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ch-22
- Joseph Heller 지음 / Simon & Schuster / $16.00
믿을 수 없다. 이런 소설을 지금까지 몰랐다니. 이렇게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뻔뻔하고, 반짝반짝 재치가 넘치며, 말도 못하게 웃긴, 하지만 동시에,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안타깝고, 숨막히게 긴장감이 넘치며, 분노로 열통이 터지게 하는, 그러면서도 잔잔한 미소로 마지막 책장을 덮게 하는 책을 나는 만난 적이 없다. 올해 최고의 책을 넘어, 내가 지금까지 만난 최고의 명작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내가 만약 소설을 쓴다면, 바로 이런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론, 명작에는 무릇 진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에겐 이 책은 너무 가볍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특히 초반부의 좌충우돌은 멍청하고 산만한 인물들이 벌이는 반복적인 농담들로 가득해 그저 쓴 웃음을 자아내기 위한 블랙 유머로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초반의 다소 느슨한 전개가 단박에 깨지는 볼로냐 폭격 장면 이후부터,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별 생각 없이 지나쳤던 유머들이 돌고 돌아 뒤통수를 치듯 다시 등장하면서 정교한 플롯이 드러나고, 몇몇 장면들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밀도를 보이며 읽는 이의 가슴을 흔들어 놓는다. 가벼움의 형식은 얄팍함의 발현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가벼움은 작품의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애초부터 의도된 표현양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가벼움의 중심에 Catch-22 가 있다. 책 속에서 Catch-22 의 정의는 명시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일련의 상황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모든 합리적 결론을 불가능하게 하는 하는 순환논리의 함정을 지칭함을 깨닫게 된다. Catch-22 의 상황은 책 전체에서 반복된다. 예를 들어, 주인공 Yossarian의 부대에서는 미친 사람만이 조기 퇴역을 신청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는데, 조기퇴역 신청을 했다는 것은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라는 논리가 대표적이다. 이 순환논리에 따르면 그 누구도 조기퇴역을 할 수가 없다. Yossarian의 결혼 신청을 받은 여자는 Yossarian 이 미쳤기 때문에 그와 결혼할 수 없다며 거절하는데, 자기와 결혼하려고 한다니 미친게 틀림없다고 답하는 식이다. 물론 결혼은 불가능하다.
얼핏 듣기에는 억지 농담 같지만, 의외로 이 순환 논리의 틀은 견고하다. 겉으로는 명제와 명제를 연결하는 고리가 형식논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명제 자체가 권력 의지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증명하기도, 반증하기도 어려운 이들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명제가 참임을 선언하는 권력의 존재가 불가결하다. 그래서 이 권력관계에 순응하는 한, 이 순환 논리의 고리 안에 발을 담그면 벗어날 방법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사람들이 순환 논리 속에서 버둥거리는 동안, 이 함정(catch)을 놓은 이들은 본래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합리와 설득을 가장한 권력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폭력과 공포를 동원하는 억압 체제에서야 굳이 그러한 메카니즘이 필요치 않다. 오히려 형식적 민주주의가 발달하여 보다 세련된 지배의 기술이 공고화한 곳에서 비로서 이러한 함정들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니,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이 책이 전통적 악역인 추축국이 아닌 승전국 미국 자신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권력의 작동방식을 이해하지 못한채 순환 논리의 덫에 걸려 우왕좌왕하다 희생된다. 자본과 권력과 권위의 신성동맹은 부패하고 멍청하며 관료적이지만 오직 권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승자가 되어 웃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것이 자칭 현대 민주주의의 본산이며 유럽과 세계를 구한 정의의 국가 미국의 맨얼굴 아니었는가.
저들 신성동맹이 우리의 어깨 위에 올려놓는 "의미"의 그물망은 무겁다. 국가, 민족, 자유, 정의 같은 "거대한 의미"들은 "작은" 개인의 삶보다 더 중요하다는 가치 체계를 우리에게 심어 놓는다. 정색하고 그 체계에 맞서 싸우다간 목이 부러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신, Yossarian 은 슬쩍 몸을 틀어 내리누르는 "의미"의 무게를 비껴간다. 가벼움으로 "의미"의 무게를 희석시킨다. 이렇게 "의미"들의 오오라를 벗겨내자, 작은 개인들의 모습만이 남는다. "의미" 속에 숨어 있던 이들의 비열함과 위선. 그들 때문에 아무 "의미" 없이 죽어간 사람들. 이 부조리의 소용돌이 속에서 Yossarian 의 외로운 투쟁 - 살고 싶다는 희망, 타인을 죽이지 않고도 내가 살 수 있는 가능성에의 모색 - 은 그 어떤 "의미"들보다 고귀하고 진중해 보인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가벼움의 전략은 우리에게 그닥 생소하지가 않다. 이 책이 선보이는 가벼움의 형식이 2000년대 한국 문학을 관통하는 특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박민규를 필두로 여기저기서 불쑥 튀어나온 일련의 젊은 작가들은 가벼움을 무기로 빠른 속도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드라마로 치자면 정극 대신 시트콤의 형식이 대세를 이룬 셈인데, 형식은 가벼워졌지만 그 안에 담긴 문제의식까지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 작품 속 껄렁껄렁한 주인공들이 멍청함을 가장해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행동들은 희화화를 통해 사회와 제도가 강제하는 규범을 무력화 한다는 점에서 전복적이기까지 했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 사회의 지배질서가 보다 "합리적"으로 변하고 공고해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으로 보인다. 군사독재에 맞섰던 80년대의 한국문학은 비장한 결의와 거대담론의 "무거움"을 채택했었고, 자본의 지배가 공고해지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완성되어가던 90년대의 한국문학은 사회적 맥락을 잃고 개인의 내면 속으로 침잠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한 과도기를 거쳐, 2000년대의 작가들은 "가벼움"이라는 전략을 통해 주어진 의미체계에 저항하며 동시대인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논리와 이성이 만들어낸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그것들을 조롱하고 탈주하는 해방된 인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Yossarian 처럼 말이다.
오늘의 한국사회가 거대한 블랙코미디처럼 보인다면, 그게 바로 Catch-22 라고 생각하면 된다.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폭력을 쓸 수 밖에 없었는데, 폭력을 썼기 때문에 쫓겨나야 한다는 순환 논리가 먹히는게 바로 이 곳이다. 돈이 없어 돈을 벌 기회조차 박탈당한 이들에게, 억울하면 돈 벌라는 말로 화답하는 것이 이 곳이다. 정작 분노해야 할 이들은, 아무도 죽이지 말라고 외쳐야 할 이들은 엉뚱하게 합법이니 불법이니, 국익이 어쩌니 하는 논쟁에나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이것이 주어진 의미체계에 순응하는, Catch-22 에 사로잡힌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그러니, 무려 40년도 더 전에 쓰여진 이 소설 <Catch-22> 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시대에 질식당하고 있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할 수 있다. 불안을 치유하기 위해 자기계발서를 탐독하는 대신, 그대, 이 책을 읽어라. 그래서, 그대들을 옭아매는 꼰대들의 세상에 반기를 들지어다.
탈주하라, 그대. Yossarian 처럼.
]]>위험한 동화
- 아흐멧 알탄 지음/이난아 옮김/황매/9,000원
뱀의 몸을 한 채 첫날밤마다 신부를 잡아먹는 왕자. 처녀는 마흔 겹의 옷을 입고 왕자의 방으로 들어가 옷을 하나씩 벗을 때마다 왕자에게도 옷을 벗어달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뱀이 마흔 번의 허물을 멋자, 그 안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본래의 왕자가 나타나 진정한 사랑을 맞이하게 된다는 이야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명 어렸을 때 들어본(아마도 읽어본) 적이 있는 이야기다. 물론, 이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 마음에야 아마도 좀 무서운, 하지만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행복한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위험한 동화>는 이 책 전체의 제목인 동시에, 책 속에서 베린이 주인공 "나"에게 뱀 왕자 이야기를 들려주는 챕터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동화가 왜 "위험"한지, 그리고 이 동화가 전체 스토리와 갖는 연관성을 따져보면, 이 책은 위 동화의 현대적 해석이라 부를만하다. 물론 이는 아흐멧 알탄이라는 한 개인의 해석일 수도 있지만, 터키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작가 한 개인을 넘어 그 사회, 그리고 시대를 관통하는 해석으로서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마치 마광수나 장정일의 소설들이 당시 한국 사회의 한 징후를 포착해내며 아이콘이 된 것처럼 말이다.
어딘가 잘 정리된 논문 또는 책이 있을 것 같은데, "사랑"의 개념이 시대와 함께 변해온 것은 분명하다. 예컨데, 근대가 "개인"을 탄생시킨 이래, 사랑은 개인의 권리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기능해 왔다. (오늘날까지도 종종 통속극 등에서 활용되고 있듯이) 전근대의 유물인 규범과 질서에 맞서 사랑을 쟁취하는 개인의 이야기는 근대 문학의 좋은 소재가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사랑은 불가침의 이상향, 절대적 가치를 지닌 미덕으로 숭배되어 왔다. 그러니, 이 시대의 사랑은 낭만적 사랑의 시대이기도 한 셈이다.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을 방해하는 시련이 대립구도를 이루며 결국 사랑을 쟁취하고야 마는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의 시대.
그러나, 현대사회의 성립은 낭만적 사랑의 토대 자체를 흔들어 버린다. 파편화된 사회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한 개인은 이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만 한다. 가면 속의 개인은 고독하다. 진정한 자아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대 역시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과연 날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연인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까. 사랑이라는 것이 진짜 존재하기는 할까. 서로의 진심은 가면의 표면에서 미끄러지고, 끊어진 소통의 자리에는 앙상한 성애만이 남는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는 몸부림. 그것이 현대인의 사랑을 규정한다.
소설 속 베린은 끊임없이 "나"에게 진실을 요구한다. 왕자가 허물을 벗듯이 가면을 벗고 진실한 자신을 내보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허나 가면 속에서 드러난 얼굴이 또 다른 가면이 아니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가면을 벗겨야 상대의 본모습이 드러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왕자가 얼마나 많은 허물을 쓰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면, 과연 처녀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자칫 나 혼자만 발가벗은채 이 위선의 게임의 희생양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은 가면을 벗는 손짓을 더욱 느리게한다. 끊임없는 의심과 회의의 소용돌이, 그것이 현대인의 사랑인 셈이다. 그렇다면, 가면을 벗으라 말하는 이 동화는 정녕 "위험한" 동화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아마, 이 소설에 대한 보다 깊은 분석은 90년대라는 콘텍스트 안에 놓인 터키 사회를 함께 바라보아야 가능할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아직 남아있던 낭만적 사랑에 대한 기대가 현실 속에서는 끊임없이 배반당하면서 사람들이 느꼈던 당혹감과 혼란을 적절히 짚어내었기에 사회적 이슈가 되고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90년대 한국 사회 역시 비슷한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노골적 성애 묘사가 사회적 금기에 균열을 내면서 본질을 벗어난 논쟁만 유발했다는 점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시대를 읽어내기 좋은 텍스트지만, 아무래도 2009년에 읽기엔 조금 뒤처진 소설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가 없다. 디지털 시대의 사랑은 또 다른 느낌일테니 말이다.
ps. 이 책의 초판 인쇄일을 보고 조금 놀랐다. 97년. 오르한 파묵의 노벨상 수상과 함께 국내에 잠깐 불었던 터키 소설 열풍에 재출간되었거니 했는데, 이미 오래 전부터 터키어를 전공하고 터키 소설을 번역해온 역자에겐 믿음이 간다.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 : 민주화 속의 난민화, 그 현장을 가다
- 유재현 지음/그린비/15,900원
서점만 가면 널리고 널린게 여행기지만, 유재현의 여행기는 분명 그 중 빛나는 군계일학 중 하나다. 낯선 풍경이나 신기한 유물, 에피소드에 매몰되지 않고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를 조밀하게 읽어내는 작가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러한 그만의 색깔은 일정한 독자층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고, "유재현 온더로드"라는 이름의 시리즈물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그 시리즈의 네번째 결과물이다. 개인적으로는 쿠바를 담은 <느린 희망>에 이어 두번째 읽는 그의 책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스럽다. 정작 그 자신은 길 위에서 길을 잃은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 네팔, 그리고 티벳, 홍콩까지. 그가 둘러본 아시아의 오늘은 여전히 참담하다. 독재 정권의 폭압이나 자본의 전횡, 아니면 전제 군주의 전근대적 폭력까지, 아시아의 민중들이 응당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는 저들 기득권층의 폭정 아래 질식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를 짚어내는 저자의 목소리도 어느 때보다 날이 서 있다. 이 날선 목소리가 10여년간 뒷걸음질 친 아시아의 민주주의를 목도하면서 그가 느끼는 절망과 아픔 때문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는 않는다. 하지만.
