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락 | Main | 르몽드 세계사 »

2001 Space Fantasia

2001 Space Fantasia
- 호시노 유키노부 지음/김완 옮김/애니북스/28,500원

이름을 처음 들어본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예전에 그의 다른 작품 <스타더스트 메모리즈>를 봤다는걸 뒤늦게 깨달았다. 당시 무척 재밌게 읽었던 기억은 있지만 작가를 따로 기억해 두지는 않았었는데, 그림체나 내용 등이 일본 작가라기보다는 미국 작가의 것처럼 보였기에 호시노 유키노부라는 이름이 <스타더스트 메모리즈>의 그 작가일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했다. 알고보니 (이 작품집의 출간 소식을 접한 신문 기사에 따르면) SF 팬들 사이에서는 레전드 급으로 칭송받는 작가였나보다. 물론 작가의 명성이 작품의 질을 보장하는건 아니겠지만, 25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정식 완역본"의 형태로 "굳이" 재소개될 정도의 작품이라면 어느 정도의 기대는 가질만하지 않을까. 그게 이 3권의 (만화)책이 태평양을 "굳이" 건너 내 손까지 들어오게된 까닭이다.

<2001 Space Fantasia> 라는 제목은 <2001 Space Odyssey>와 <천일야화>를 합쳐놓은 것이다. 아서 클락의 소설이자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제목이기도 한 <2001 Space Odyssey>를 차용한 것은 이 작품 전체가 SF 고전들에 대한 오마주의 성격을 띄고 있음을 뜻한다. 형식면에서는 긴 서사를 매일밤의 이야기 단위로 들려주는 <천일야화>를 빌려왔다. 그렇게, 전체 3권, 20개의 밤으로 구성된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대략 4세기에 걸친 인류의 우주 진출 과정을 보여준다. 물론 처음 두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현재의 과학기술을 넘어선 상상의 미래를 다루고 있지만, 어느 하나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없다. 작품의 밑바탕을 이루는 "과학적" 상상력 위에 내러티브의 개연성을 얹은 덕이다.

태양계의 형성을 밀턴의 <실낙원>에 등치시킨 [죽음의 별] 에피소드는 작가가 이 두 요소를 어떻게 절묘하게 조화시켰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는 물질과 반물질, 그리고 그들 간의 소멸 등의 이론은 현대 물리학에서 가져온 개념들이다. 하지만 반물질의 덩어리인 마왕성을 상정하여 태양과 대비시키고, 이를 빛과 어둠, 선과 악의 싸움인 <실낙원>으로 연결시켜 미지의 우주를 마주한 인간의 두려움으로까지 엮어내는 작가의 솜씨는 절로 혀를 내두르게 한다. 게다가, 이 반물질을 통해 인간이 외우주로 뻗어 나갈 동력을 얻게 된다는 설정은 선악과의 비유로 연결되면서 탁월한 복선의 역할까지 훌륭히 해 내고 있지 않은가. 과학적 상상력이 정통 SF 로서의 품격을 책임져 준다면, 장르를 넘어선 보편성을 확보해 주는건 바로 이렇게 촘촘히 잘 짜여진 내러티브의 힘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에피소드에 치중하는 면이 있지만(뒤로 갈수록 <스타더스트 메모리즈>와 비슷해진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인간의 우주 도전을 다룬 한 편의 장대한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이 서사의 결말이 일종의 실패로 끝난다는 점이다. 작품 후반의 (다소 파편적으로 느껴지는) 에피소드들은 주로 인간이 외우주에 정착하려다 실패하는 사례들을 보여주는데 치중하는데, 많은 경우 고작 1~200년의 경험으로는 인간이 새로운 환경을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 많은 별들 가운데 그럭저럭 "무난한" 환경의 거점 하나 찾는게 불가능할까 싶기도 하지만, 일단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것은 기술의 발전만으로는 정복할 수 없는 축적된 경험, "역사"의 부재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이 다른 SF 작품들과 가지는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가 바로 외계의 지적 생명체를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주로 뛰쳐 나갔지만, 인간은 여전히 외롭다. 상상해보라. 이 무한하고 어두운 공간 속에서 누군가 손을 잡아줄 존재 없이 그저 혼자만의 힘으로 좌충우돌 전진하기란 얼마나 고된 일이겠는가. 한 개인이 혼자만의 힘으로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이란 존재도 혼자만의 힘으로 성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게 영화 <Contact> 에서처럼 아버지 같은 자상한 존재이건, 아니면 인간 따위 하며 비웃음을 날릴 시크한 외계인이건, 다른 지적 존재와의 만남은 인간의 우주 진출의 결과가 아닌 선결조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우주는 언제나 인간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비록 지금의 우리는 밤하늘의 별들이 어떤 초월적 존재가 아닌 우리와 똑같은 "물질"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우주가 더 이상 신비롭지 않은 무엇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주는 여전히 광대하고, 인간은 여전히 이렇게도 작고 약할 뿐이니까. 이 작은 인간의 정신이 더 크고 거대한 무엇을 꿈꾸는것, 그것이 상상력의 힘 아니었는가. 이 작품을 보라. 과학이 열어젖힌 지평 너머로 새로운 상상력이 꿈틀댄다. 그 상상력은 여전히, 내 가슴을 뛰게 한다.

TrackBack

TrackBack URL for this entry:
http://www.turnleft.org/cgi/mt/mt-tb.cgi/1879

Comments (29)

starmaru:

어라 이 책 리뷰 있는건 몰랐네.
재밌겠다.

그런데 혹시 권당 28,500원은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대략 낭패.

수띵:

홍따가 왜 댓글을 안 다나 했더니, 못 봤구나 -_-; 딱 너가 좋아할 타입의 책이다. 강추!!

물론 가격은 3권 세트의 가격. 권당이라면 상상만해도 허리가 휘는 기분이.. -0-

starmaru:

그저께 이 책 3권 세트를
사들고 집에 들어가서는,
술을 꽤 많이 마시고 영화를 한 편 보고 난 뒤 무척 피곤한 상태에서 잠을 청하려다

1권을 살짝 펴봤거든.

4시 넘어서 잤었던 듯.
3권까지 다 봤는데, 또 봐도 재밌는 듯.

수띵:

너가 좋아할 거라고 했지? ㅋㅋ
나도 한 3번은 본 듯..;;

2001 Space Fantasia (다락방 서재)
kcthijqwlj http://www.gq886z763n4p23doppfoi37kb2q55h86s.org/
akcthijqwlj
[url=http://www.gq886z763n4p23doppfoi37kb2q55h86s.org/]ukcthijqwlj[/url]

I had never, until then, felt so powerfully connected to
jordan 11 low green snakeskin

Post a comment

About

This page contains a single entry from the blog posted on September 4, 2009 8:09 PM.

The previous post in this blog was 추락.

The next post in this blog is 르몽드 세계사.

Many more can be found on the main index page or by looking through the arch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