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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6, 2008

서른 살의 강

서른 살의 강
- 은희경, 김소진, 전경린 外 지음 / 문학동네 / 8000원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하얀 입김이 떠도니 이제 계절은 완연히 겨울로 향하고 있다. 제 잎을 떨궈내는 저 나무들처럼, 나도, 그리고 당신들도 또 한 겹의 나이테를 두를 시간이 다가온게다. 새해와 함께 시계 초침 넘어가듯 째깍 하고 나이가 드는 것은 아니겠지만, 하나의 순환이 끝나는 겨울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하는 계절임에는 분명하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흥얼거리던 20대의 마지막 나날들이 엇그제 같은데, 이제 나도 어느새 서른 하고도 셋의 나이가 된다.

되돌아보면, 서른이라는 나이를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 때는 오히려 20대의 중반이 아니었나 싶다. 정작 서른을 맞이하는 순간은 덤덤하게 지나갔고, 여전히 나는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살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막상 이 나이가 되니 서른이라는 나이를 두고 떨었던 지난날의 호들갑이 의아스러워 지기까지 한다. 서른이 되면 더 이상 열정 따위는 남아 있지 않을 줄 알았던가? 무릎까지 처지는 다크 서클이나 이마에 새겨진 주름, 살짝 벗겨진 머리, 불룩 나온 뱃살 등으로 상상되던 "중년"이 시작될 거라 믿었던가? (오, 이런. 뱃살은 나왔구나) 아니다. 사실 미래를 앞당겨 비관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하릴 없는 나날은 아니었다. 다만 그 때의 나는 그 빛나던 젊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청춘의 시간들을 "서른"이라는 나이를 거울 삼아 뽐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흘러, 이제 나는 정.말.로 삼십대가 되었다. 이십대 때 상상하던 것처럼 청춘이 끝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삶은 분명 그 때와는 다른 종류의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나도 변했고, 나를 둘러싼 환경도,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변했으니까. 익숙한 듯 하면서도 삶은 항상 그렇게 새로운 고민들을 던져준다. 그 고민들은 힘겨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행복한 고민들이다. 조금 건방진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고민들 앞에서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가 바로 나라는 존재, 나만의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믿기 때문이다. 다만, 눈 앞의 현실에 매몰되어 더 큰 것들을 놓치고 있는게 아닐까 두려움이 문득 찾아오곤 한다. 이럴 때가 바로 책을 집어 들 때다. 문학이란 자고로,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위한 간접 경험의 보고 아니겠는가.

<서른 살의 강> 이라는 단편집은 그렇게 내 손에 흘러 들어왔다. 작가들이 그리는, 조금은 극단적이겠지만, 소설 속의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어떤 교훈 혹은 반면교사의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은희경, 김소진, 전경린, 성석제, 양순석, 이병천, 차현숙, 박상우, 윤효, 이 9명의 작가가 그리는 서른은, 불행히도 그리 유쾌하지 못하다. 아니, 내가 느낌 감정은 차라리 당혹스러움에 가깝다. 서른이라는 나이가 이토록 아팠던가? 나의 무던한 서른은 그저 유예된 이십대의 끝자락에 불과했던 걸까? 그도 아니면, 이건 그저 '소설' 속 이야기에 불과한건가.

공감하지 못하는 아픔은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잠시 옆으로 치워두면, 의외로 흥미로운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중 가장 눈여겨 볼만한 점은 그 아픔의 유형이 작가의 성별에 따라 어느 정도 구분된다는 점이다. 의도적인 편집인지 모르겠지만, 작품의 배치 순서도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의 글을 번갈아 보도록 되어 있어 양 성(性)의 차이는 더욱 도드라진다. 이렇게 보니, 서른의 아픔은 그저 개인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저마다의 사연 속에서는 자기만 아픈 것 같고 자기만 못난 것 같지만, 크게 보면 모두가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얼마만큼씩은 공유하고 있는 아픔인 셈이다. 직접적으로 공감하지는 못하더라도, 나 역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이 책에 담긴 남성 작가들의 글이 유독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들이 그리는 사랑이(남성 작가들의 주된 관심사는 "사랑"이다) 하나 같이 아프고 힘들어서가 아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안다. 서른의 사랑이 마냥 아름다울 수만은 없음을, “사랑한다”는 말만으로 행복해 지기에는 서로에게 얽힌 관계의 무게가 무겁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건 그 사랑에 대처하는 주인공들의 태도다. 사실 이들은 많이 아파하지도 않는다. 미처 아프기도 전에, 이들은 체념할 뿐이다. 그저 쓸쓸히, 사랑은 끝났다고 중얼거리듯 말이다.
 
