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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묻는다

인간을 묻는다
- 제이콥 브로노프스키 지음/김용준 옮김/개마고원/13,000원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어렸을 때 영화 <트루먼 쇼>와 같은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쩌면 나를 위해 연기를 하고 있는게 아닐까, 내가 안 보이는 곳에는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적당한 순간에 나타나 모르는 척 인사를 건네는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말이다. (물론 그게 방송된다고 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지만) 그 때는 그저 혼자 생각하고 큭큭댔던 상상이었는데, 어른이 된 후에 <트루먼 쇼>를 보고 나니 나만 그런 생각을 했던게 아니라는걸 알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내가 특별히 왕자병은 아니었던게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상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누구나 유년을 거치면서 비슷한 의식의 변이를 거치기 때문이다.

'생리적 조산설' 이라는게 있다. 인간의 신체 크기 대비 두뇌 용적이 다른 동물에 비해 월등히 커지면서, 뇌가 완전히 성장하기 전에 자궁 입구를 빠져나오도록 진화했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의 타당성 여부야 어쨌든, 태어날 때 아직 뇌가 충분히 성장해 있지 않은 인간은 일정 기간 동안은 (대개 부모인) 누군가의 절대적인 도움 하에만 살아남을 수 있다. 이 때의 자아는 지극히 제한적인 세계만을 접촉하기 때문에, 자기 외부의 어떤 존재, 즉 '타자'가 오직 자신이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유년기의 자기 중심성은 필연적인 셈이다.(아멜리 노통브의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서두에서 주인공은 "나는 신이었다"라고 선언한다. 아, 유년의 자기 중심성을 이렇게 앙증맞게 표현하다니!)

기본적으로 유년의 자아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쌓아나가는 방식은 귀납적이다. 내가 A 라는 행동을 하면 B 라는 반응이 온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확인될 때 유아는 그것을 하나의 당연한 과정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최초의 경험은 부모로부터 온다. 아기가 울음을 터트리면, 부모는 아기가 배가 고픈지 혹은 기저귀가 젖었는지 확인하고 그에 맞는 조처들을 즉각 취해준다. 울음이라는 행동이 욕구의 충족이라는 반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조금 더 큰 후에 만나게 되는 외부 사물들도 마찬가지다. 장난감 버튼을 누르면 소리가 나고, 수도꼭지를 돌리면 물이 나오게 되어 있다. 기대한대로 반응하지 않는건 뭔가가 고장난거다. 간단히 말해 유년의 자아에게 세계란 자신의 행동에 정해진 반응을 보이는 거대한 장난감과 같다.

이러한 유년의 세계가 무너지는건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다. 부모라는 예외를 제외하면 아이는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기대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심지어는, 똑같은 사람에게 똑같은 행동을 해도 다른 반응이 올 때도 많다. 오랜 시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야 아이는 고통스럽지만 피할 수 없는 결론과 마주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또 하나의 '자아'들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는 단지 '타자'의 발견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자아가 지녔던 신성(神性)의 해체이자, 앞으로 겪게 될 수많은 갈등들의 전조에 해당한다. 앞서 언급한 <트루먼 쇼> 류의 상상은 바로 그 경계점에서 나온게 아닐까 싶다. 그래도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게 아닐까 하는, 유년의 자기 중심성이 남긴 잔상 같은 상상력으로 말이다.

