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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 2009

마가렛타운

마가렛타운
- 가브리엘 제빈 지음/서현정 옮김/북폴리오/9,000원

연애편지라는걸 써 적이 없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연애편지에서 으례 떠올리게 되는 사랑의 찬가들이 민망했다고나 할까요. 어렸을 때는 철없는 자존심 때문이었다면,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는 사랑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깨지고 좀 더 현실적인 사랑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찬가는 아니겠지만, 여전히 연애편지는 유효한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대화로는 전달하기 힘든,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을테니까요. 그래서, 여기 한 권의 책 이야기를 빌려 당신에게 편지를 한 통 보내려 합니다.

당신은 종종 당신의 어디가 좋냐고 내게 묻습니다. 그 때마다 씨익 웃으며 농담으로 대꾸를 하지만, 글쎄요, 정색을 하고 답한다고 한들 그냥 당신이라는 사람 자체가 좋다 라는, 다소 성의 없어 보이는 말밖에는 생각나지 않는군요. 사실, 당신이 지닌 어떤 장점 때문에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힘들어요. 차라리, 당신이 지닌 어떤 단점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좀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지닌 장점과 단점 모두 당신의 한 부분에 불과하니까요. 내게 당신은 장단점들의 목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훨씬 더 큰 우주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를 묻는 당신의 질문 앞에 나는 더더욱 말문이 막히곤 합니다. 굳이 우리 뿐 아니라 인류 역사상 수많은 연인들이 불멸의 사랑을 노래했다가 스스로 그 약속을 저버리곤 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어떤 이들은 그래서 사랑의 덧없음을 외치곤 합니다. 사랑이 주는 희열과 사랑의 배신이 주는 절망을 생각하면 이 양 극단의 반응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주변을 좀 더 살펴보면 보다 현명한 이들이 사랑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통찰을 우리에게 던져주곤 한답니다. 그런 통찰을 통해 나는 우리의 사랑 역시 더 굳건해질 수 있다고 믿구요. 이 책 <마가렛타운> 역시 그 중 하나입니다.

먼저 책은 N 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N 은 자신이 조교로 들어가던 수업의 메기라는 학생과 사랑에 빠집니다. 메기의 본명은 마가렛 타운(Margaret Towne)입니다. 메기는 마가렛의 애칭 중 하나죠. 어느날 N 은 메기와 함께 그녀의 고향 마을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 마을의 이름도 마가렛타운(Margarettown) 입니다. 마가렛타운에 사는 마가렛 타운. 이 이름이 가진 중의성은 아마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을 겁니다. 어쨌든, 마을 입구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덕에 N 은 메기의 고향집에서야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 이 집에 살고 있는 여러 인물들을 만나게 되죠. 나이가 아주 많은 마가렛 할머니와 퉁명스러운 중년의 마지, 어딘가 음울하고 반항적인 느낌의 10대 미아, 그리고 어린 꼬마인 메이가 그들입니다.

눈치를 챘겠지만, 메기나 마지, 미아, 메이 모두 마가렛의 애칭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특정 나이대의 마가렛이랍니다. 마가렛 할머니는 자신이 본체에 해당하고 삶의 어느 순간마다 자신과 똑같은 다른 마가렛이 나타나 계속 자신과 살고 있다고 말해줍니다. 자살해버린 30대의 그레타를 제외하곤 말이죠. 그리고, 하나의 마가렛이 진정한 사랑을 찾으면 다른 마가렛들은 사라질거라는 전설도 들려줍니다. 나이가 많이 들면 모르는게 없어지거든요. 몇 주를 마가렛 타운에서 보내면서 N 은 메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지켜봅니다. 그리고 메기에게 청혼을 하기로 결심하죠. 메기가 승락을 하자, 정말로 다른 마가렛들은 사라져 버립니다.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죠? 사실 이 이야기는 N 이 자신의 딸에게 남기는 편지 속에 적은 이야기니까, 있는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어요. 아이에게 엄마와 아빠가 만나 사랑하게된 과정을 로맨틱하게 과장해서 들려주는거야 흔한 일이죠. 요즘 같은 시절에 허위사실 유포죄로 잡혀갈까봐 약간 걱정은 되는군요. 하지만, 이 이야기가 어떤 은유임은 분명합니다. 메기와 결혼을 하던 날, N 은 메기의 눈 속에서 그 모든 마가렛들을 발견합니다. 귀여운 메이와 까칠해서 접근하기 어려웠던 미아, 퉁명스러운 마지와 깊은 마가렛 할머니, 심지어 자살한 그레타 까지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오늘의 아름다운 신부 메기는 다른 모습의 마가렛들로 변해갈 겁니다. 그걸 알고 있는 N의 청혼은 아마도 그 모든 마가렛을 사랑하겠다는 뜻이었겠지요.

