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그리고 민주주의
ⓒHARLEY SOLTES / THE SEATTLE TIMES
이 사진은 1999년 시애틀에서 열린 반 WTO 시위의 한 장면이다. 시위대가 타워 크레인에서 내건 이 플래카드에는 "민주주의"와 "WTO"가 서로 반대편을 가리키고 있다. 물론 이 시위대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WTO로 대변되는 세계 무역 자유화의 흐름은 (특히) 저개발 국가들의 경제 시스템을 다국적 자본의 영향권 하에 종속시켜, 해당 국가의 국민들이 자국의 정치 시스템을 통해 스스로의 경제적 이해를 지키려는 모든 시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다국적 자본의 시대에 자유무역은 모든 정치적, 윤리적 가치를 모두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여 사실상 민주주의와 대립하게 된다.
이번 한미 FTA 체결이 내게 던진 의문도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였다. 나는 이번 FTA 체결에 반대하지만, FTA가 순수하게 경제적인 측면에서 한국 자본주의에게 하나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어차피 한국이 자본주의 국가이고, 자본주의 질서에서 세계적 차원의 무역 자유화가 하나의 대세라면, 무작정 그것이 나쁘다고만 외치고 있는 것도 무책임한 일일 수 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말하는 것처럼, IMF 같은 위기를 넘어선 한국 경제의 잠재적 동력은 새로운 도전 속에서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박이지만, 역시나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생각한다면 시도해 볼만한 도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과연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그것도 대한민국 헌법 1조에서 말하고 있는 "민주공화국"의 역할을. 민주공화국의 이념에서 국가는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장치이다. 하지만 국민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들 각각의 이해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서로 다른 이해들이 충돌하고 그 안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가는 것이 민주공화국 시스템에서 정치의 역할이며, 이 충돌과 조정의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의 이념이 실행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민주주의가 결코 다수결과 동의어가 아니다는 점이다. 민주공화국은 공화국 국민 전체의 이해를 대변해야지 그들 중 일부(수적으로 다수일 수도 있고, 권력을 잡은 쪽일 수도 있고)의 이해를 기계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경우에서 국민들 간의 이해관계는 서로 충돌한다. 국가가 어떤 정책을 통해 한 쪽의 이해를 반영하고 다른 쪽에 손해를 끼칠 수밖에 없음은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국가는 모든 국민의 목소리에 대답해야 한다. 99%가 이득을 보니 1%는 손해를 봐도 참으라는 것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그 1%의 국민에게조차 국가는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호명하며 국가가 그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것이 민주공화국이다.
그렇게 국민 하나하나의 목소리가 정치의 전당에 울려퍼지는 것, 그것이 의회정치의 목적이자 존재 의의다. 하지만, 조선시대 전제군주제의 영향이 아직 남아있는 것인지, 아니면 독재정권의 잔재 때문인지, 우리의 의회정치는 배신당했다. 인기보다 자신의 신념을 따르겠다는 대통령에게 배신당했고, 의석 수를 그저 자기 관리 하에 있는 나와바리 수 정도로 생각하는 거대 정당들에게 배신당했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자기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만 중요할 뿐이지, 자신들이 누군가를 대리하는 대표일 뿐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해버렸다. 한 나라의 경제 시스템을 통째로 흔드는 협상의 정보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의회로부터 차단되었고, 더 웃긴건 의회는 굳이 그걸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게 민주주의인가? 이게 공화국인가? 정치는 사라지고 오직 통치만이 남은 이 나라가 어떻게 민주공화국의 헌법을 내세우는가.
양극화가 어쩔 수 없다고? 전체 경제가 나아질 것이니 농업과 제약 쪽은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고? 손해는 피할 수 없으니 이를 보상해 줄 수 있는 기금을 마련하겠다고? 다 옳다고 치자. 그런데 그걸 받아들일지 말지는 당사자들이 결정할 문제다. 당신은 누가 손해를 보고 누가 이득을 볼지 결정하는 제왕이 아니다. 당신은 들어야 한다. 국민 하나하나의 목소리를. 그들의 떨리는 목소리를.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은 그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당신은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다.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왜 그렇게 조급했는가 싶다. 왜 그렇게 근시안적인가 싶다. 스스로의 입으로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던 대통령이, 더디더라도 옳은 길을 가겠다던 '바보' 대통령이 왜 국가의 정치 시스템과 그 근본 가치를 붕괴시키면서까지 경제 문제에 올인해야 했는가 싶다. 당장 먹고 사는게 불가능한 나라도 아니건만, 아직도 독재정권의 잔당들이 의회정치를 모독하고 있건만, 왜 그리도 서둘러야만 했단 말인가. 그 자신이 직접 의회정치를 모독하고, 독재정권 잔당들의 기립박수를 받는 현실을 왜 기어이 만들고야 마는가.
아직 마지막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건, FTA가 의회의 비준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망신창이가 된 의회지만, 그리고 의회정치의 이념을 저버린 저들이 장악하고 있는 국회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토론의 시간과 공간이 조금이나마 주어졌다는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FTA의 득실을 저울질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고 싶다. 우리에게 과연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우리의 민주공화국은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