난 도대체 이 여행의 목적을 모르겠다. 부제로 "민주화 속의 난민화, 그 현장을 가다"라고 되어 있는데, 정작 책 속에선 "현장"이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그 나라에 도착했다라는 간략한 서술 이후, 이내 정치적 상황이라던가 역사적 배경과 같은 설명으로 건너뛰어 버린다. 이 설명들이 유용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들은 책상머리에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지식들 아닌가. 저자가 그 나라까지 굳이 찾아가서 생색내며 쓸 필요는 없는 내용이라는 뜻이다. 오히려 여행기라는 틀에서 중요한 것은 "현장감", 말 그대로 "현장"의 당사자들이 어떻게 느끼고 있으며, 어떤 대안을 찾아 나서고 있는지 아닐까.
물론 현장의 이야기도 일부 실리긴 한다. 하지만 이들을 대하는 저자의 자세는 다분히 고압적, 심지어 독선적이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빈민운동을 하는 말레이지아의 청년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언급하자 "당신, 공산당이야?"(말로 한 건 아니지만 생각으로) 라며 선을 긋는가 하면, 미얀마 정부가 싸이클론 피해자들에 대한 국제사회의 원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현장 활동가를 외세에나 의존하려고 하는 무력한 세력으로 낙인찍어 버린다. 요컨데, 저자에겐 현장의 움직임보다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본인의 판단이 더 중요해 보인다. 그리고는 이도 저도 못마땅한 현실을 뛰어넘는 희망으로 그 실체조차 모호한, 그래서 편리한, "민중"이라는 이름을 호명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정부의 도움을 바라거나 기다리지 않았어요. (...) 전신주의 전선은 언제 가설될지 몰랐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쓰러진 전신주를 세웠어요. 뭐랄까. 그건 마치 코뮌을 보는 것과 같았단 말이지요."
그는 그 현장에서 민중의 위대함을 느꼈다고 했다. (...) 그러나 늦지 않게 그가 느꼈던 그 위대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싸이클론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 속에서 미얀마의 민중들이 홀로 분투하는 까닭은 코뮌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부패하고 무능한 미얀마의 군사정부가 복구에 힘을 쏟기는 커녕, 국제사회의 원조마저 거절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저자는 양비론을 들고 나선다. 군사정부도 나쁘지만, 원조를 시발점으로 개방을 강요하는 서방 국가들의 과거 전례가 군사정부가 문을 닫아걸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말 자체는 맞는 얘기다. 하지만 당장 생사의 기로에 선 민중들에게 구호물자가 더 시급한지, 서방의 원죄를 묻는 것이 더 시급한지는 분명한 일 아닌가. 원론이나 읊다가 생뚱맞은 민중예찬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무책임함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저자가, 그리고 우리가 제 아무리 아시아의 민주주의를 바란다고 해도, 우리가 그 민주주의를 만들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사회의 진보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만이 담보할 수 있고, 담보해야만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과 어깨를 걸고 연대하는 것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이해하는게 우선이 아닐까. 의견이 다르고 전망이 다른 것은 그 다음의 문제다. 역설적으로 저자가 처음 방문했다는 네팔의 이야기는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유익했는데, 그것은 저자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혹 저자는 그동안 보아 온 다른 국가들의 사정을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쿠바에서의 낯설음과 놀라움이, 그리고 그 경험 앞에서 저자가 보였던 깊은 사색이 그립다.
ps. 좋았던 책보다 나빴던 책 리뷰 쓰는게 훨씬 수월하게 느껴진다. 성격이 나빠지고 있나보다.
]]>People of the Book
- Geraldine Brooks 지음/Viking/$25.95
춘천 북쪽 용화산 기슭 근처에 고탄이라는 동네가 있다. 집안 선산이 있는 곳인지라 어렸을 때부터 명절 때마다 꼭 가게 되는 곳이다. (그러고보니, 한국에 있었으면 지금쯤 벌초하러 갔겠구나) 예전에는 춘천에서 이 곳으로 가려면 춘천댐 근처까지 올라가서 물길을 따라 나 있는 좁은 도로를 따라 들어가야 했는데, 언제부터인가(기억이 잘 안 난다) 지내리를 통해 고개을 넘어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생겼다. 이 고갯마루 무렵에서 뒤를 돌아보면, 산등성 사이에 자리잡은 작은 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물길을 따라 자리잡은 작은 마을들과 논밭들. 전형적이라 할 수 있는 한국 농촌의 풍경이다.
이 풍경 자체가 내게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이 풍경을 볼 때마다 인간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마 수천년전 춘천 부근에 터를 잡았다는 고대국가 맥국(貊國)에 대한 이야기가 상상력을 불어넣은게 아닐까 싶다. 수천년 전에도 누군가가 저 곳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언제나 나를 경이롭게 한다. 기껏해야 50~100년 사는 인간의 삶이 쌓이고 쌓여 수천년의 강을 이룬다. 누군가 이 땅에 자리를 잡아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의 자식이 또 자식을 낳아 오늘의 나까지 이어진 셈이다. 그 강물은 나를 지나쳐 또 수천년을 흐를 것이다. 그것이 역사책에는 담기지 않는 진정한 인간의 역사 아닐까.
물론, 기록에 남지 않은 이들 하나하나를 오늘의 우리가 기억할 방법은 없다. 큰 사건이나 업적이 없는 이상 개인의 삶은 역사학의 시야 밖에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익명성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마을 제방의 저 돌을 쌓았고, 누군가는 우물을 파 시원한 물을 퍼올릴 수 있게 하였고, 또 누군가는 나무를 심어 쉴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오늘의 우리가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과거의 그들을 기억하는 출발점은 바로 그 간접의 증거들이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 상상력의 벽돌을 쌓아올려 모두가 볼 수 있는 작은 사원을 짓는 것이 문학의 몫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People of the Book>은 책보다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사라예보 하가다(Sarajevo Haggadah)"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소재이지만, 작가가 이를 통해 풀어내려 한 것은 이 작은 책 한 권에 얽힌 이름 없는 이들의 삶이다. 책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작은 힌트들(곤충 날개, 얼룩, 흰 머리카락 등)은 각각 이 책이 거쳐간 인물과 시대들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이어지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땅의 오래되고 낯선 인물들의 모습을 우리 앞에 그려 놓는다. 하지만 이 이국적 풍광과 인물들 속에서 느껴지는건 이질감이 아닌 동질감과 공감이다. 슬픔과 기쁨, 분노와 용서, 탐욕과 박애. 그 긴 세월 동안에도 우리는 모두 이토록 인간적이지 않았는가.
책의 중심 소재가 된 "사라예보 하가다"는 실존하는 책이다. 하가다(Haggadah)는 유대인들이 유월절의 첫날밤(Passover Seder) 자식들에게 유대인들이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사용되는 경전이다. 보통의 하가다는 간결하고 검소하게 만들어지는데 비해 사라예보 하가다는 매우 화려한 그림과 장정을 사용해 예외적인 사례로 더 큰 문화사적 가치를 가진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이 작가의 흥미를 끈 것은 그 예외성 때문은 아니다. 2차 대전과 유고슬라비아 내전 등을 거치며 이 책은 여러번 파괴될 위기를 넘겼는데, 그 때 이 유대교 경전을 구해낸 것은 다름 아닌 무슬림이었다. 오늘날의 종교간 갈등(을 표방한 헤게모니 다툼)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종교적 관용의 실례는 좋은 소재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감동적인 이야기인데, 소설로 재구성되면서 어쩐지 상투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야기의 초점이 무슬림이 아닌 유대인에 맞춰지면서 목숨을 걸고 책을 구해낸 무슬림의 이야기는 곁가지로 밀리고 있는 탓이다. 신앙은 그 속성상 자신의 신앙이 옳다는 독선을 어느 정도 전제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믿기 때문에 신앙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 독선을 넘어선 관용이 더욱 어렵고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무슬림들에겐 그게 너무 쉽다. 마치 아무 이유 없이 백설공주를 도와주는 착한 일곱 난장이처럼 말이다. 그러니 결국 주인공은 유대인이라고 읽는건 그저 내 편견일까? 게다가 주인공인 한나가 알고보니 유대인 핏줄이었다는 내용까지 접하고나면 슬슬 짜증까지 밀려온다. 내가 보기엔 굳이 전체적인 이야기의 전개와 연관도 없는데 말이다. 왜 이렇게까지 유대인이라는 핏줄에 집착하는거지?
개인적으로 내러티브의 개연성을 떨어트리는 소재는 과감히 덜어내는 것이 좋은 작가의 기준이라고 믿는다. 작가로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지 몰라도, 독자에겐 과잉으로 느껴질 뿐이니까. 작가의 전작들을 접해보지 못해서 이 작가의 일반적인 성향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그 때문에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 읽을 생각까지는 딱히 들지 않는다. 좋았던만큼이나 실망도 남는 책이다.
ps. 원서읽기에 대한 첨언 : 단어나 문장 등이 전체적으로 무난한 수준이니 원서로 읽어도 크게 부담은 없겠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굳이 원서로 읽을만한 이유도 별로 없어 보인다. 중간중간 히브리어가 영역되지 않고 나오는 경우가 있어서 좀 귀찮기도 하다. 국내 번역본의 번역이 얼만큼 잘 빠졌는지는 모르겠는데, 왠만하면 번역본으로 읽는게 무난할 듯 싶다.
