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 | Main | 나쁜 사마리아인들 »

전쟁과 영웅

전쟁과 영웅
- 귀도 크노프 지음 / 이동준 옮김 / 자작 / 9000원

사실, 내가 원했던건 이게 아니었다. 나를 이 책으로 이끌었던건 영화 <아버지들의 깃발들(Flags of our Fathers)> 이었고, 영화의 주 소재라고 할 수 있는 아래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보다 깊이 있게 풀어나가는 글을 원했다. 국가가 국민을 전쟁으로 동원하기 위해 어떻게 "영웅"을 만들어 내는지, 사람들은 왜 영웅에 열광하는지, 그 상징 조작의 과정에서 사진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등에 대한 생각의 단초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책의 실제 내용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여기저기서 얻은 단편적 지식들 탓도 크지만, 무엇보다 <전쟁과 영웅> 이라는 제목이 책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니, 일단 여기서 별점 하나는 까먹고 들어가야겠다.


이와지마 섬의 스리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를 꽂는 미군들

머리말에 따르면 이 책은 독일 ZDF 방송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역사를 만든 사진>을 책으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찾아보니 저자로 나와 있는 귀도 크노프(Guido Knopp)는 다큐멘터리 제작자이며 저널리스트다. 하지만 그의 저서 목록에도 이 책에 대한 정보는 없고, 정확히 어느 다큐멘터리를 옮긴 것인지도 잘 검색되지 않는다.(그의 주 관심사는 히틀러와 제 3 제국이다) 현재로서는 책의 정확한 정체(?)는 확인되지 않는다. 어쨌든, 적어도 이 책의 원제목은 <전쟁과 영웅>이 아니라는 거다. 이 제목은 번역되면서 국내 출판사가 붙인 것으로 보이는데, 불행히도 <전쟁과 영웅>이라는 키워드로 묶을만한 내용은 겨우 두어 개의 장에 불과하다.

하긴 이 책에 실린 16 개의 꼭지들을 하나의 키워드로 설명하기는 좀 애매하긴 하다. 이들을 한 권의 책으로 경계 짓는 기준이 주제가 아닌 컨셉(?)인 탓이다. 각 장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유명한(?) 사진을 화두로 삼아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 나간다. 사건의 성격이 제각기 다른 만큼 초점을 맞추는 부분도 제각각이다. 때로는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기도 하고, 때로는 사진 속 인물들의 후일담을 쫓기도 하며, 때로는 사진에 담긴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기도 한다. 때문에 나처럼 제목에 낚여 [유황섬에 성조기를 꽂은 가짜 영웅들]과 같은 내용을 기대했다간 다소 어리둥절 해지기 쉽상이다. 아무래도 전체적으로 봤을 때 책보다는 방송, 그것도 시리즈물에 더 적합한 컨셉으로 보인다.

덕분에, 이 책에서 무엇을 읽어내느냐는 독자마다 크게 다를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느슨한 역사 다큐멘터리이니 뒷담화 읽듯 재미로 읽어 나가도 무방할 것이고, 필이 꽃히는 특정 에피소드를 파고 들어도 좋겠다. 아니면 이 참에 (맥은 좀 빠지지만) 책의 컨셉에 맞춰 '사진과 진실' 이라는 주제를 따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 책에 실린 경우들만 보더라도 사진의 역할은 극과 극을 오간다. [사이공의 처형 집행인]이나 [벌거벗은 베트남 소녀] 와 같은 사진들은 사람들이 체감하지 못했던 전쟁의 참혹성을 각인시켜 반전 여론을 확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고, 거꾸로 [유황섬에 성조기를 꽂은 가짜 영웅들] 처럼 가짜 진실을 유포해 전쟁으로 국민들을 동원하고자 하는 국가의 상징 조작에 이용되기도 한다. 사진이 있는 그대로의 사건을 기록한다는 통념에 비추어 봤을 때, 이러한 다면성은 흥미를 돋군다.

