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에 아픈 사람 - 신현림
오래된 꿈과 비밀을 간직한 부드러운 사람이고 싶어
부드러움은
망가진 것을 소생시킬 마지막 에너지라 믿어
밥, 사랑, 아이..... 부드러운 언어만으로도 눈부시다
삶이라는 물병이 단단해 보여도
금세 자루같이 늘어지고 얼마나 쉽게 뭉개지는지
그래서 위험해 그래서 흥미진진하지
전인권의 [사랑한 후에]를 들으며 눈부신 창을 본다
황혼 속에선 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일만 오천 년 전 라스코 동굴 벽화의 검은 황소다
황소를 그린 자의 마음이다
생존의 서러움이 득실거리는, 풍요를 기원하는 심정
막 희망의 빈민굴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있어
으리으리한 디지털 인간, 상추 한 잎만한 사람, 별 게 아녔어
다들 부서지기 쉬운 밥그릇을 싣고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맨다
행복, 그게 뭔데? .....카푸치노 거품 같은 것
누군가 명품, 성형수술, 다이어트에 빠지는 동안
너는 죽음보다 깊은 외로움에 빠지거나
연애 골짜기에 빠지거나 독서에 빠질 거야
나는 유통기한이 없는 시의 마력에 빠져
천 년 후에도 다시 튼튼한 한국 여성으로 태어날 거야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나를 더 아프게 해라
이렇게 되뇌며 언어의 엽총을 겨냥할 거야
너도 환장하겠니 나도 환장하겠다
뭔가 사무치는 게 있어야겠어
해방감을 주는 거, 징 하게 눈물 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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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오래간만에 맞는 휴일을 기념이라도 하듯 종일 빗줄기가 가볍게 흩뿌렸다. 이런 날은 이런 날대로 운치가 있지, 하며 뜨거운 우동 한 그릇으로 점심을 가름하고 카푸치노 한 잔을 들고 까페 구석 창가 앞에 자리를 잡았다. 창문에는 보송보송 빗방울이 맺히고, 그 너머 짙게 젖은 길을 따라 종종걸음의 사람들이 지나치는게 보인다. 참, 부드러운 휴일이다.
"행복, 그게 뭔데? .....카푸치노 거품 같은 것" 이라니. 마치 어제의 그 느낌을 누군가 잡아채 시로 옮겼구나 싶다. 부드러운 거품 밑에 도사린 쓰디 쓴 커피가 인생이라면, 그래 이 거품 같은 행복이면 참 좋겠지. 적당히 뜨겁게, 그러나 부드럽게. 하지만 퍼득 정신을 차린다. 정말 "죽음보다 깊은 외로움에 빠지거나 연애 골짜기에 빠지거나 독서에 빠질"지도 몰라.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오늘은, 일하다 잠시 짬을 내 건물 앞 주차장을 돌았다. 카푸치노의 기억을 진한 아메리카노로 덮긴 했지만, 따뜻한 햇살과 서늘한 바람에 멈춰 서 눈을 잠시 감을 수밖에 없었다. 부드럽다. 옷을 타고 전해지는 햇살의 온기와, 머리카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재빨리 빠져나가는 바람의 한 올 한 올이 느껴진다. 내가 항상 잊고 사는 몸의 언어다.
정말, 뭔가 사무치는게 있어야겠다. 그러고보니 [사랑한 후에]는 내 노래방 애창곡이었지. 그 사무치는 애절함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