]]>르몽드 세계사 : 우리가 해결해야 할 전 지구적 이슈와 쟁점들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권지현 옮김/휴머니스트/25,000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란 이름을 처음 들어본건 대학 때 [언론학 개론] 수업을 들으면서였다. 교수님은 한국 언론이 전하는 외신 보도가 몇몇 소수의 통신사에 지나치고 의존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균형감 있는 국제 감각을 원한다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영문판을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거라고 추천하셨다. 물론 언론학 전공도 아닌 이공계 학생이 매달 일정액을 내면서까지 굳이 구독을 했을리는 만무했으니(-_-;), 교수님의 추천은 그저 추천으로만 남았을 뿐이었다. 대신, 그 기억 덕에 지금이라도 이렇게 이 책을 구해 보았으니, 교수님의 추천도 그냥 헛수고는 아니셨다고 마음으로나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세계는 넓다. 그리고 넓은 세계만큼이나, 다양한 이슈들이 지구촌 여기저기에 산적해 있다. 재밌는 것은, 한중일과 서유럽, 미국과 연관된 이슈들은 대개 익숙한 반면, 그 외의 지역 문제들은 대부분 생소하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교수님 말씀처럼, 우리가 접하는 외신의 출처가 한정된 탓이다. 꼭 어떤 "주장"만이 서구 중심주의인 것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세계를 보는 창 자체가 이미 서구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창에 비친 풍경이 제 아무리 진보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더라도, 한정된 주제와 한정된 지식만으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나는 한 때 식물에서 뽑아내는 바이오 디젤이 화석 연료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현재의 에너지 소비 구조를 대체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바이오 디젤 생산이 옥수수 등의 가격을 상승시켜 제3세계의 기아를 유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나의 관점에서는 정당한 것이 다른 관점에서는 부당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이슈들을 폭넓게 접하고 종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처럼 계속 일방적 소스만으로 세계를 바라본다면, 눈 양쪽에 차단막을 세워 한 곳만을 보고 뛰게 만든 경주마처럼, 우리도 부지불식간에 서구 중심적 시각과 사고를 체득하며 살 뿐이다.
프랑스 <르몽드> 지의 국제문제 전문지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펴 낸 이 책은, 다른 시각에서 세계의 구석구석을 한번씩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물론 이들 역시 또 다른 서구 언론 중 하나일 뿐이지만, 적어도 미국의 시각에서 벗어나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 각각의 이슈를 길게 다루지는 않지만, 주간지답게 요점을 꼭꼭 짚어내기 때문에 전반적인 개요로는 손색이 없다. 넉넉한 판형 속에 담긴 자료도 충실하다. 쉽게 접하기 어려운 자료들을 잘 도표화해서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수업 등에서 참고 자료로 써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읽다보면 한국에 소개된 시점이 너무 늦은게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 최대 2006년까지의 상황을 담고 있는데, 책이 국내 출간된 것은 2009년이니 어떤 이슈들은 이미 과거의 사안이 되어 시의성을 잃은 경우도 많다. 현재 진행형의 이슈들도 2006년 이후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전혀 힌트가 없어 일일히 찾아봐야만 한다. 번역하면서 출판사에서 간략히라도 정리해 줬으면 어땠을까. 물론 독자에게 남겨진 숙제라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같이 게으른 독자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별점 한 개를 깍는건 순전히 그 때문이다. 게으른 독자의 월권행위라면 할 말은 없다. ^^;
]]>2001 Space Fantasia
- 호시노 유키노부 지음/김완 옮김/애니북스/28,500원
이름을 처음 들어본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예전에 그의 다른 작품 <스타더스트 메모리즈>를 봤다는걸 뒤늦게 깨달았다. 당시 무척 재밌게 읽었던 기억은 있지만 작가를 따로 기억해 두지는 않았었는데, 그림체나 내용 등이 일본 작가라기보다는 미국 작가의 것처럼 보였기에 호시노 유키노부라는 이름이 <스타더스트 메모리즈>의 그 작가일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했다. 알고보니 (이 작품집의 출간 소식을 접한 신문 기사에 따르면) SF 팬들 사이에서는 레전드 급으로 칭송받는 작가였나보다. 물론 작가의 명성이 작품의 질을 보장하는건 아니겠지만, 25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정식 완역본"의 형태로 "굳이" 재소개될 정도의 작품이라면 어느 정도의 기대는 가질만하지 않을까. 그게 이 3권의 (만화)책이 태평양을 "굳이" 건너 내 손까지 들어오게된 까닭이다.
<2001 Space Fantasia> 라는 제목은 <2001 Space Odyssey>와 <천일야화>를 합쳐놓은 것이다. 아서 클락의 소설이자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제목이기도 한 <2001 Space Odyssey>를 차용한 것은 이 작품 전체가 SF 고전들에 대한 오마주의 성격을 띄고 있음을 뜻한다. 형식면에서는 긴 서사를 매일밤의 이야기 단위로 들려주는 <천일야화>를 빌려왔다. 그렇게, 전체 3권, 20개의 밤으로 구성된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대략 4세기에 걸친 인류의 우주 진출 과정을 보여준다. 물론 처음 두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현재의 과학기술을 넘어선 상상의 미래를 다루고 있지만, 어느 하나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없다. 작품의 밑바탕을 이루는 "과학적" 상상력 위에 내러티브의 개연성을 얹은 덕이다.
태양계의 형성을 밀턴의 <실낙원>에 등치시킨 [죽음의 별] 에피소드는 작가가 이 두 요소를 어떻게 절묘하게 조화시켰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는 물질과 반물질, 그리고 그들 간의 소멸 등의 이론은 현대 물리학에서 가져온 개념들이다. 하지만 반물질의 덩어리인 마왕성을 상정하여 태양과 대비시키고, 이를 빛과 어둠, 선과 악의 싸움인 <실낙원>으로 연결시켜 미지의 우주를 마주한 인간의 두려움으로까지 엮어내는 작가의 솜씨는 절로 혀를 내두르게 한다. 게다가, 이 반물질을 통해 인간이 외우주로 뻗어 나갈 동력을 얻게 된다는 설정은 선악과의 비유로 연결되면서 탁월한 복선의 역할까지 훌륭히 해 내고 있지 않은가. 과학적 상상력이 정통 SF 로서의 품격을 책임져 준다면, 장르를 넘어선 보편성을 확보해 주는건 바로 이렇게 촘촘히 잘 짜여진 내러티브의 힘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에피소드에 치중하는 면이 있지만(뒤로 갈수록 <스타더스트 메모리즈>와 비슷해진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인간의 우주 도전을 다룬 한 편의 장대한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이 서사의 결말이 일종의 실패로 끝난다는 점이다. 작품 후반의 (다소 파편적으로 느껴지는) 에피소드들은 주로 인간이 외우주에 정착하려다 실패하는 사례들을 보여주는데 치중하는데, 많은 경우 고작 1~200년의 경험으로는 인간이 새로운 환경을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 많은 별들 가운데 그럭저럭 "무난한" 환경의 거점 하나 찾는게 불가능할까 싶기도 하지만, 일단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것은 기술의 발전만으로는 정복할 수 없는 축적된 경험, "역사"의 부재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이 다른 SF 작품들과 가지는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가 바로 외계의 지적 생명체를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주로 뛰쳐 나갔지만, 인간은 여전히 외롭다. 상상해보라. 이 무한하고 어두운 공간 속에서 누군가 손을 잡아줄 존재 없이 그저 혼자만의 힘으로 좌충우돌 전진하기란 얼마나 고된 일이겠는가. 한 개인이 혼자만의 힘으로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이란 존재도 혼자만의 힘으로 성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게 영화 <Contact> 에서처럼 아버지 같은 자상한 존재이건, 아니면 인간 따위 하며 비웃음을 날릴 시크한 외계인이건, 다른 지적 존재와의 만남은 인간의 우주 진출의 결과가 아닌 선결조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우주는 언제나 인간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비록 지금의 우리는 밤하늘의 별들이 어떤 초월적 존재가 아닌 우리와 똑같은 "물질"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우주가 더 이상 신비롭지 않은 무엇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주는 여전히 광대하고, 인간은 여전히 이렇게도 작고 약할 뿐이니까. 이 작은 인간의 정신이 더 크고 거대한 무엇을 꿈꾸는것, 그것이 상상력의 힘 아니었는가. 이 작품을 보라. 과학이 열어젖힌 지평 너머로 새로운 상상력이 꿈틀댄다. 그 상상력은 여전히, 내 가슴을 뛰게 한다.
]]>추락
- 존 쿳시 지음/왕은철 옮김/동아일보사/11,000원
존 쿳시를 읽을 때면 난 김훈을 떠올린다. 담담하면서도 간결한 서술 방식도 그러하거니와, 굳이 수컷 냄새를 감추려 들지 않는 남성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은 두 작가를 하나로 묶는 공통점이다. 스타일만이 아니다. 두 작가의 작품 세계도 묘하게 닮아 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치안판사의 모습에 <칼의 노래>의 이순신의 모습이 겹치고, 이 작품 <추락>이 그리는 삶의 치욕(이 책의 원제목은 [Disgrace], "치욕"이다)은 <남한산성>의 그것과 닮았다. 전혀 다른 역사와 환경에 속한, 지구의 정반대편에 위치한 두 나라에서 이렇게 닮은 꼴의 작가와 작품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흥미롭다.
허나, 쿳시에게는 김훈의 세계가 지닌 단단함이 없다. 김훈의 단단함은 그가 지닌 자기 확신의 결과다. 제 몫의 밥벌이는 하고 살아왔다는 자긍심, 세상 모든 이해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묵묵히 노동하며 그 삶을 이어온 인간의 생(生)은 그의 세계가 지닌 최후의 긍정이다. 시련은 인물들의 현재를 허물지만, 생 자체에 대한 긍정은 그 해체의 끝에 굳건히 버티어 선 마지막 보루가 되어준다. 하지만 쿳시에게는 존재 자체가 긍정이라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부서지고 부서지고 또 부서지지만 그 해체의 끝은 가늠하기 어렵다. 바닥을 모르는 추락. 그래서, 쿳시의 세계는 훨씬 위태롭고 또 불온하다.