이 유년의 경험은 우리가 가진 지식이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 <인간을 묻는다>에서 사용된 용어들을 그대로 따르자면, 하나는 "자연에 관한 지식"이며 다른 하나는 "자아에 관한 지식"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식'은 인간 고유의 특성은 아니다. 모든 생명은 (그리고 잘 설계된 기계들은) 경험을 통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지식을 축적하면서 스스로를 확장해 나간다. 대부분 생존과 직결된 이들 지식들은 외부 세계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식, 즉 "자연에 관한 지식"이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자아"를 가지며(여기서 자아는 보다 능동적인 의미다), 더 나아가 "자아에 관한 지식"을 축적한다. 저자는 이 "자아에 관한 지식"을 깊이 살펴봄으로써 인간됨의 의미를 탐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자연에 관한 지식"과 "자아에 관한 지식"을 동일한 차원에 배치한다는 것이다. "자연에 관한 지식"을 대표하는 과학은 대개 논리와 이성의 영역, 인간적 감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사실"의 학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저자는 과학 역시 인간이 지닌 지식의 한 종류로서, 지식을 구성하는 언어의 한계 속에 함께 묶여 있음을 지적한다. 그 어떤 언어도 모든 자연의 논리를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없다(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이를 증명한다). 과학의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모호함과 모순이야말로 인간의 상상력이 개입할 수 있는 틈이며, 과학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온 힘은 바로 이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아에 관한 지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는 이성의 논리, 과학의 이론이 다른 지식에 비해 정확하며, 그러므로 우월하다는 근대적 믿음을 뒤흔든다.

그렇다면, "자연에 관한 지식"과 "자아에 관한 지식"이 갖는 차이점은 무엇일까. 저자가 지적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인간이 이 지식 체계에 가하는 노력의 방향이다. 과학은 하나의 이론체계가 가진 모순과 모호함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탐구가 이루어진다. 이 때 새로운 이론체계는 기존 이론체계의 논리적 결과로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장기에서 묘수가 번쩍 떠오르듯 새로운 상상력의 결과로서 나타나게 된다. 반면, "자아에 관한 지식"의 목적은 모순의 해결이 아니다. 인간에게 A 라는 상황에서 반드시 B 라는 행동을 보이도록 요구하는 것이 이 지식의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자아에 관한 지식"은 인간이 A 라는 상황에서 B 라는 반응을 보일수도, C 라는 반응을 보일수도, 심지어 D 라는 반응을 보일수도 있음을 이해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모순 자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인간 자아에 관한 지식의 목적이다.

저자는 "자아에 관한 지식"의 대표적인 사례로 문학을 꼽는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문학은 삶에서 만나게 되는 딜레마들을 가감 없이 드러내주는 작품들이다. 그 딜레마의 유일무이한 해법을 제시하려 한다던가, 혹은 독자들을 하나의 교훈으로 이끄려 하는 작품은 그저 통속 소설에 불과할 것이다. 좋은 문학 작품은 딜레마에 처한 인간이 택할 수 있는 모든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문학 작품을 읽는 사람의 자세이다. 만약 우리가 문학 작품을 "자연에 관한 지식"과 같은 방식으로 대한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도스또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이라고는 "살인을 하면 결국 처벌을 받는다" 정도가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죄와 벌>에서 다른 것을 얻는다. 우리는 로쟈가 처한 상황에서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내가 소냐였다면 과연 로쟈를 받아들였을까를 고민한다. 이러한 고민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처한 상황과 고민들을 보다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자아에 대한 지식"을 축적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오직 이러한 감정이입을 통해서 인간은 다른 자아들이 처한 상황과 그로 인한 반응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어떤 도덕적 요청이기 이전에, 인간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한 셈이다. 그리고 이 길은 또한 인간이 "인간다움"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곳이기도 하다.

20세기는 과학의 세기였지만, 동시에 폭력의 세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과학은 그 어마어마한 폭력을 가능하게한 도구였다. 우리는 히틀러를 비난하고, 스탈린을 비난하고, 부시를 비난한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 그 독가스를 만들었고, 원자폭탄을 만들었으며, 폭격기와 탱크를 만들었음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은 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단지 그들이 직접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해서 과학자들은 그들의 작품(?)들이 초래한 그 모든 폭력으로부터 면책받을 수 있을까? 아니다. 이는 과학이 스스로를 인간 위에 위치지움으로써 초래한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 이 자기 기만이야말로 저자 브로노프스키가 이 책 전체에 걸쳐 인간에 기반한 새로운 과학 철학의 제시를 통해 극복하려 한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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