오히려 여성 작가들의 주인공들은 더 많이 아파하면서도 오히려 희망적이다. 통념상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사랑"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고 하지만, 이들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다. (이게 꼭 삼십대여서인지는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이들을 아프게 하는 것은 아직 독립된 존재로 홀로 서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다. 이 아픔은 차라리 깨달음에 가깝다. "아버지" 혹은 "가정"에 예속된 존재였던 여성이 진정한 "나"를 찾기 시작했다는 뜻이니까. "당신을 사랑하지만, 나를 더 많이 사랑해" 라는 선언은 <섹스 앤 더 시티>의 사만다처럼 50이 되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진리는 아닌 셈이다.

모든 것을 이미 다 겪은 듯 체념하는 남성과, 아직도 더 성장하기를 바라는 여성. 30대를 바라보는 이 관점의 차이는 결국 삶의 자세의 차이로 이어진다. 그 누가 자신의 인생을 확신할 수 있겠냐마는, 적어도 아직은 되돌아보며 감상에 젖을 나이는 아닌 것 같다. 육체적으로는 정점을 지나 노쇠한다고 할 수 있는 나이지만, 인간이란 존재 자체는 시간의 켜가 쌓이는 만큼 계속 성장해 나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혹 나에게도 저런 아픔이 찾아오더라도, 그 아픔을 '나'라는 존재를 더욱 나아가게 하는 성장통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이 내 앞에 놓인 서른이라는 강을 건너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될 것이다.

November 23, 2008

치즈와 구더기

치즈와 구더기
-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김정하, 유제분 옮김/문학과 지성사/18,000원

당연한 이야기지만, 책을 읽는데 꼭 정해진 독법이 있는건 아니다. 피카소의 화집으로 색칠공부를 하건, 글로벌 리더가 되겠다고 스타인벡 소설로 영어공부를 하건, 그건 독자의 권리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독서란 저자와의 대화라고 생각한다. 모든 대화가 그러하듯 이 대화에도 원활한 소통을 위해 서로간에 정해진 규약, 프로토콜이 존재하는데, 이 프로토콜을 무시하는 독서란 제대로 된 독서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게 꼭 노력한다고 되는 일만은 아니다. 특히 전문적인 분야를 다루는 책의 경우 일정 정도의 배경지식이 요구되는데, 짧은 시간에 배경지식을 쌓을 수는 없는 일이니 제대로 된 독서를 하기는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대개는 배경지식이 없는 책은 아예 손에 들지 않는 편인데, 간혹 이렇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게 되는 책들이 생긴다.

미안해서 하는 소리다. 나같이 모자란 독자를 만나, 제 뜻을 맘껏 전달하지 못하는 작가에게 미안해서 말이다. 미시사의 기념비적인 저작이라는 찬사도, 그 방법론적 혁명도 역사학에 무지한 독자에게는 그저 이해하지 못할 외국어 같이 다가올 뿐이다(서문은 주눅들기 딱 좋다). 16세기 이탈리아 사회를 이해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을 방대한 사료들도, 그저 난수표 같은 어지러움으로 남을 뿐이다. 어쩌겠나. 세상의 모든 책들이 제 짝인 독자만을 만나는건 아니니까, 너무 날 나무라지는 말아줬으면 한다. 적어도 나는 이 책을 즐거운 마음으로는 읽었다. 그것만으로도 저자에게 감사한다.

아마 나 뿐만은 아닐게다. 학술적으로 파고들면 꽤나 전문적인 서적인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꽤 대중적으로 성공했으니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은 "재밌다". 물론 재미의 요소는 다양하다. 헤겔을 읽으면서도 깔깔거리는 사람이 있으니 무엇을 재밌어 하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혹자는 추리 소설과 같은 전개를 마음에 들어할 수도 있겠다.(이렇게 말하면 에코의 책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 정도로 '소설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나를 무엇보다 매료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이 책의 주인공 메노키오라는 인물 그 자신이다.

