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aus | Main | 15년 전의 날씨 »

쓸쓸함의 주파수

쓸쓸함의 주파수
- 오츠 이치 지음/채숙향 옮김/지식여행/8,500원

그러니까.. "굳이" 분류를 하자면 쓸쓸함보다는 애뜻함에 가까울 것 같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의 공통점을 정말로 "굳이" 짚어 보라면 말이다. 솔직히 말해, 성격도, 글 쓴 동기도 다른 네 편의 단편을 모아놓고 굳이 책 제목을 붙이려니 이렇게 애매한 제목 밖에는 안 나오는거다. 차라리 표제작 하나로 책 제목을 달고, "오츠 이치 단편집" 이렇게 부제를 붙여주면 깔끔하지 않았겠나. 출판 마케팅 입장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 같은 독자한테는 이런 제목, "후까시"로 밖에 설명이 안 된다.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느낌을 갖는 것 같은데, <미래예보>나 <필름 속 소녀>는 완성도가 떨어진다. 아니나 다를까, 저자는 후기에서 두 편의 글은 청탁을 받아 억지로(?) 쓴 글임을 솔직하게 고백을 하는데, 미안하지만 솔직하다고 용서가 되는건 아니다. 뭐, 글쟁이도 먹고 살아야 하니 청탁을 받아 글을 쓸 수도 있다. 거장이 되려면 그런 글에서조차 준비된 작가의 모습을 보여야겠지만, 아직 그만한 그릇이 안 되면 다소 미진한 글이 나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글들을 다시 자기 이름을 단 단편집으로 묶어 내놓는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당신, 고작 이 정도 글에 자기 이름을 붙이고 만족한단 말인가? (사실, 이 분노는 <아주 오래된 농담>을 읽고 박완서 씨에게 느꼈던 분노와도 같다)

그나마 다른 두 편의 단편 덕에 작가에 대한 일말의 기대는 남겨 놓는다. <손을 잡은 도둑>은 아주 유쾌하게 읽을 수 있었다.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손을 맞잡은 도둑과 그녀. 상황 자체가 주는 기발함과 깔끔한 마무리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마지막 단편인 <잃어버린 이야기>가 그나마 책이 제목 <쓸쓸함의 주파수>와 가장 근접해 있으면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사고로 오른팔 팔꿈치 아래의 근육을 제외하곤 전신이 마비된 남편과, 그 남편의 팔을 건반 삼아 피아노를 쳐서 음악을 들려주는 아내. 아내의 연주를 이해 못했던 남편은 청각이 아닌 촉각으로 비로서 그 연주를 진심으로 듣기 시작한다. 하지만, 후회해도 이제는 다시 닿을 수 없는 소통의 끈.

이 단편을 읽으면서 문득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떠올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음악의 간절함이, <잃어버린 이야기>의 남편이 오로지 팔의 촉감만으로 느끼는 그 간절함과 맞닿아 있다.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셀마와, 아내를 위해 스스로를 유폐시키기로 결심한 남편의 선택이 서로 맞닿아 있는 것처럼. 이들이 처한 상황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 속에서 가슴을 울리는 선택을 하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것이 우리가 비극을 읽는 까닭일 것이다.

TrackBack

TrackBack URL for this entry:
http://www.turnleft.org/cgi/mt/mt-tb.cgi/1858

Post a comment

About

This page contains a single entry from the blog posted on April 15, 2009 1:52 PM.

The previous post in this blog was Maus.

The next post in this blog is 15년 전의 날씨.

Many more can be found on the main index page or by looking through the arch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