쿳시의 이와 같은 태도는 시니시즘(Cynicism)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일부 사전에서는 시니시즘을 “견유주의[犬儒主義]”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한 학파인 견유학파(Cynics)를 지칭하는 것으로 현대의 시니시즘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현대의 시니시즘은 주로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며, 자신이 속한 사회와 제도의(따라서, 그 사회의 한 구성원인 자신의) 도덕적, 사회적 가치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서구 문명의 오늘이 제국주의적 폭력과 수탈에 기반하고 있다는 인식이야말로 이들 시니시스트들의 가장 주된 문제의식 중 하나이다. 어떤 이슈에 대해 제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하더라도 스스로의 과거에 대한 인식과 통렬한 반성 없이는 위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지식인 계층에 속하는 쿳시가 이와 같은 시니시즘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인다. 17세기 보어인(네덜란드계 백인 이주민)의 정착 이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사는 소수의 백인들이 다수의 흑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자행한 온갖 폭력들로 점철되어 왔다. 비록 쿳시 본인이 이러한 폭력의 직접적 가해자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 역시 백인 사회의 구성원으로 기득권을 향유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스스로의 도덕적 근거를 회의하게 만들기엔 충분하지 않았을까. 김훈과는 달리, 그저 살아있다는 것, 존재 자체는 그에게는 도저히 그 자체로 선(善)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좀 더 미묘하다. 1990년 악명 높은 인종분리 정책(아파르트헤이트)의 폐지와 함께 시작된 백인 지배의 종식은 넬슨 만델라를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집권으로 일단 그 정점에 이른다. 하지만, 오랜 차별의 결과 형성된 흑백 사회 간의 적대감과 기득권의 불균형, 빈부격차는 여전히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지배하고 있다. 특히 흑인들이 오랜 기간 지녀온 분노와 박탈감들이 정치적 자유의 획득과 함께 터져나오면서, 곳곳에서 백인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으로 분출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은 쿳시와 같은 백인 지식인들을 딜레마에 처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백인들이 지닌 기득권을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흑인들의 분노로부터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을 지켜야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야말로 이 작품 <추락>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문제의식이다. 주인공인 루리 교수와 그의 딸 루시는 일단의 흑인들에게 공격당하고, 루시는 그들에게 겁탈까지 당한다. 응당 어느 아버지든 그랬을 방식으로 루리 교수는 분노하고 범인들을 찾아내어 처벌하려고 하지만, 놀라운 것은 루시의 반응이었다. 그녀 역시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워 했다. 하지만, 분노하고 보복하는 대신 그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를 선택한다. 윤간의 결과 생겨난 아이를 낳기로 하고, 공격의 배후에 있었던게 아닐까 싶은 이웃 페트로스가 그녀를 첩으로 들여 보호하겠다고 제안조차, 그녀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체념은 아니다. 그녀는 다시는, 그 누구도 자신의 몸에 손대는 것을 용납치 않겠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선택이 가진 불가피성을 옹호한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떠날 수 없다는 것 뿐이에요. 아버지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거예요. (…) 그래요, 제가 가는 길은 잘못된 길일지 몰라요. 하지만 제가 지금 농장을 떠나면, 저는 패배한 것이 돼요. 그리고 그 패배감을 평생동안 간직하며 살아야 할 거에요.(p.242)
이것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들이 처한 현실이다. 이 땅에 터를 내리고 몇 세대를 이어온 그들은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이 땅의 아들 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누려오던 기득권을 잃고, 심지어 흑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어 폭력에 노출되더라도, 그들 역시 떠날 곳 없이 이 땅에 묶여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루시는 그걸 잘 이해하고 있었을 뿐이다. 굴종이라고?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아프리카를 강제로 점령한 서구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점령을 벗어날 무렵, 보호를 명분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하위 파트너로 편입될 것을 요구하는 또 다른 서구인들이 나타났다. 아프리카인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이 땅을 떠날 수 없는 그들이 그 치욕을 받아들이면서 살아온 것, 그것이 아프리카의 역사 아니었는가? 그렇다면, 루리 교수는 이 아프리카의 역사 앞에 무엇을 해 왔던가?
시를 통해 정신의 쾌락을, 그리고 여자를 통해 육신의 쾌락을 누리며 기득권 속에 안락하게 살아가던 루리 교수가 추락한 곳은 바로 그 아프리카의 맨바닥이다. 그 추락의 과정은 한없이 나약하고 위선적인 지식인의 맨살을 드러낸다. 욕망조차 억제하지 못했으면서 사람들에게는 허세를 부리고, 정작 날것의 폭력 앞에서는 무력했으면서 경찰을 들먹이며 복수와 처벌에 목메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가. 이렇게 쿳시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도덕적 근거를 허물어 내린다. 명백한 불의 앞에서조차, 자신에겐 정의를 외칠 권리 따위는 없다는 듯이. 결국 루리 교수도 싸움을 포기하고 침묵한다. 대신, 스스로를 죄수로 삼아 오지의 동물보호센터에 자신을 유폐시킨 채, 치료가 불가능한 동물의 안락사를 돕고 그 시체를 처리하며 살아가기를 택한 것은 일종의 속죄의 의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이제 치욕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오욕의 역사 속 아프리카인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제 자신의 차례가 다가왔다고 호들갑을 떨며 세상 뒤집어질 것처럼 분노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추락은 치욕이었지만, 치욕 이후의 삶은 그저 또 다른 삶인 까닭도 있다. 아무도 듣지 않을 오페라를 작곡하고, 개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지만, 거창한 의미에의 강박이 없다면 이를 굳이 "실패한" 삶이라 이름붙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저, 또 하나의 삶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ps. 노무현 전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접했을 때, 이 소설을 떠올렸다. 그도, 치욕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는 없었을까 하고.
질병판매학
- 레이 모이니헌, 앨런 커셀스 지음/홍혜걸 옮김/알마/15,000원
예전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기업의 이미지 광고를 보면 그 기업의 부족한 점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예를 들어, 삼성이 '인간 경영'을 외친건 삼성이 가장 '비인간적인' 경영을 해 왔다는 뜻이며, 대우가 '탱크정신'을 내걸었던건 가장 내구성이 떨어지는 제품을 만들어 왔다는 뜻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막스 베버가(문득, 길 가다 불심검문에 걸린 친구가 "막스" 베버 책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잡혀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생각난다) 자본주의를 놓고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어쩌구 했을 때, 자본주의의 정체는 이미 뽀록났는지도 모르겠다. 근검? 절약? 이제 다 아는 처지에 흰소리 그만하자.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동력은 절제가 아니라 탐욕 아닌가.
물론 탐욕의 역사는 굳이 자본주의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탐욕은 사실상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해 왔고, 수많은 '비윤리'적 행위의 직접적 원인이 되어 왔다. 그래서 인류가 만들어낸 많은 종교와 사상들은 탐욕 자체를 비윤리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터부시 함으로써, 탐욕의 결과로 인해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코자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권력과 결합된 탐욕이 인간의 역사에서 사라져던 적은 없었지만, 윤리적 요구가 최소한 권력의 폭주에 일종의 브레이크 역할을 해 왔던 것은 사실이었다. 최소한 윤리는 더 나은 가치를, 그리고 그러한 윤리가 지켜지지 못하는 현실은 지양해야 할 죄악으로 인식되었으니까. 그렇게, 탐욕에 저항하는 윤리가 있었기에 인류의 역사가 지금까지 지속 가능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간의 탐욕과 그 탐욕을 억제하는 윤리 사이의 균형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욕망들이 시장을 통해 경쟁함으로써 그 효율성을 획득하는 체제이다. 당연히 이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탐욕이 장려(?)되어야 하는데, 사회의 존속을 위해 탐욕의 억제를 요구하는 윤리와 모순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데올로기라는 상부구조가 그 경제적 토대와 상충될 때 선택의 폭은 넓지가 않은 법이다. 토대를 전복하거나, 혹은 사라지거나. 그러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윤리의 개념이 희석되는 것은 놀랄 일은 아니다. 오늘날 윤리는 기껏해야 개인적 차원에서만 통용될 뿐, 사회 전체를 규율하는 원리로서의 역할은 '법'의 역할로 넘어가 버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법은 윤리를 대체할 수 없다. 그것은 법이 '가치'가 아닌 '행위'를 규정할 뿐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풀어놓은 탐욕이라는 괴물이 먹이감을 찾아 끊임없이 법의 경계를 어슬렁 대더라도, 법은 선을 넘은 괴물의 특정한 '행위'만을 제제할 수 있을 뿐 그 괴물의 목에 사슬을 붙들어 매지는 못한다. 이 책에서 폭로하는 제약회사들의 행위들은 바로 그러한 괴물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행동은 최소한 '합법'의 범위 안에 머물러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진 질병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 이윤의 수단으로 삼는 것, 그리고 심지어 잠재적인 부작용까지 감수하도록 하는 것이 과연 '합법적'이라는 이유로 용인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제 아무리 '합법적'이라 강변할 지라도, 그 비윤리성, 부도덕함까지 합리화 되는 것은 아니다.
제약회사의 마케팅 기법으로 포장된 10개의 사례들로 구성된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이 '비윤리성'의 선봉에 서 있는 지식인들의 모습이다. 제약회사들의 마케팅 기법은 크게 두 가지(첫째, 정상적 삶의 과정와 질병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환자, 즉 잠재적 고객으로 만들거나, 둘째, 질병의 원인을 생물학적 요인으로 축소시켜 치료의 방향을 약물치료로만 한정하는 방법)로 분류될 수 있는데, 양쪽 모두 제약회사로부터 스폰서를 받으면서도 독립적인 척 행세하는 지식인들(의사, 교수 등 소위 의약 전문가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들은 지식의 권위를 쓰고 담론의 형성과 그 헤게모니 투쟁을 제약회사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들의 행동은 모두 합법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부도덕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비슷한 사례들이 2009년의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서 관찰된다. 비무장의 시민을 곤봉으로 후려치거나 방패로 내려 찍으면서 합법적 진압이었다고 강변하는 경찰. 사생활이 담긴 e-mail을 검열하고 심지어 공개하면서 영장 받았으니 문제될 것 없다는 검찰. 상대를 모욕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건의 한쪽 측면만을 강조하면서도 거짓은 아니니 문제될 것 없다는 언론.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권리금은 책임질 필요가 없다며 사람들을 내쫓고 철거를 강행하는 건물주들. 그렇게, 합법적으로들 살아서 행복한가? 정말로 당신 자식들에게 처벌받지만 않으면 어떻게 살든 상관 없다고 말하고 싶은건가? 아니다. 이건 나만의 목소리가 아니다. 거리를 보라. 저기 "아니오"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과는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그저 작은 촛불 하나를 손에 들고, 이 시대에게 윤리의 회복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합법/불법의 딱지로 가려지지 않는, 양심의 소리다. 이 책의 저자들과, 책에서 소개된, 제약회사에 맞서 싸우는 활동가들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미국의 사례를 가지고 쓰여진 책이지만, 많은 내용들이 국내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미디어를 통해 질병이 소개되고 재정의되는 과정은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책의 주장처럼 독립적인 전문가 집단은 극히 부족한 것 또한 현실이다. 이런 책들을 통해 양식 있는 의약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역자가 홍혜걸 씨라는게 나를 꽤 황당하게 했다. 의학 전문 기자 출신인 역자는 황우석 사태 때, 국익을 위해서라면 황우석 씨 주장이 모두 거짓이라도 눈감아줘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윤리 따위 찜쪄먹어도 그만이라는 역자의 태도야말로 이 책과 가장 거리가 먼 태도 아닌가. 어쩐지, 잠실 경기 3루측 응원석에 앉은 롯데 팬마냥 어정쩡한 역자 서문이 눈에 걸리더라니. 번역하면서도 꽤 많이 찔렸을 것 같다.
좋은 책이지만 좀 지루한 것도 사실이다. 사례는 다양하지만 결국 제약회사가 마케팅을 통해 질병 자체를 만들어낸단다는 같은 구조니까. 거기에 역자를 잘못 고른 죄까지 더해 별점 하나 감점이다.
]]>Too Far Afield
- Günter Grass 지음/Krishna Winston 옮김/Harcourt Inc./$15.00
그 날, TV 뉴스는 긴급 속보로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알리고 있었다. 화면은 온갖 낙서로 가득한 잿빛 담벼락 주위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는데, 일부는 아예 담 위로 올라가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깃발을 흔들거나 서로 부둥켜 안은 채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감격과 환희에 찬 모습들. 하지만 어린 나로서는 무언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정도만 느낄 수 있었을 뿐,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1989년 11월 9일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1990년 10월 3일, 동독과 서독은 하나의 독일로 재통일된다. ‘통일’ 이라고는 하지만, 동독 지역에 속했던 주들이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에 가입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사실상 ‘병합’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병합의 의미는 분명했다. 동독 지역에서 40여년간 고수해 왔던 공산주의 제도와 정책들을 모두 무효화하고, 대신 서독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전면화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독일 통일은 공산주의의 붕괴,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승리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무능하고 부패한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민주적이며 부유한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는 시각은 독일 통일을 바라보는 가장 보편적인 관점이다. 분명 역사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현실 공산주의 국가들보다 최소한 더 유연한, 따라서 더 유능한 체제임을 증명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비교우위가 한 쪽이 옳고 다른 쪽이 그르다는 평가로 이어지는 것은 분명 논리의 비약이었음에도, 이러한 평가는 서독을 위시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사실, 서독인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단순화는 매우 편리한 것이었다. 이 도식을 통해 동독의 몰락이 곧 무능한 체제에서 고통받던 동독인들의 해방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여졌고, 자연스럽게 통일이 모두를 위한 善(심지어 동독의 빈곤까지 떠안은 서독의 희생이라는 주장과 함께)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What he really wants to hear is that we suffered day and night and felt like we were in one of those concentration camps(정말로 그가 듣고 싶어한 것은 우리가 그런 수용소들 중 하나에 있었던 것처럼 느끼며 밤낮으로 고통받았다는 말이었다 ). P. 272
물론, 대부분의 동독인들도 장벽의 붕괴와 독일의 재통일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2차 대전 패전 이후 점령국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분단된 나라가 하나로 다시 합쳐지는 것은 물론이요, 동독의 일상을 지배했던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독인들이 통일이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장벽 붕괴 이후 실제 통일에 이르는 불과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즉 통일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에 이미 동독인들은 통일이 자신들의 삶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왔던 삶 전체의 해체(winding down)였다.
