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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음..

피곤함이 뇌수를 꿀꺽꿀꺽 삼키는 느낌을 참지 못하고 밤 8시 즈음에 침대에 누웠다가 깨어보니 새벽 3시. 사실 깬 이유는 방 밖에서 개들이 시끄럽게 짖어대며 놀아서다. 아래층에 피해 줄 것 같아서 나가보니, 거실 불이 켜져 있어 새벽까지 놀고 있더군. 게다가 보일러 온도는 너무 높아 발바닥이 뜨거울 정도. 불끄고, 보일러 낮추고, 오렌지 쥬스 한 잔을 들고 방으로 다시 들어와 컴퓨터 앞에 앉는다.

어제, 신경숙 아줌마의 책을 읽었다. 의도했던건 아니고, 민방위 교육장에서 시간 떼우기용으로 읽을 책을 찾다가 거실 책장에서 누나가 꽂아놓은 책을 찾아 들고 나선 것. 소설집 "오래전 집을 떠날 때" 절반 정도 읽었는데... 이 아줌마 소설은 여전히 꿀꿀하다. "아이 잃은 어머니"의 모티프는 거의 매 소설마다 등장하고.. 가끔 등골이 서늘해져 닭살이 돋을 정도다.

"벌판 위의 빈집"이라는 글을 읽다가 이런 스토리가 갑자기 떠올랐다.

남자와 여자가 한적한 벌판을 걷고 있다. 오랜만에 야외로 나온 이 두 사람은, 얼마전 도시의 한복판에서 운명처럼 마주쳤다. 아니, 실제로 그들은 그 만남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늘도 이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말 없이 이 벌판을 향했다.

멀리서 집 한 채가 보인다. 꼭 땅에서 솟아오른 것 같이, 널찍한 벌판 위를 홀로 지키는 집. 그 황량함에 남자는 문득, 오래전 읽은 소설 하나를 떠올린다. "벌판 위의 빈집" 남자는 여자에게 소설 이야기를 해 준다. 무서운 듯 남자의 손을 꼭 잡는 그녀. 그들은 천천히 그 집을 향한다.

소설의 기억 때문일까, 집에 다가갈수록 둘의 대화는 잦아들고 결국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아닌게 아니라 남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자신을 끌어당김을 느낀다. 집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설 때마다 강해지는 힘.

드디어 둘은 집의 입구 앞에 선다. 소설책 속의 한 부분이 튀어나온 듯한 모습. 현관에 내걸린, 바람에 흔들리는 새하얀 레이스와 담쟁이 덩굴들, 그리고 현관으로의 아홉 계단까지. 빈집이나, 빈집같지 않은 그 집.

남자는 어느새 여자의 손을 놓고 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이끌리듯 계단을 오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그리고 아홉.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나 이뻐?" 뒤돌아보는 남자의 시선에 가득들어오는 여자의 하얀 얼굴.

벌판의 바람에 시달린 남자의 뺨을 타고 눈물이 긴 궤적을 남긴다. 입가에 엷은 미소마저 띤 남자의 눈에는 반가움과 원망과 회한과 슬픔이 뒤엉켜있다. 작게 달싹거리는 입술. 그 사이로 들릴듯 말듯 한 마디가 새어나온다. "드디어.. 드디어.. 다시 만났구나.."

바람이 불고 남자의 영상이 스러진다. 눈빛이 서서히 흐려지고 눈물 자국만이 긴 여운을 남기며. 어느새 기울기 시작한 저녁햇살 속에는 빈집 앞에 홀로 서 있는 여인의 실루엣 만이 길게 늘어진다. 담쟁이 덩굴은 여전히 사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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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하고 비현실적인 스토리지만... 뭐랄까, 신경숙이 아이 잃은 어머니의 한(?)을 읊어낸다면, 난 그 둘을 모두 잃은 아버지의 넋을 풀어내보고 싶었다. 대충 얼개만 잡아본 것.

에구... 이제 만들다만 갤러리나 좀 더 손보고 다시 자야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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