영원히 행복할 것 같은 이 연애담은 이제 마가렛의 입장에서 서술되기 시작합니다. 결혼 후 골동품점을 차린 마가렛은 무료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갑니다. 그러던 문득 자신에게 작은 친절을 베푼 옆 가게 남자에게 호감을 갖게 되지요. 사실 이 남자는 별로 대단치도 않은 사람이에요. 마가렛에게 푹 빠진 것 같지도 않고(그도 아내가 있거든요), 평범한 외모에 배도 살짝 나온데다가 머리까지 벗겨졌지요. 하지만 마가렛은 이 남자에게 향하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이 남자와 함께 잠자리를 가진 마가렛은 그제서야 왜 자신이 이 남자에게 끌렸는지를 깨닫게 되지요. 그건 그 남자가 N 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지 그 때문이었습니다. 권태. 그녀에게 N 은 계속 똑같은, 변하지 않는, 그래서 지루해진 N 으로만 남아 있었던 겁니다.

마가렛, 아니 그레타는 이 권태로부터 탈출하지 못합니다. 어느날 문득 집을 나가고, 몇 년 후 딸을 데리고 N 에게 돌아오지요. 그리고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사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도 그레타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녀는 왜 그렇게 권태로워야 했는지, 언제부터 우울증에 시달렸는지,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있었다면 왜 실패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레타를 비난할 수는 없어요.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N 과의 관계가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건 그녀가 N 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그렇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흔히 지금의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영원히 계속되기를 기도합니다. 나 역시도 그래요.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변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변하는데, 그 사람의 사랑은 그대로 있기를 바라는건 헛된 희망이 아닐까요.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물었던건 그래서 우문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도, 은수도 변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거죠.(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토록 분명히 알 수 있었음에도 말이에요)  후에 은수를 돌려보낸 후 상우가 지은 웃음은 비로서 변해버린 서로의 모습을 깨달았기 때문일 겁니다. 사랑은 그렇게 변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건 다만, 그 변화의 방향을 현명하게 이끌도록 노력하는게 아닐까요. 서로의 변해가는 모습을 애정을 갖고 지켜보면서 말이죠.

마가렛의 안에서 여러 명의 마가렛을 발견한 N 의 이야기는 그래서 내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쩌면 마을 수준이 아니라 도시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가렛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일 겁니다. 당신 역시 그럴겁니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많은 모습들과, 시간이 우리에게 안겨줄 새로운 모습들까지, 우리는 모두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니까요. 내게 주어진 축복은 내게 당신의 그 변화를 함께 할, 서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 동안 당신과 함께 나도, 나의 사랑도 그렇게 함께 변해갈 것입니다.

하지만, N 의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가렛의 버팀목이 되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건 어쩌면, 그 자신이 함께 변화하지 못한 N 의 잘못일 수도 있고, 짜릿했던 흥분으로만 사랑을 기억한, 그리고 기대한 마가렛의 잘못일수도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에 잘잘못을 따지는건 불필요할 일일 겁니다. 그보다 중요한건, 사랑이란 결코 어느 한 쪽의 노력만으로는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지요. 아마도 사랑의 서약이란건 그런게 아닐까요. 영원불멸의 사랑을 노래하기보다는, 서로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 말이죠. 그러니, N 이 딸에게 남긴 편지의 한 대목은 기억해 둘 가치가 있을 겁니다. "진짜 사랑은 본능이 아니라 의지(p. 246)"라는 말 말입니다.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February 23, 2009

Maus

Maus I & II : A Survivor's Tale
-Art Spiegelman 지음/Random House/$35.00

아트 슈피겔만의 <쥐>를 이제야 읽었다. 이 작품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성완경씨의 <세계만화>를 읽으면서 였는데(기록을 찾아보니 2005년에 읽었구나), 당시에는 국내에는 절판인 상태라 찾아 읽을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국내에서도 재출간이 되었으나, 일단 손에 잡히는대로 이 곳에서 영어본으로 찾아 읽었다. 예상 외로 책은 얇았다. 하지만, 이 얇은 책 두 권 분량을 완성하는데 걸린 시간만 13년. 시간이 모든걸 말해주지는 않겠지만, 책을 읽고 나니 역시 그 긴 시간만큼 깊이 고민하고 만든 작품이다 싶다. 명작은 그냥 명작이 되는게 아니다.

