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함의 주파수
- 오츠 이치 지음/채숙향 옮김/지식여행/8,500원
그러니까.. "굳이" 분류를 하자면 쓸쓸함보다는 애뜻함에 가까울 것 같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의 공통점을 정말로 "굳이" 짚어 보라면 말이다. 솔직히 말해, 성격도, 글 쓴 동기도 다른 네 편의 단편을 모아놓고 굳이 책 제목을 붙이려니 이렇게 애매한 제목 밖에는 안 나오는거다. 차라리 표제작 하나로 책 제목을 달고, "오츠 이치 단편집" 이렇게 부제를 붙여주면 깔끔하지 않았겠나. 출판 마케팅 입장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 같은 독자한테는 이런 제목, "후까시"로 밖에 설명이 안 된다.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느낌을 갖는 것 같은데, <미래예보>나 <필름 속 소녀>는 완성도가 떨어진다. 아니나 다를까, 저자는 후기에서 두 편의 글은 청탁을 받아 억지로(?) 쓴 글임을 솔직하게 고백을 하는데, 미안하지만 솔직하다고 용서가 되는건 아니다. 뭐, 글쟁이도 먹고 살아야 하니 청탁을 받아 글을 쓸 수도 있다. 거장이 되려면 그런 글에서조차 준비된 작가의 모습을 보여야겠지만, 아직 그만한 그릇이 안 되면 다소 미진한 글이 나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글들을 다시 자기 이름을 단 단편집으로 묶어 내놓는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당신, 고작 이 정도 글에 자기 이름을 붙이고 만족한단 말인가? (사실, 이 분노는 <아주 오래된 농담>을 읽고 박완서 씨에게 느꼈던 분노와도 같다)
그나마 다른 두 편의 단편 덕에 작가에 대한 일말의 기대는 남겨 놓는다. <손을 잡은 도둑>은 아주 유쾌하게 읽을 수 있었다.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손을 맞잡은 도둑과 그녀. 상황 자체가 주는 기발함과 깔끔한 마무리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마지막 단편인 <잃어버린 이야기>가 그나마 책이 제목 <쓸쓸함의 주파수>와 가장 근접해 있으면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사고로 오른팔 팔꿈치 아래의 근육을 제외하곤 전신이 마비된 남편과, 그 남편의 팔을 건반 삼아 피아노를 쳐서 음악을 들려주는 아내. 아내의 연주를 이해 못했던 남편은 청각이 아닌 촉각으로 비로서 그 연주를 진심으로 듣기 시작한다. 하지만, 후회해도 이제는 다시 닿을 수 없는 소통의 끈.
이 단편을 읽으면서 문득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떠올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음악의 간절함이, <잃어버린 이야기>의 남편이 오로지 팔의 촉감만으로 느끼는 그 간절함과 맞닿아 있다.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셀마와, 아내를 위해 스스로를 유폐시키기로 결심한 남편의 선택이 서로 맞닿아 있는 것처럼. 이들이 처한 상황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 속에서 가슴을 울리는 선택을 하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것이 우리가 비극을 읽는 까닭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