독일 통일의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기구는 Treuhandanstalt (영역본에는 Handover Trust로 번역되어 있는데, 한국어로는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였다. 이 기구의 목적은 동독의 자산을 사유화 하는 것. 협동농장이나 공장 등 이전에는 “인민(people)”의 소유였던 자산들이 자본주의로 편입되면서 누군가의 사유재산으로 바뀌어야 했던 것이다. 이 거대한 이권을 향해 서독은 탐욕스럽게 달려들었다. 개인들은 동독 지역 구석구석을 누비며 부동산을 헐값에 사들였고, 기업들 역시 공장 등의 자산을 인수한 후 자신들의 시스템에 맞게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죽은 시체에 달려들어 살점을 뜯어먹는 하이에나 떼처럼, 그들은 무너진 체제를 갈기갈기 찢어 자신들의 배를 채웠다. 책 첫머리에 묘사되었던, 무너진 베를린 장벽에 모여들어 뜯어낸 조각을 기념품으로 챙기거나 팔아치우던 사람들의 모습은 앞으로 벌어질 통일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전조였던 셈이다.
이렇게 해체된 것은 체제만이 아니었다. 개인들의 삶 역시 그와 함께 해체당했다. 서독인이 인수한 부동산은 ‘재개발’이 되어 고급 주택가로 바뀌었으나, 그 곳에 살던 동독인들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쫓겨나야만 했다. 어제까지 “인민”의 공장에서 일하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사유화의 과정에서 해고되었고, 저가의 노동 시장을 전전해야만 했다. 그나마 모아두었던 연금과 사유재산 역시 화폐 통합의 과정에서 반토막이 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것들(공공주택, 노동자 소유의 공장 등)은 ‘사회주의적’인 사고였으며, 통일된 ‘자본주의’ 독일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오직 ‘잘못된’ 체제에서 살아왔다는 이유로 그들의 모든 사고는 ‘잘못된’ 사고방식이 된 것이다.
Furthermore, he says, and I agree, that the rules of impending unification demand- in order to justify this move as the victory of capitalism- that not only every product of our devising but also every last Eastern idea be proven worthless(더 나아가 그는 임박한 통일의 규칙들이 – 이러한 변화를 자본주의의 승리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 우리가 만들어낸 제품들 뿐 아니라, 동독식 사고 하나하나가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증명될 것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P.295
하지만 합병’당하는’ 동독 지역의 목소리는 통일의 환상에 젖어 있는 독일 주류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외면 받았다. 다시 하나가 된 ‘강력하고 위대한’ 독일에 대한 찬가가 울려퍼질 때, 그 영광된 순간이 동독인들의 희생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95년 귄터 그라스가 독일 통일이 동독인들에게 어떤 삶의 조건들을 강요했는지는 통렬하게 비판하는 이 책 [Too Far Afield(원제 : Ein Weites Feld)] 를 발표했을 때, 독일 사회가 격렬한 논쟁에 휩싸인 것은 놀랄 일은 아니다. 당시 슈피겔 지는 보수적인 평론가로 유명한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이 책을 반으로 찢는 합성사진을 표지사진으로 게제함으로써 논쟁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훗날 귄터 그라스는 이 작품을 둘러싼 논쟁이 본질적으로 ‘문학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인 성격의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미학적으로 무가치하다, 지루하다, 혹은 구동독의 슈타지(Stasi)를 미화했다 등 여러 가지 혹평이 쏟아졌지만, 논쟁의 진영은 독일 통일에 대한 평가를 두고 명확히 갈려 있었으니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소설이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철저히 ‘문학적’이기 때문이었다. 독일 통일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는 이전부터도 존재해 왔다. 다만 귄터 그라스는 문학 본연의 능력을 통해, 즉 타인(동독인)의 시각으로 세계를 조망함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더 큰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이 작품의 의미를 “독일 통일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로 단정짓는 것도 일종의 평가절하다. 사실, 통일의 형식에 대한 논쟁이라면 “흡수통일보다는 헌법 개정을 통한 연방제가 더 적절했다”는 짧은 결론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 결론을 위해서라면 작품의 주인공 역시 통일 이후 불안정한 미래에 신음하는 어느 동독 출신 노동자로 설정하는 것이 더 적절했을 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랬다면, 이 작품은 사회적으로 유의미할 지언정 문학적으로 그저 그런, 평범한 작품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다른 길을 택했다. 비록 멀리 둘러 돌아가는 길이지만, 그래서 그 의미와 깊이를 잡아내려면 훨씬 많은 노력을 요구하지만, 이를 통해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눈 앞의 사건에 매몰되지 않고 보다 더 긴 호흡으로 독일의 역사를 되돌아보도록 이끈다.
수많은 상징과 은유로 넘쳐나는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설정 중 하나는 주인공 Theo Wuttke 라는 인물이 한 세기 전을 살았던 작가 Theodor Fontane 의 삶을 재현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통일 공간이라는 좁은 시간대는 Wuttke 의 삶을 통해 20세기 전체로 확장되고, 다시 Fontane 를 통해 한 세기 전으로 이어지며, 궁극적으로는 독일의 근대사 전체로 확장되게 된다. 프리드리히 대제로부터 비스마르크, 1차 세계대전과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의 준동과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분단과 긴 냉전에 이어 마침내 재통일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이 격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 세기의 간격을 가진 두 인물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 겹친다. 시대에 따라 체제가 변하고 정부가 바뀌었지만, 실제 독일을 지켜온 독일인의 삶, 그리고 독일의 문화 유산(cultural heritage)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Theodor Fontane(1819 - 1898)
작품의 마지막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강연에서 Fonty(Wuttke 의 별명)는 Fontane 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하나씩 불러낸다. 한세기 전 독일, 특히 베를린의 시민 사회를 그린 Fontane 의 인물들은 강연을 들으러 온 사람들(대개 구 동독인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독일인들의 표상이다. 문학은 이렇게 웃고 울고 때로 환호하고 때로 분노하는 인간의 삶이 시대와 체제를 넘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청중들 역시 자신이 좋아하는 작중인물을 연호하여 이 상상의 파티에 동참한다. 현실에서는 통일이 그들에게 이등국민의 지위를 강요할 지언정, 적어도 이 파티에서만은 그들 역시 독일 시민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며, 초대받은 손님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독일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들이다. 통일을 체제의 문제로 바라보는 대신,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갈 독일 시민으로서의 연대의 문제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형식으로서의 통일이 아니라, 진정한 통합으로서의 통일을 지향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된다. 물론, 통일의 과정에서 더 익숙한 쪽이 다른 쪽을 이끌 수는 있을 것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거스를 수 없는 추세라면, 그래서 동독의 사람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정복자가 되어 그들을 윽박지르고 갈취하는 대신, 손을 내밀어 그들의 변화를 도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흔들리는 조각배 위에서 자리를 바꾸는 이들처럼, 조심스럽게, 그러나 모두가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At any rate, the two of them stood facing each other without a word. No order was given, unless of course my whispered "Go!" was a help: now they began changing positions simultaneously. With small groping steps, which, however, could merely be guessed at from the shore, they moved a shoe's width at a time, at first freehand, their arms still dangling, then joined together, each seizing hold of the other, for the boat had begun to rock, and they were now reeling along with it. Fonty's hands gripped Hoftaller's shoulders firmly, and Hoftaller hung on to Fonty's hips.
What could now be heard from the shore were instructions issued to Hoftaller, which he followed scrupulously because his subject was experienced at changing places in a rowboat. The linked pair pushed and turned clockwise. A solemn, groping dance. Or a ceremony of ritual seriousness. Or an embrace of the sort that is based on the well-known assurance: We're in the same boat.
(어쨌건, 그들 둘은 말 없이 서로를 마주하고 섰다. 그리고, 내가 "가요!"라고 속삭인게 들렸던게 아니었다면, 아무런 신호도 없이 동시에 자리 바꾸기를 시작했다. 비록 호수 기슭에서는 그저 추측할 따름이지만, 작은 종종걸음으로 한 번에 신발 하나의 폭만큼씩 움직이면서. 처음에는 빈 손으로 팔을 허공에 내밀었는데 배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이내 하나로 합쳐져 서로를 웅켜잡았다. 그들은 배와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Fonty의 손은 Hoftaller의 어깨를 꽉 잡았고, Hoftaller는 Fonty의 엉덩이에 매달렸다.
이제 호수 기슭으로 Hoftaller에게 내려지는 지시들이 들려왔다. Fonty가 배 안에서 자리를 바꾸는데는 익숙했기 때문에, Hoftaller는 그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연결된 둘은 서로를 밀며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장엄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춤. 또는 제의적 진지함을 지닌 의식. 또는 “우리는 같은 배를 탔다네”라는 잘 알려진 확신에 근거한 포옹 같은 것.) P. 340
그러나 불행히도, 작가의 염원은 실현되지 못한 듯 하다. 오늘날 오씨(Ossi, 구 동독 지역 출신)와 베씨(Wessi, 구 서독 지역 출신) 간의 빈부격차와 갈등은 독일 사회의 가장 큰 불안 요소로 남아 있으니까 말이다. 겉으로만 본다면 독일은 더 강한 국가가 되었다. 한 때 전범국가로 인류의 죄인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오늘의 독일은 유럽연합을 이끄는 중심국가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진정 독일이 추구해야 할 가치일까? 강한 독일, 영광된 프로이센의 재림이라는 환상에 취하기보단, 고통받는 형제와 친구의 아픔을 함께 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그것이, 모두가 프로이센의 절대군주 프리드리히 대제를 기리는 동안, Fonty가 친구 프리드리히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Katte 를 추모하는 까닭일 것이다. “I still say, my hero is Katte : 여전히 말하지만, 내 영웅은 Katte 라네”(P.623)
당연한 얘기겠지만, 독일의 통일은 그저 남의 일이 아니다. 남과 북으로 갈린 우리에게도 통일은 (아직은 요원해 보이지만) 언젠가 다가올 미래일 것이다. 그러나, 그 통일에서 당신은 무엇을 기대하는가. 북한을 붕괴시켜야 한다는 주장, “공산 독재 타도”, “고통받는 북한 민중의 구제”와 같은 익숙한 레토릭이 가져올 미래는 뻔하다. 그 레토릭이 전제하는 흑백논리(자본주의가 옳고 공산주의가 그르다)야말로 통일 후 우리 사회를 야만으로 이끌 광기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It looks as though the victory over communism has made capitalism rabid : 마치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가 자본주의를 미쳐 날뛰게 만든 것처럼 보였다. P. 569) 삼등국민으로 편입되어 사회의 밑바닥을 형성할 북한 지역 출신들, 북한 지역 전체를 투기의 장으로 뒤바꾸어 놓을 남한의 자본들, 그 와중에서 통일의 공로를 가로채려 이전투구하는 정치인들. 지금과 같은 대결논리가 횡행하는 이상, 이러한 상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개연성이 높은 우리의 미래이다.