물론, 이 작품이 명작의 반열에 오른 것은 단지 홀로코스트를 다뤘기 때문은 아니다. 홀로코스트가 얼마나 처참했는지, 독일인들이 얼마나 잔혹했는지에 대한 텍스트는 이미 차고 넘친다. 인간에 대한 분노, 이성에 대한 절망의 외침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동어반복을 위해서라면 굳이 홀로코스트까지 돌아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에서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는 폭력의 현장들이 더 생생한 분노를 자아낼 테니까. 이 작품 역시 홀로코스트를 증언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면 그 증언의 중심에 '죽음'이 아닌 '생존'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부제 <A Survivor's Tale(한 생존자의 이야기)> 가 말하고 있듯, 이것은 살아 남은 이의 이야기이다. 저자 아티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자신의 아버지 블라덱을 인터뷰하면서 블라덱이 경험한 홀로코스트의 경험을 기록한다. 당연하 이 기록은 홀로코스트라는 사건 자체에 대한 입체적인 조망이 아닌, 홀로코스트라는 사건 '속'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행동했는가만을 다루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고, 얼마나 치밀하게 학살이 진행되었는가는 그 속의 개인에겐 전혀 중요치 않다. 블라덱에게도 중요한 것은 그가 죽음 바로 근처에 있으며 어떻게 해서든 살아 남아야 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살아 남았다. 절반은 그의 능력으로, 절반은 운으로. 하지만 그의 능력이라는게 무엇이었나. 빵에 곰팡이가 필 지언정 남에게 주기보다는 나중을 위해 간직하고, 깨끗한 셔츠가 필요해질 것을 예상하고 다른 이의 셔츠를 미리 사 두는 것? 아무도 믿지 않는 것? (써놓고 보니 "자본주의 생존법"과 비슷하게 느껴지는건 나만 그런가?) 그의 생존은 생존을 위협한 상대와의 투쟁의 결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생존은 그와 같은 처지에 처한 다른 사람들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결과였다. 다시 말해 그를 살린 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밟고 올라서는 그의 능력이었다. 그를 비난하는게 아니다. 그건 그가 거대한 폭력 앞에 생존을 위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고, 비난은 응당 그런 상황을 초래한 폭력 자체를 향해야 할 것이다.(다시 한번, 이 문장을 쓰면서 데자뷰를 느낀다)

그러나, 살아남았다 한들 그 폭력의 흔적마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그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극단적 폭력에 직면한 인간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의식 자체를 뒤튼다. 살아 남기 위해 폭력에 맞서기보다는 가능한 순응하며 최악의 순간을 피하려하고, 그런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폭력의 질서 자체를 삶의 본질로 여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가정 폭력을 경험한 아이가 성장한 후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군대에서 가혹한 폭력을 당한 신병들이 고참이 된 후에는 똑같은 폭력을 후임병들에게 반복하는 것도, 폭력이 인간의 의식을 어떻게 뒤흔들어 버리는지를 보이는 또 다른 사례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의식의 뒤틀림을 대개의 생존자들은 자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작품 곳곳에서 아버지 블라덱의 증언 외에 그 증언을 청취하는 과정을 함께 기록하면서 오늘의 블라덱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은 물건 하나 버리지 않고 다 모아두고, 재혼한 아내를 돈만 아는 여자라고 매도하고, 심지어 반쯤 먹은 시리얼을 반품하는 등, 블라덱의 오늘은 홀로코스트 당시와 큰 차이가 없다. 그에겐 그 생존의 방식이 다른 모든 도덕적 가치들을 압도하는 진리며 선(善)이기 때문이다. 살아 남았다는 것이 그가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완고한 세계관 앞에 성찰과 반성의 자리는 없다. 흑인들을 차별하는 것이 유태인들을 차별하는 것과 똑같다는 지적에 "어떻게 흑인과 유태인이 같을 수가 있니?"라고 되묻는 블라덱의 모습에 오늘날 이스라엘의 모습이 그대로 겹친다.

"Here my troubles began(여기서 나의 고난들이 시작되었다)"

2권의 부제로 달린 위의 문장은 바로 저자 아티의 독백이다. 아들에게 "친구? 먹을 것 없이 일주일만 갇혀보면 친구가 뭔지 알게 될거다"라고 가르치는 아버지, 홀로코스트는 살아 남았으나 결국 우울증으로 자살한 어머니. 어린 소년에게 이러한 가정 환경이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상흔은 비단 직접적인 생존자들만의 몫이 아닌 셈이다. 이렇게 보면, 약물 중독과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저자가 다행히 간신히 자신을 추스리는데 성공한 것은 또 하나의 홀로코스트 생존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바로 작가가 스스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치유해 나가는 과정의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육신의 상처에 치료가 필요하듯, 정신의 상처에도 적절한 치유의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이는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오늘의 이스라엘은 치유되지 않은 집단적 트라우마가 보이는 광기의 상징이 아닌가. 홀로코스트의 기억은 유대인들에게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대신, 자신들이 저지르는 그 모든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을 향한 이스라엘의 야만적 폭력은 또 다른 생존자들을 만들어내고, 결국 자신들에게 돌아올 폭력의 사슬을 연장할 뿐이다. 자신들을 향한 반유대주의 때문이라는 변명은 무의미하다. 결국 상처를 치유하고 폭력의 사슬을 끊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니까. 이 책 <쥐>의 저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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