Vietnam.gif
미군의 네이팜탄 폭격에 놀라 도망치는 베트남 소녀
책에서는 이 때의 화상으로 지금까지 고통받고 있는, 이제는 중년의 여인이 된 이 소녀를 인터뷰한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사진은 피사체에 반사된 빛을 렌즈를 통해 모아서 필름 혹은 다른 형태의 매체에 기록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이 물리적 과정은 너무나 즉각적이고 자명해서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어 보인다. 사진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한다는 믿음의 주된 근거도 여기에 있다. 물론 사진의 역사를 보면 종종 조작이 사례들이 등장한다. 가짜 피사체를 모델로 세우고 고의적으로 흐릿하게 찍은 고전적인 사례부터 시작해서 오늘날의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의 산물까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낸 사례들은 적지 않게 발견된다. 하지만 이러한 명백한 조작의 사례들도 사진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조작은 정황 증거나 양심 선언 등으로 조작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런 사례들은 사진의 신뢰성을 오히려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최소한 조작한 사진만 아니면, 사진이 보여주는 것이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패한 조작이 사진이 보여주는 진실이라는 문제를 진짜냐 가짜냐의 문제로 단순화시킨 셈이다.

허나, [유황섬에 성조기를 꽂은 가짜 영웅들]은 그러한 믿음을 뒤엎는, 진짜냐 가짜냐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조작의 사례를 보여준다. 이 경우 사진 자체는 아무런 변형을 겪지도, 연출해낸 장면을 찍은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사진이 무엇을 보여주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보여주지 "않는"가이다. 문자와 대비되는 사진의 시각적 선명성은 사람들의 시선을 오직 보여지는 피사체로만 집중시킨다. 마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 것"이라는 요구에 코끼리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사진은 사진에 찍힌 피사체로 자연스럽게 주제를 한정짓는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진은 세 가지 차원에서 극도로 제한적인 정보만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사진은 첫째, 순간을 기록함으로써 전후의 맥락을 생략하며, 둘째, 프레임 밖의 모든 것을 생략하고, 셋째, 프레임에는 담겼어도 공개되지 않는 모든 사진들을 생략한다.

즉, 우리가 보는 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현상의 반영이 아니라,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고도의 판단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 판단은 종종 미학적인 기준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규정하는 의지의 산물이다. 결국 문제는 사진이 객관적이냐 주관적이냐가 아니다. 사진은 그 성격상 주관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결국 우리는 사진이 "어떻게" 주관적이냐의 문제로 접근을 해야한다. 사진을 그 자체로만 평가할 수 없고,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는지를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진실의 전달이 아닌 다른 목적이 개입된 사진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역사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유황섬에 성조기를 꽂은 가짜 영웅들] 사례에서는 국가가, 우리의 현실에서는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수구 언론이 그 사례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joongang.jpg
8일자 <중앙일보> 2면. ⓒ중앙일보

결국 사진의 진실이라는 문제도 윤리의 문제로 돌아간다.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로부터 자동적으로 획득되는 진실이란 없다. 여러 사례가 보여주듯 사진 또한 주관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사진을 통해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역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어떤 제도적인 장치로 보장될 수 있는 성질이라기 보다는 사진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주체의 윤리 의식을 강화할 때 비로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을 촬영하는 사진가의 윤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진을 보도하고 유통하는 언론의 도덕성은 더 많이 강조되어야 할 부분이다. 부도덕한 정권의 언론 장악 기도를 막아야 하는 이유도, 도덕적으로 건강한 언론을 키워야 할 이유도 마찬가지의 인식에서 출발한다.

역사의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라는 낙관론에 기대기엔 돌아가야 할 길이 너무 멀다.

TrackBack

TrackBack URL for this entry:
http://www.turnleft.org/cgi/mt/mt-tb.cgi/1560

Comments (2)

chae eun:

뭔가 연락하려고 들어왔었는데..
방명록도 없고 어디다 댓글을 달까 고민하다 몇번이나 들락거림.

방명록은 싫으세요?? ^^

원재 오빠, 나 드뎌 미국에 학회 갑니다요. 9월에.
근데 시애틀은 아니야 ㅠㅠ
오렌지 카운티 뉴포트비치.
학회 갔다가 LA 에 잠깐 머무르게 될 듯. 얼굴 보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연락해야 될 것 같아서. 그 때 시애틀 ISCAS에 갔어야 했는데!

근데 혹시 현주랑은 어떻게 연락해야 되는지 알아요?

수띵:

방명록.. 음.. 그거 만들어놔 봤자 스팸글들만 그득해서.. -_-;

현주 연락처는 지금 없고, 집에 가서 찾아봐야해. 최근에 전화기를 바꿔서;; 이따가 적당한 시간에 전화할테니, 이상한 번호 뜨더라도 받으렴 -_-+

Post a comment

About

This page contains a single entry from the blog posted on August 3, 2008 9:13 PM.

The previous post in this blog was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

The next post in this blog is 나쁜 사마리아인들.

Many more can be found on the main index page or by looking through the arch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