고 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단지 어떠한 개인적인 선호도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노동계급의 계급문화가 재생산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연히도 이러한 과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빌리의 시도는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은 결코 두 세대의 단절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크리스마스날 밤 체육관에서 빌리의 춤(그리고 치마를 입은 그의 친구.. ^^;)을 본 아버지는 결국 자신의 가치관을 빌리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스스로가 빌리의 가장 훌륭한 후원자가 되려 노력한다. 두 세대의 화해. 이것은 영국 노동계급이 가져왔던 계급문화의 한계 - 남성적 가치관, 동성애에 대한 비하 등 - 가 새로운 세대에 의해 (단절이 아닌)극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세대간의 화해와 남성적 가치관의 극복이 '모성'에 의해 매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빌리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그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어머니'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빌리의 아버지가 심경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크리스마스날 아침 아내의 유품인 피아노를 부수어 땔감으로 쓰던 아버지가 끝내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빌리를 위해 동료들을 배신한 채 작업장으로 향하던 아버지를 이해한 형은 빌리에게 "그래 맞아, 어머니라면 허락하셨을거야"라고 말하면서 동생과 화해한다. 남성성에 의한 갈등이 여성성을 통해 치유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화해한 두 세대가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아니다. 빌리가 오디션에 합격하던 날, 즉 빌리의 싸움이 마침내 승리하던 날, 노동자들의 싸움은 패배한다. 두 세대의 화해는 희망적이었지만, 결국 각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깊게 포옹한 가족은 보고싶을 거란 말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헤어지고, 상승을 향해 떠나는 빌리의 긴장한 표정과 빌리를 보낸 후 리프트를 타고 하강하는 형과 아버지의 검은 얼굴이 대비되며 두 세대의 미래를 암시한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정말로 운동선수 같은 몸을 갖게 된 빌리가 무대 위로 힘차게 비상하는 것을 보며, 그의 아버지는 중얼거린다. "빌리, 많이 컸구나"... 세월의 깊이가 주는 아릿한 감동.

대처리즘이 영국사회를 휩쓸던 80년대 이후, 이 때 싸우던 노동자들은 잊혀진 세대가 되어 버렸다. 현재의 영국을 이끌고 있는 것은 빌리의 세대. 하지만 감독은 현재의 영국이 가능했던 이유, 그렇게 희생을 통해 현재의 세대를 가능하게한 그들을 잊지 않는다. 하기에 이 영화는 한 세대, 한 사회의 성장을 묵묵히 끈끈한 애정으로 지켜보아준 이들에게 표하는 경의인 것이다.

 Note : 시대적 배경 

2차 세계 대전 후 꿈같은 호황의 길을 걷던 서구 자본주의는 6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점차 정체되기 시작한다. 경제 성장의 둔화는 곧바로 사회적 계급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고성장에 기반하여 암묵적으로 합의되어 왔던 수정 자본주의적 정책들이 이윤율 저하 압박을 느낀 자본에 의해 위협받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에서 이와 같은 변화는 1970년 집권한 헤쓰 보수당 정부가 '반노동조합법(산업관계법 : Industrial Relations Act)'을 제정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이는 곧 격렬한 계급 투쟁을 촉발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1974년 2월 선거에서 노동당이 집권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노동계급은 일시적인 승리를 쟁취한다. 하지만 전세계적인 경제 침체 속에서 노동당 정부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의 폭은 극히 좁을 수밖에 없었다. 선거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미 획득한 반노동조합법 폐지는 쉽게 이루어졌으나, 이후 노동당 정부는 실질임금 하락, 실업률 증가 등의 경제적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점점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79년 선거에서 마가릿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에게 패배하고 만다.

극도의 경기 침체 속에 집권한 대처 정부는 신보수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노동조합과 사회복지정책들에 대해 단호한 대량 공격을 퍼부음으로써 노동조합에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가한다. 당연히도 여기에는 노동자들의 저항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정부가 운영하던 탄광들을 대거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폐광조치와 감원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렸고, 이로 인해 촉발된 탄광투쟁은 가장 격렬한 싸움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규모만 거대할 뿐 구심력을 갖지 못했던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의 신뢰를 상실함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든 노동당은 대처 정부의 공세에 무능력했고 결국 노동계급은 패배하게 된다. 대처 정부의 이러한 공격적인 신보수주의 정책들은 하층 노동계급의 삶을 심각하게 위협하였으나 전체적으로 경제 위기를 안정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중산층 이상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곧 83년과 87년의 선거에서 보수당의 재집권으로 이어졌다. 영국의 지식인들은 이 시기를 '영국의 미래를 바꾼 10년'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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