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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병인가, 친위대인가 / 진중권

신문시장 개혁과 언론사 세무조사는 시민과 기자들 사이에서 80% 이상의 지지를 받으며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회적 합의를 얻은 개혁도 정치적 맥락 속에 배치되면 정확하게 고향이나 지지정당에 따라 편이 갈라져 합의가 무산되고 만다. 거대 야당과 메이저 언론사들이 노린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 이전투구로 만들어 비기기라도 하자. 실제로 이 전술은 주효하여 언론개혁을 교착상태에 빠뜨렸다. 이렇게 고약한 방향으로 사건을 계열화해 나가는 데에는 자기들끼리 `국민작가'라 부르는 어느 소설가의 빨간색 은유가 한몫을 했다. 이렇게 소설가가 추상화가가 되어 남의 몸에 빨간 물감칠이나 해대는 게 한국의 보수주의 아방가르드다.

언론개혁을 말하는 시민들이 “홍위병”이라면, 우리는 그 소설가를 한나라당과 조선일보의 “친위대”라 부를 더 많은 이유를 갖고 있다. 얼마 전 이회창 총재는 당의 모임에서 한나라당을 출입하는 조·중·동의 기자들을 가리켜 “우리는 한 식구”라고 했다. 행여 공치사로 들릴까봐 “이것은 립 서비스가 아니”라고 확인까지 해주었다. 그 자리에 있던 기자들은 한나라당 의원들로부터 우레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것은 한나라당의 총재가 그 동안 메이저 언론사의 기자들이 자기를 위해 친위대 역할을 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준 것이다. 그 소설가가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면 자칫 기립박수를 받을 뻔했다.

이왕 “한 식구”가 된 마당에 가족의 생일을 어찌 그냥 지나치랴. 그리하여 이총재는 멀리 모스크바에서 생일을 맞은 기자들을 위해 파티를 열어주었다. 이 성은에 감읍했던지 어느 기자는 이회창 총재도 아니고 그 부인과 고향이 같다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했고, 또 어느 기자는 노골적으로 “내년에는 청와대 기자실에서 만나자”고 말했다고 한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덕담을 주고받다가 촌지로 200달러씩 돌렸다는 소리도 들린다. 이것이 바로 정작 지난 군사독재 시절에는 권력을 찬양하다가 어울리지 않게, 얼떨결에, 졸지에 “언론자유”의 투사가 된 그 분들이 하는 짓이다. 하긴, 지난 40년 내내 하던 그 짓을 계속하는 것에 불과하니 별도로 놀랄 일은 없다.

반면, 소위 “홍위병”들은 행태가 참 이상하다. `책반납운동'을 주도한 네티즌은 분명히 `전라도' 사람이어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부모 중의 하나가 `전라도'여야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은 경상도 토박이가 아닌가. 하다 못해 이 글을 쓰고 있는 자도 충청도에 본적을 두고 전라도에서는 단 하루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더더군다나 민주당의 지지자도 아니고, 월 2만원씩 당비를 내며 매주 당보에 컬럼까지 쓰는 진보정당의 골수당원이 아닌가. 또 조선일보를 보이콧한 민주노총은 현정권의 등장 초기부터 내내 “정권타도”를 외치던 그 사람들이 아닌가. 이 모든 것이 그 소설가의 남다른 애향심으로 파악하기에는 대단히 벅찰 게다.

정권의 홍위병이라면 가령 <조선일보>에서 한나라당에 바치는 것에 버금갈 만한 충성심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홍위병들은 성질도 참 이상하여, 이 중요한 시기에 집권여당의 어느 유력한 정치가에게 충성을 바치기는커녕 대단히 비판적이다. 왜? 시민들이 유명한 소설가에게 “홍위병”이라는 욕을 먹어가며 언론개혁을 주장할 때 옆에서 몸보신이나 하고 있다가, 기껏 구속된 사주에게 사람을 보내 `면회를 못 가서 죄송하다'며 조아려 사죄나 하고 앉았기 때문이다. 통탄할 일이다. 적어도 홍위병은 집권여당에서 아무리 잘 나가는 분이라도 이런 짓 하는 분에게는 언제라도 돌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다. 그 정도의 분별력은 있다. 이게 바로 홍위병과 친위대의 차이. 물론 이 차이는 고향의 차이가 아니라 교양의 차이다.

진중권/<아웃사이더>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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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에서 무단으로 퍼 왔습니다. ^^;

사실 글 자체는 그리 새롭다거나 날카로운 글은 아닌데, 마지막 문장이 너무 웃겨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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