따라서, 통일을 준비하는 것은 바로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노력과 다르지 않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두 평등한 인간이라는 연대의 정신을 공고히 하는 것이야말로 통일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 될 것이다. 한 사회의 수준은 결코 그 나라의 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가늠되지 않는다. 오히려, "강함"을 선호하는 사회일수록 "약한" 사람들에게는 지옥과 같은 사회가 되기 마련이다. 이 사회의 약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이주 노동자들, 조선족 동포들을 대하는 모습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진정한 가치를 말해주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그것이 독일 통일을 통해,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 아닐까.
이 외에도 너무도 풍부한 작품이라 미처 적지 못한 이야기들이 여전히 많다. 책 자체도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인데 그 안에 그보다 훨씬 더 큰 사유를 압축적으로 담아 놓았으니, 진지한 독자들에게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책이 되리라 믿는다. 국역본이 없어 영역본으로 읽긴 했는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다. 문장이 어려운데다, 독일 역사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필요로 하고, 또 Fontane의 작품들이 끊임없이 인용되기 때문이다. 결코 녹록치 않은 작업이겠지만, 이 책은 꼭 번역되어 나와야 할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단언컨대,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남을 것이다.
]]>15년 전의 날씨
- 볼프 하스 지음/안성철 옮김/웅진지식하우스/10,800원
새 책이 나오면 언론을 통해 작가의 인터뷰를 종종 볼 수가 있다. 대개는 일종의 판촉행위로 작품에 대한 낯뜨거운 자화자찬이기 쉽지만(글쟁이들이란게 어찌나 자의식이 강한 종족들인지), 종종 잘 짜여진 인터뷰 혹은 대담은 작품 자체를 훨씬 더 풍족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기실 그것은 발표된 작품이 다양한 가능태 중에서 작가에 의해 선택된 하나의 현실태일 수밖에 없다는 숙명으로부터 기인한다. 실현된 작품은 그 자체로 스스로를 설명할 뿐이다. 그리고, 작품에 대한 인터뷰와 같은,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 즉 메타 텍스트의 형식을 통해서 비로서 작가는 실현되지 않은 가능태로서의 작품, 그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들을 독자들에게 펼쳐 놓을 수 있는 것이다.
도식화를 약간 하자면 집필은 이야기를 계속 축적해 나가는 합산의 과정과 그 중 옥석을 가려 덜어내는 감산의 과정을 거친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쓰여졌으나 결국 빛을 보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렇다고 이 걸러진 이야기가 함량 미달이라는 뜻은 아니다. 단지 작품의 맥락에서 어긋나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작가의 오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다른 가능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뛰어들어 작가의 고민을 함께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텍스트 안에서 작가는 신이지만, 메타 텍스트는 작가의 신성을 해체하고 세속화 해 지상의 독자와 눈높이를 같이 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하여, 가상의 소설을 놓고 작가와 기자가 나누는 대담을 통해 소설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이 책의 형식은 참신할 뿐 아니라 더 큰 함의를 가질 수 있었다. 작가가 자신의 이 형식적 실험을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어쩌면 우리는 작품을 읽으면서 동시에 스스로 작품을 재구성해가는 전대미문의 경험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정작 작가 스스로는 그러한 메타 텍스트성을 염두에 두고 책을 쓴 것 같지는 않다는데 있다. 이 책의 독특한 형식을 통해 작가가 얻어낸 것이 무엇인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아주 짧은 단편 정도 분량의 이야기를 중편 길이로 늘려냈다는 것, 그리고 독자에게서 책을 감춤으로써 궁금증을 유발해 내는 정도가 전부이다. 중간 중간 작은 표현상의 차이나 삭제된 에피소드에 대한 언급도 없지는 않지만, 가능성을 열어 놓기 위함이 아니라 작중 저자의 찌질함을 슬쩍 드러내는 용도로만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 역시 작가의 선택이다. 이 책은 확실히 재미있는 책이고, 그것으로 작가는 소기의 목적을 충실히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이렇게 서로 갈구면서 대화를 나누는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도 싶지만, 재미를 목적으로 한 소설이라면 굳이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뭐랄까, 소 잡는 칼을 닭 잡는데 쓴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 형식적 실험을 깊이 있게 밀고 나갔다면 우리는 새로운 명작을 만날 수도 있었을텐데, 그저 허허거리며 웃다가 끝나버리니 허탈할 마음만 남을 뿐이다.
갈증이 난다.
ps. 조금 더 삐딱선을 타자면, 책 날개에 쓰여진 문구는 가관이다. "대단하다! 두 권의 책을 동시에 읽은 느낌이다. 볼프 하스 만세!" 도대체 두 권의 책을 동시에 읽은게 왜 만세를 외칠 일일까. 한 권 읽고도 두 권 읽었다고 계산할 수 있어서? 빠듯한 시간에 효율적 독서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줘서? 애초에 그렇게 시간-효율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이었다면 보다 유익한 책을 찾아 있는게 훨씬 더 효율적일 텐데 말이다.
쓸쓸함의 주파수
- 오츠 이치 지음/채숙향 옮김/지식여행/8,500원
그러니까.. "굳이" 분류를 하자면 쓸쓸함보다는 애뜻함에 가까울 것 같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의 공통점을 정말로 "굳이" 짚어 보라면 말이다. 솔직히 말해, 성격도, 글 쓴 동기도 다른 네 편의 단편을 모아놓고 굳이 책 제목을 붙이려니 이렇게 애매한 제목 밖에는 안 나오는거다. 차라리 표제작 하나로 책 제목을 달고, "오츠 이치 단편집" 이렇게 부제를 붙여주면 깔끔하지 않았겠나. 출판 마케팅 입장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 같은 독자한테는 이런 제목, "후까시"로 밖에 설명이 안 된다.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느낌을 갖는 것 같은데, <미래예보>나 <필름 속 소녀>는 완성도가 떨어진다. 아니나 다를까, 저자는 후기에서 두 편의 글은 청탁을 받아 억지로(?) 쓴 글임을 솔직하게 고백을 하는데, 미안하지만 솔직하다고 용서가 되는건 아니다. 뭐, 글쟁이도 먹고 살아야 하니 청탁을 받아 글을 쓸 수도 있다. 거장이 되려면 그런 글에서조차 준비된 작가의 모습을 보여야겠지만, 아직 그만한 그릇이 안 되면 다소 미진한 글이 나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글들을 다시 자기 이름을 단 단편집으로 묶어 내놓는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당신, 고작 이 정도 글에 자기 이름을 붙이고 만족한단 말인가? (사실, 이 분노는 <아주 오래된 농담>을 읽고 박완서 씨에게 느꼈던 분노와도 같다)
그나마 다른 두 편의 단편 덕에 작가에 대한 일말의 기대는 남겨 놓는다. <손을 잡은 도둑>은 아주 유쾌하게 읽을 수 있었다.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손을 맞잡은 도둑과 그녀. 상황 자체가 주는 기발함과 깔끔한 마무리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마지막 단편인 <잃어버린 이야기>가 그나마 책이 제목 <쓸쓸함의 주파수>와 가장 근접해 있으면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사고로 오른팔 팔꿈치 아래의 근육을 제외하곤 전신이 마비된 남편과, 그 남편의 팔을 건반 삼아 피아노를 쳐서 음악을 들려주는 아내. 아내의 연주를 이해 못했던 남편은 청각이 아닌 촉각으로 비로서 그 연주를 진심으로 듣기 시작한다. 하지만, 후회해도 이제는 다시 닿을 수 없는 소통의 끈.
이 단편을 읽으면서 문득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떠올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음악의 간절함이, <잃어버린 이야기>의 남편이 오로지 팔의 촉감만으로 느끼는 그 간절함과 맞닿아 있다.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셀마와, 아내를 위해 스스로를 유폐시키기로 결심한 남편의 선택이 서로 맞닿아 있는 것처럼. 이들이 처한 상황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 속에서 가슴을 울리는 선택을 하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것이 우리가 비극을 읽는 까닭일 것이다.
]]>Maus I & II : A Survivor's Tale
-Art Spiegelman 지음/Random House/$35.00
아트 슈피겔만의 <쥐>를 이제야 읽었다. 이 작품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성완경씨의 <세계만화>를 읽으면서 였는데(기록을 찾아보니 2005년에 읽었구나), 당시에는 국내에는 절판인 상태라 찾아 읽을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국내에서도 재출간이 되었으나, 일단 손에 잡히는대로 이 곳에서 영어본으로 찾아 읽었다. 예상 외로 책은 얇았다. 하지만, 이 얇은 책 두 권 분량을 완성하는데 걸린 시간만 13년. 시간이 모든걸 말해주지는 않겠지만, 책을 읽고 나니 역시 그 긴 시간만큼 깊이 고민하고 만든 작품이다 싶다. 명작은 그냥 명작이 되는게 아니다.
물론, 이 작품이 명작의 반열에 오른 것은 단지 홀로코스트를 다뤘기 때문은 아니다. 홀로코스트가 얼마나 처참했는지, 독일인들이 얼마나 잔혹했는지에 대한 텍스트는 이미 차고 넘친다. 인간에 대한 분노, 이성에 대한 절망의 외침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동어반복을 위해서라면 굳이 홀로코스트까지 돌아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에서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는 폭력의 현장들이 더 생생한 분노를 자아낼 테니까. 이 작품 역시 홀로코스트를 증언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면 그 증언의 중심에 '죽음'이 아닌 '생존'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부제 <A Survivor's Tale(한 생존자의 이야기)> 가 말하고 있듯, 이것은 살아 남은 이의 이야기이다. 저자 아티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자신의 아버지 블라덱을 인터뷰하면서 블라덱이 경험한 홀로코스트의 경험을 기록한다. 당연하 이 기록은 홀로코스트라는 사건 자체에 대한 입체적인 조망이 아닌, 홀로코스트라는 사건 '속'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행동했는가만을 다루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고, 얼마나 치밀하게 학살이 진행되었는가는 그 속의 개인에겐 전혀 중요치 않다. 블라덱에게도 중요한 것은 그가 죽음 바로 근처에 있으며 어떻게 해서든 살아 남아야 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살아 남았다. 절반은 그의 능력으로, 절반은 운으로. 하지만 그의 능력이라는게 무엇이었나. 빵에 곰팡이가 필 지언정 남에게 주기보다는 나중을 위해 간직하고, 깨끗한 셔츠가 필요해질 것을 예상하고 다른 이의 셔츠를 미리 사 두는 것? 아무도 믿지 않는 것? (써놓고 보니 "자본주의 생존법"과 비슷하게 느껴지는건 나만 그런가?) 그의 생존은 생존을 위협한 상대와의 투쟁의 결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생존은 그와 같은 처지에 처한 다른 사람들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결과였다. 다시 말해 그를 살린 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밟고 올라서는 그의 능력이었다. 그를 비난하는게 아니다. 그건 그가 거대한 폭력 앞에 생존을 위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고, 비난은 응당 그런 상황을 초래한 폭력 자체를 향해야 할 것이다.(다시 한번, 이 문장을 쓰면서 데자뷰를 느낀다)
그러나, 살아남았다 한들 그 폭력의 흔적마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그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극단적 폭력에 직면한 인간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의식 자체를 뒤튼다. 살아 남기 위해 폭력에 맞서기보다는 가능한 순응하며 최악의 순간을 피하려하고, 그런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폭력의 질서 자체를 삶의 본질로 여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가정 폭력을 경험한 아이가 성장한 후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군대에서 가혹한 폭력을 당한 신병들이 고참이 된 후에는 똑같은 폭력을 후임병들에게 반복하는 것도, 폭력이 인간의 의식을 어떻게 뒤흔들어 버리는지를 보이는 또 다른 사례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의식의 뒤틀림을 대개의 생존자들은 자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작품 곳곳에서 아버지 블라덱의 증언 외에 그 증언을 청취하는 과정을 함께 기록하면서 오늘의 블라덱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은 물건 하나 버리지 않고 다 모아두고, 재혼한 아내를 돈만 아는 여자라고 매도하고, 심지어 반쯤 먹은 시리얼을 반품하는 등, 블라덱의 오늘은 홀로코스트 당시와 큰 차이가 없다. 그에겐 그 생존의 방식이 다른 모든 도덕적 가치들을 압도하는 진리며 선(善)이기 때문이다. 살아 남았다는 것이 그가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완고한 세계관 앞에 성찰과 반성의 자리는 없다. 흑인들을 차별하는 것이 유태인들을 차별하는 것과 똑같다는 지적에 "어떻게 흑인과 유태인이 같을 수가 있니?"라고 되묻는 블라덱의 모습에 오늘날 이스라엘의 모습이 그대로 겹친다.