도메니코 스칸델라, 혹은 메노키오. 그는 대단한 영웅도 아니었고, 이름을 남길만한 큰 업적을 세운 바도 없다. 16세기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방앗간 주인으로 평생을 살았던 이 촌로의 삶에서 남다른 점이라고는 "종교 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다" 라는 사실 뿐이다. 이마저도 마녀 사냥이 횡행했던 시대에 그다지 "남다르다"라고 할만한 삶의 궤적도 아닐지 모르겠다. 하지만, 진즈부르그는 종교 재판 기록과 서신 등 남겨진 기록을 통해 메노키오라는 이 인물이 가졌던 생각과 주장을 입체적으로 다시 살려낸다. 그 결과 우리가 만나게 되고 알게 되는 메노키오라는 인물은 겉으로 드러나는 삶보다 훨씬 더 큰 우주를 품고 살았음을 알게 된다.

물론,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인류 역사상 나타났다 사라져간 수많은 장삼이사들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싸고 자는 삶을 살다가 갔다고 가정한다면 그건 오만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16세기의 한 촌로가 교회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색다른 세계관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가 그 세계관을 견지해 나간 방식이다. 몇 차례의 종교 재판은 그에게 지배적인 질서를 내면화하고 순응하며 살아갈 충분한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그는 반복적으로 교회의 규율을 벗어나고, 결국 화형을 당하기에 이른다. 이건 하나의 '선택'을 뜻한다. 메노키오는 권력 앞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지키기를 선택한 것이다. 왜일까?

메노키오를 끊임없이 괴롭힌 것은 교회와 성경이 가르친 세계와 자신이 두 눈으로 관찰하는 세계 사이의 불일치였다. 그는 이 불일치 속에서 새로운 설명을 찾기 시작했고, 그 결과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결론을 도출하기에 이른다. 물론, 종교적 세계관에 한 발을 담그면서 유물론적 세계관을 접목시킨 그의 사고는 혁명적이라고 할만한 것은 못 되며, 또한 온전히 그 자신의 머리 속에서만 나온 생각도 아니었다.(메노키오는 금서로 분류되던 책을 여럿 읽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메노키오가 그 자신의 사유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였으며, 심문관들 앞에서 그것을 자신의 생각으로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제가 말씀드린 모든 것은 제가 생각한 것들입니다.(p.127)

여기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신적 권능(심문관들은 신적 권능의 대리인들이다)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 사유하는 인간"으로 자신을 제시하고 있는 한 개인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언명을 내놓기 수십년 이전에, 정식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당대의 지식인 계층과 교류도 없었던 한 시골 방앗간 주인의 입에서 우리는 근대 철학의 출발점, 스스로 사유하는 근대적 주체의 탄생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거듭 강조하듯 메노키오는 당대의 보편적 인물상이라기보다는 매우 예외적인 인물에 해당한다. 따라서 메노키오의 주장을 근거로 근대의 성립을 선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사유가 이후의 시대에 보편화될 사유들을 이미 "선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나는 메노키오의 선택,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 앎에의 욕구가 밝아오는 인간 이성의 새벽을 알리고 있었다고 이해한다.

"치즈와 구더기"는 메노키오가 자신의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비유다. 세계가 절대자에 의해 계획되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치즈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듯 혼돈 속에서 스스로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비유는 메노키오 자신에게도 적용 가능하다. 이 예외적인 인물의 출현은 어떤 의식적이고 지적인 연구 활동이나 학풍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구전 문화와 인쇄물로 보급된 지배 계급의 기록 문화의 접점에서 예측 불가능하게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치즈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듯 말이다. 진즈부르그가 이 책의 제목을 <치즈와 구더기>로 정한 이유도 여기 있는게 아닐까? 거시사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하지만 언제나 기술된 역사의 이면에서 실제로 세상을 움직여온 기층 민중 문화의 저 살아 숨쉬는 생명력을 보여주려고 말이다.

그게 바로 내가 메노키오라는 인물에게, 그리고 이 책에 매혹당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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