"Here my troubles began(여기서 나의 고난들이 시작되었다)"
2권의 부제로 달린 위의 문장은 바로 저자 아티의 독백이다. 아들에게 "친구? 먹을 것 없이 일주일만 갇혀보면 친구가 뭔지 알게 될거다"라고 가르치는 아버지, 홀로코스트는 살아 남았으나 결국 우울증으로 자살한 어머니. 어린 소년에게 이러한 가정 환경이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상흔은 비단 직접적인 생존자들만의 몫이 아닌 셈이다. 이렇게 보면, 약물 중독과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저자가 다행히 간신히 자신을 추스리는데 성공한 것은 또 하나의 홀로코스트 생존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바로 작가가 스스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치유해 나가는 과정의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육신의 상처에 치료가 필요하듯, 정신의 상처에도 적절한 치유의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이는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오늘의 이스라엘은 치유되지 않은 집단적 트라우마가 보이는 광기의 상징이 아닌가. 홀로코스트의 기억은 유대인들에게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대신, 자신들이 저지르는 그 모든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을 향한 이스라엘의 야만적 폭력은 또 다른 생존자들을 만들어내고, 결국 자신들에게 돌아올 폭력의 사슬을 연장할 뿐이다. 자신들을 향한 반유대주의 때문이라는 변명은 무의미하다. 결국 상처를 치유하고 폭력의 사슬을 끊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니까. 이 책 <쥐>의 저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마가렛타운
- 가브리엘 제빈 지음/서현정 옮김/북폴리오/9,000원
연애편지라는걸 써 적이 없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연애편지에서 으례 떠올리게 되는 사랑의 찬가들이 민망했다고나 할까요. 어렸을 때는 철없는 자존심 때문이었다면,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는 사랑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깨지고 좀 더 현실적인 사랑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찬가는 아니겠지만, 여전히 연애편지는 유효한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대화로는 전달하기 힘든,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을테니까요. 그래서, 여기 한 권의 책 이야기를 빌려 당신에게 편지를 한 통 보내려 합니다.
당신은 종종 당신의 어디가 좋냐고 내게 묻습니다. 그 때마다 씨익 웃으며 농담으로 대꾸를 하지만, 글쎄요, 정색을 하고 답한다고 한들 그냥 당신이라는 사람 자체가 좋다 라는, 다소 성의 없어 보이는 말밖에는 생각나지 않는군요. 사실, 당신이 지닌 어떤 장점 때문에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힘들어요. 차라리, 당신이 지닌 어떤 단점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좀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지닌 장점과 단점 모두 당신의 한 부분에 불과하니까요. 내게 당신은 장단점들의 목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훨씬 더 큰 우주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를 묻는 당신의 질문 앞에 나는 더더욱 말문이 막히곤 합니다. 굳이 우리 뿐 아니라 인류 역사상 수많은 연인들이 불멸의 사랑을 노래했다가 스스로 그 약속을 저버리곤 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어떤 이들은 그래서 사랑의 덧없음을 외치곤 합니다. 사랑이 주는 희열과 사랑의 배신이 주는 절망을 생각하면 이 양 극단의 반응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주변을 좀 더 살펴보면 보다 현명한 이들이 사랑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통찰을 우리에게 던져주곤 한답니다. 그런 통찰을 통해 나는 우리의 사랑 역시 더 굳건해질 수 있다고 믿구요. 이 책 <마가렛타운> 역시 그 중 하나입니다.
먼저 책은 N 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N 은 자신이 조교로 들어가던 수업의 메기라는 학생과 사랑에 빠집니다. 메기의 본명은 마가렛 타운(Margaret Towne)입니다. 메기는 마가렛의 애칭 중 하나죠. 어느날 N 은 메기와 함께 그녀의 고향 마을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 마을의 이름도 마가렛타운(Margarettown) 입니다. 마가렛타운에 사는 마가렛 타운. 이 이름이 가진 중의성은 아마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을 겁니다. 어쨌든, 마을 입구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덕에 N 은 메기의 고향집에서야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 이 집에 살고 있는 여러 인물들을 만나게 되죠. 나이가 아주 많은 마가렛 할머니와 퉁명스러운 중년의 마지, 어딘가 음울하고 반항적인 느낌의 10대 미아, 그리고 어린 꼬마인 메이가 그들입니다.
눈치를 챘겠지만, 메기나 마지, 미아, 메이 모두 마가렛의 애칭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특정 나이대의 마가렛이랍니다. 마가렛 할머니는 자신이 본체에 해당하고 삶의 어느 순간마다 자신과 똑같은 다른 마가렛이 나타나 계속 자신과 살고 있다고 말해줍니다. 자살해버린 30대의 그레타를 제외하곤 말이죠. 그리고, 하나의 마가렛이 진정한 사랑을 찾으면 다른 마가렛들은 사라질거라는 전설도 들려줍니다. 나이가 많이 들면 모르는게 없어지거든요. 몇 주를 마가렛 타운에서 보내면서 N 은 메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지켜봅니다. 그리고 메기에게 청혼을 하기로 결심하죠. 메기가 승락을 하자, 정말로 다른 마가렛들은 사라져 버립니다.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죠? 사실 이 이야기는 N 이 자신의 딸에게 남기는 편지 속에 적은 이야기니까, 있는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어요. 아이에게 엄마와 아빠가 만나 사랑하게된 과정을 로맨틱하게 과장해서 들려주는거야 흔한 일이죠. 요즘 같은 시절에 허위사실 유포죄로 잡혀갈까봐 약간 걱정은 되는군요. 하지만, 이 이야기가 어떤 은유임은 분명합니다. 메기와 결혼을 하던 날, N 은 메기의 눈 속에서 그 모든 마가렛들을 발견합니다. 귀여운 메이와 까칠해서 접근하기 어려웠던 미아, 퉁명스러운 마지와 깊은 마가렛 할머니, 심지어 자살한 그레타 까지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오늘의 아름다운 신부 메기는 다른 모습의 마가렛들로 변해갈 겁니다. 그걸 알고 있는 N의 청혼은 아마도 그 모든 마가렛을 사랑하겠다는 뜻이었겠지요.
영원히 행복할 것 같은 이 연애담은 이제 마가렛의 입장에서 서술되기 시작합니다. 결혼 후 골동품점을 차린 마가렛은 무료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갑니다. 그러던 문득 자신에게 작은 친절을 베푼 옆 가게 남자에게 호감을 갖게 되지요. 사실 이 남자는 별로 대단치도 않은 사람이에요. 마가렛에게 푹 빠진 것 같지도 않고(그도 아내가 있거든요), 평범한 외모에 배도 살짝 나온데다가 머리까지 벗겨졌지요. 하지만 마가렛은 이 남자에게 향하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이 남자와 함께 잠자리를 가진 마가렛은 그제서야 왜 자신이 이 남자에게 끌렸는지를 깨닫게 되지요. 그건 그 남자가 N 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지 그 때문이었습니다. 권태. 그녀에게 N 은 계속 똑같은, 변하지 않는, 그래서 지루해진 N 으로만 남아 있었던 겁니다.
마가렛, 아니 그레타는 이 권태로부터 탈출하지 못합니다. 어느날 문득 집을 나가고, 몇 년 후 딸을 데리고 N 에게 돌아오지요. 그리고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사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도 그레타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녀는 왜 그렇게 권태로워야 했는지, 언제부터 우울증에 시달렸는지,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있었다면 왜 실패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레타를 비난할 수는 없어요.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N 과의 관계가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건 그녀가 N 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그렇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흔히 지금의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영원히 계속되기를 기도합니다. 나 역시도 그래요.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변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변하는데, 그 사람의 사랑은 그대로 있기를 바라는건 헛된 희망이 아닐까요.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물었던건 그래서 우문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도, 은수도 변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거죠.(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토록 분명히 알 수 있었음에도 말이에요) 후에 은수를 돌려보낸 후 상우가 지은 웃음은 비로서 변해버린 서로의 모습을 깨달았기 때문일 겁니다. 사랑은 그렇게 변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건 다만, 그 변화의 방향을 현명하게 이끌도록 노력하는게 아닐까요. 서로의 변해가는 모습을 애정을 갖고 지켜보면서 말이죠.
마가렛의 안에서 여러 명의 마가렛을 발견한 N 의 이야기는 그래서 내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쩌면 마을 수준이 아니라 도시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가렛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일 겁니다. 당신 역시 그럴겁니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많은 모습들과, 시간이 우리에게 안겨줄 새로운 모습들까지, 우리는 모두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니까요. 내게 주어진 축복은 내게 당신의 그 변화를 함께 할, 서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 동안 당신과 함께 나도, 나의 사랑도 그렇게 함께 변해갈 것입니다.
하지만, N 의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가렛의 버팀목이 되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건 어쩌면, 그 자신이 함께 변화하지 못한 N 의 잘못일 수도 있고, 짜릿했던 흥분으로만 사랑을 기억한, 그리고 기대한 마가렛의 잘못일수도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에 잘잘못을 따지는건 불필요할 일일 겁니다. 그보다 중요한건, 사랑이란 결코 어느 한 쪽의 노력만으로는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지요. 아마도 사랑의 서약이란건 그런게 아닐까요. 영원불멸의 사랑을 노래하기보다는, 서로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 말이죠. 그러니, N 이 딸에게 남긴 편지의 한 대목은 기억해 둘 가치가 있을 겁니다. "진짜 사랑은 본능이 아니라 의지(p. 246)"라는 말 말입니다.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인간을 묻는다
- 제이콥 브로노프스키 지음/김용준 옮김/개마고원/13,000원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어렸을 때 영화 <트루먼 쇼>와 같은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쩌면 나를 위해 연기를 하고 있는게 아닐까, 내가 안 보이는 곳에는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적당한 순간에 나타나 모르는 척 인사를 건네는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말이다. (물론 그게 방송된다고 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지만) 그 때는 그저 혼자 생각하고 큭큭댔던 상상이었는데, 어른이 된 후에 <트루먼 쇼>를 보고 나니 나만 그런 생각을 했던게 아니라는걸 알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내가 특별히 왕자병은 아니었던게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상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누구나 유년을 거치면서 비슷한 의식의 변이를 거치기 때문이다.
'생리적 조산설' 이라는게 있다. 인간의 신체 크기 대비 두뇌 용적이 다른 동물에 비해 월등히 커지면서, 뇌가 완전히 성장하기 전에 자궁 입구를 빠져나오도록 진화했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의 타당성 여부야 어쨌든, 태어날 때 아직 뇌가 충분히 성장해 있지 않은 인간은 일정 기간 동안은 (대개 부모인) 누군가의 절대적인 도움 하에만 살아남을 수 있다. 이 때의 자아는 지극히 제한적인 세계만을 접촉하기 때문에, 자기 외부의 어떤 존재, 즉 '타자'가 오직 자신이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유년기의 자기 중심성은 필연적인 셈이다.(아멜리 노통브의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서두에서 주인공은 "나는 신이었다"라고 선언한다. 아, 유년의 자기 중심성을 이렇게 앙증맞게 표현하다니!)
기본적으로 유년의 자아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쌓아나가는 방식은 귀납적이다. 내가 A 라는 행동을 하면 B 라는 반응이 온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확인될 때 유아는 그것을 하나의 당연한 과정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최초의 경험은 부모로부터 온다. 아기가 울음을 터트리면, 부모는 아기가 배가 고픈지 혹은 기저귀가 젖었는지 확인하고 그에 맞는 조처들을 즉각 취해준다. 울음이라는 행동이 욕구의 충족이라는 반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조금 더 큰 후에 만나게 되는 외부 사물들도 마찬가지다. 장난감 버튼을 누르면 소리가 나고, 수도꼭지를 돌리면 물이 나오게 되어 있다. 기대한대로 반응하지 않는건 뭔가가 고장난거다. 간단히 말해 유년의 자아에게 세계란 자신의 행동에 정해진 반응을 보이는 거대한 장난감과 같다.
이러한 유년의 세계가 무너지는건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다. 부모라는 예외를 제외하면 아이는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기대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심지어는, 똑같은 사람에게 똑같은 행동을 해도 다른 반응이 올 때도 많다. 오랜 시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야 아이는 고통스럽지만 피할 수 없는 결론과 마주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또 하나의 '자아'들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는 단지 '타자'의 발견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자아가 지녔던 신성(神性)의 해체이자, 앞으로 겪게 될 수많은 갈등들의 전조에 해당한다. 앞서 언급한 <트루먼 쇼> 류의 상상은 바로 그 경계점에서 나온게 아닐까 싶다. 그래도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게 아닐까 하는, 유년의 자기 중심성이 남긴 잔상 같은 상상력으로 말이다.
이 유년의 경험은 우리가 가진 지식이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 <인간을 묻는다>에서 사용된 용어들을 그대로 따르자면, 하나는 "자연에 관한 지식"이며 다른 하나는 "자아에 관한 지식"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식'은 인간 고유의 특성은 아니다. 모든 생명은 (그리고 잘 설계된 기계들은) 경험을 통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지식을 축적하면서 스스로를 확장해 나간다. 대부분 생존과 직결된 이들 지식들은 외부 세계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식, 즉 "자연에 관한 지식"이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자아"를 가지며(여기서 자아는 보다 능동적인 의미다), 더 나아가 "자아에 관한 지식"을 축적한다. 저자는 이 "자아에 관한 지식"을 깊이 살펴봄으로써 인간됨의 의미를 탐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자연에 관한 지식"과 "자아에 관한 지식"을 동일한 차원에 배치한다는 것이다. "자연에 관한 지식"을 대표하는 과학은 대개 논리와 이성의 영역, 인간적 감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사실"의 학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저자는 과학 역시 인간이 지닌 지식의 한 종류로서, 지식을 구성하는 언어의 한계 속에 함께 묶여 있음을 지적한다. 그 어떤 언어도 모든 자연의 논리를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없다(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이를 증명한다). 과학의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모호함과 모순이야말로 인간의 상상력이 개입할 수 있는 틈이며, 과학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온 힘은 바로 이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아에 관한 지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는 이성의 논리, 과학의 이론이 다른 지식에 비해 정확하며, 그러므로 우월하다는 근대적 믿음을 뒤흔든다.
그렇다면, "자연에 관한 지식"과 "자아에 관한 지식"이 갖는 차이점은 무엇일까. 저자가 지적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인간이 이 지식 체계에 가하는 노력의 방향이다. 과학은 하나의 이론체계가 가진 모순과 모호함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탐구가 이루어진다. 이 때 새로운 이론체계는 기존 이론체계의 논리적 결과로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장기에서 묘수가 번쩍 떠오르듯 새로운 상상력의 결과로서 나타나게 된다. 반면, "자아에 관한 지식"의 목적은 모순의 해결이 아니다. 인간에게 A 라는 상황에서 반드시 B 라는 행동을 보이도록 요구하는 것이 이 지식의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자아에 관한 지식"은 인간이 A 라는 상황에서 B 라는 반응을 보일수도, C 라는 반응을 보일수도, 심지어 D 라는 반응을 보일수도 있음을 이해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모순 자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인간 자아에 관한 지식의 목적이다.
저자는 "자아에 관한 지식"의 대표적인 사례로 문학을 꼽는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문학은 삶에서 만나게 되는 딜레마들을 가감 없이 드러내주는 작품들이다. 그 딜레마의 유일무이한 해법을 제시하려 한다던가, 혹은 독자들을 하나의 교훈으로 이끄려 하는 작품은 그저 통속 소설에 불과할 것이다. 좋은 문학 작품은 딜레마에 처한 인간이 택할 수 있는 모든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문학 작품을 읽는 사람의 자세이다. 만약 우리가 문학 작품을 "자연에 관한 지식"과 같은 방식으로 대한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도스또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이라고는 "살인을 하면 결국 처벌을 받는다" 정도가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죄와 벌>에서 다른 것을 얻는다. 우리는 로쟈가 처한 상황에서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내가 소냐였다면 과연 로쟈를 받아들였을까를 고민한다. 이러한 고민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처한 상황과 고민들을 보다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자아에 대한 지식"을 축적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오직 이러한 감정이입을 통해서 인간은 다른 자아들이 처한 상황과 그로 인한 반응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어떤 도덕적 요청이기 이전에, 인간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한 셈이다. 그리고 이 길은 또한 인간이 "인간다움"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곳이기도 하다.
20세기는 과학의 세기였지만, 동시에 폭력의 세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과학은 그 어마어마한 폭력을 가능하게한 도구였다. 우리는 히틀러를 비난하고, 스탈린을 비난하고, 부시를 비난한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 그 독가스를 만들었고, 원자폭탄을 만들었으며, 폭격기와 탱크를 만들었음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은 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단지 그들이 직접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해서 과학자들은 그들의 작품(?)들이 초래한 그 모든 폭력으로부터 면책받을 수 있을까? 아니다. 이는 과학이 스스로를 인간 위에 위치지움으로써 초래한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 이 자기 기만이야말로 저자 브로노프스키가 이 책 전체에 걸쳐 인간에 기반한 새로운 과학 철학의 제시를 통해 극복하려 한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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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미치게 하는 바다
- 조병준 글, 최민식, 김중만 외 사진/예담/15,000원
知者樂水 仁者樂山(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 라고 한다. 논어에 나오는 말로, 앎을 추구하는 사람은 물이 가진 활달한 움직임을 즐기고, 인품을 중시하는 사람은 산과 같은 우직한 고요와 명상을 찾는다는 뜻이다. 물론 공자님 말씀이 대개 그러하듯, 한 편으로는 그런가보다 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딱히 맞아 떨어지는 말이라고도 하기 힘들다. 특히, 물의 한 종류인 바다를 보면 그렇다. 나는 어쩌면 공자님은 바다에 가 본 적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바다는 고요하고 장엄한 동시에 활달하며 때론 위압적인, 물과 산이라는 이분법 속에는 담기지 않는 광대함이기 때문이다.
나는 바다가 좋다.(바다를 싫어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있겠냐마는) 그 앞에 섰을 때의 무한함, 그리고 그 앞에 초라해지는 내가 좋다. 바다는 속삭이고 때로는 호통을 친다. 기껏해야 너는 그저 이리 작은 존재일 뿐이라고, 그러니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을 다 짊어지려는 듯 버둥거리며 애쓰지 말라고 말이다. 이 거대한 존재 앞에서 나는 위안을 얻는다. 나는 그저 나로만 존재해도 충분할 것이다. 아마 종교을 가진 이들은 신 앞에서 마찬가지의 위안을 얻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바다는 내게 하나의 종교와도 같다.
그래서, 바다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곤 했다. 사진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바다를 사진으로 담는 것은 위험한 도전이다. 무한의 세계를 유한의 프레임 안에 제한하기 때문이다. 사각의 틀 안에 담겨진 바다는 그저 가두어진 물에 불과하기 쉽다. 바다는 어려운 주제다. 그래서, 개인적은 경험으로는, 바다를 담는 사진에는 크게 두 가지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거친 바다를 통해 그 역동적인 에너지를 보여주거나, 아니면 대형 인화를 통해 감상자를 압도함으로써 바다가 주는 느낌을 시뮬레이션 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책에 담긴 사진작가들의 사진들은 주로 후자에 속한다.
하지만, 그러기엔 책의 도판이 너무 작다. 실물 프린트의 크기는 보통 50cm x 60cm 정도고 크게는 1m x 2.5m 까지 이르는데, 22.5cm x 17.5cm 크기의 책에 담자니 원래의 느낌이 살지 않는다. 출판 시장의 규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사진 자체만 보자면 적어도 A3 정도의 대형 도판에 양쪽 페이지를 모두 사용하는 방식으로 나왔어야 하지 않았을까. 사진의 크기는 대부분의 사진집에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적어도 바다를 담는 사진집은 더더욱 사진의 크기, 즉 도판의 크기에 신경을 써야 그 느낌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조병준의 글도 사진과 그리 궁합이 잘 맞지는 않는 느낌이다. 바다 자체에 대한 에세이로는 나쁘지 않을지 몰라도, 그의 시선은 책에 실린 사진이 아니라 그 자신의 과거를 향하고 있을 뿐이다. 글과 사진 각각이 독자에게 어떤 감흥을 줄 수는 있겠지만, 그의 글이 사진을 돋보이게 한다거나 아니면 사진이 그의 글을 생생하게 만들어준다거나 하는 상승 효과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럴거면 글과 사진을 하나의 책으로 묶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조병준 씨의 글 자체도 아쉬운 부분이 많다. 일부 글은 인상적이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톤이 없이 들쑥날쑥한 것은 마치 블로그 글을 모아놓은 듯한 느낌마저 준다. 게다가, 인도 다녀온 사람들은 왜 다 명상이니 마음의 평화니 하는 틀에 박힌 이야기만 하는건지.
기획 자체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이래저래 아쉬운 점이 많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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