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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 레이먼드 카버 지음/김연수 옮김/문학동네/12000원
나는 책을 통해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경험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지식, 내가 겪지 않은 삶의 희로애락을 나는 책이라는 창을 통해 받아들인다. 그래서 나는 책은 바깥 세계로의 통로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책 속에서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책에 담긴 지식과 사물과 타인의 삶에 비친 나라는 존재의 한 조각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건 나만의 경험은 아닐거다. 같은 텍스트를 읽고도 저마다 다른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까닭은 책 속에서 찾게 되는 저마다의 조각이 다르기 때문일테니. 어쩌면, 책을 읽는다는 건 나 자신을 읽는 행위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이 책 <대성당>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두려움'이다.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으로 파산하고, 그래서 가족으로부터도 멀어져 알코올 중독에 빠진 삶의 모습들은 내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부유한 삶에 대한 희망은 일종의 판타지일 뿐, 어떤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다르다. 실패한 삶은 약간의 불운만 겹쳐도 충분히 내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태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나만의 두려움, 악몽은 아닐테다. 스트레스와 과로에 시달리면서도 직장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두려움이며, 본질적으로 이 자본주의 사회가 사람들을 끊임없이 노동시장으로, 소외된 노동으로 강제하는 기본 장치이기도 하니까.
그걸 안다고 달라지는건 없다. 아니, 사실 알면서도 달리기를 멈출 수 없다는게 가장 큰 비극이다. 팍팍한 현실에 돌파구가 없다는 절망감과 두려움은 세상에 대한 냉소와 타인에 대한 경계, 적대감이라는 반응으로 이어진다. 그게 힘 없는 자신을 지켜낼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의 동구 아버지가 동구에게 늘상 강조하듯 "가드 올리고 상대방 주시하고" 사는게 삶의 유일한 지혜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책을 읽으면서 발견한 나도,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세상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안이 되더라. 책을 읽는 동안, 마치 내 몸 안의 독소가 빠져나가듯 가슴 속 덩어리 하나가 슬그머니 풀리는 것 같더라. 통쾌한 사건도 없고, 눈물 쏙 빼 놓는 신파도 없다. 그저 삶의 흐름에 휩쓸려 맥없이 흔들리는 부초 같은 삶들만 있을 뿐이다. 앞서 말했던,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는 그런 남루한 삶 말이다. 그런데, 그 소설들을 조용히 읽어 나가다 보면 오히려 어떤 안도감이, 마치 한참 운 후의 후련함 같은 차분한 평화가 찾아온다. 그건, 두렵다고 움츠러 들지 말라고, 적의로 가득찬 것처럼 보이는 저 사람도 너처럼 그저 세상이 두려운 또 한 명의 외로운 이일 뿐이라고 속삭여주는 카버의 목소리 덕이다.
그랬다. 퉁명스럽고 불친절하고, 때로는 공격적이기까지 한 사람들이 있다. 저 사람은 나에게 왜 이럴까 싶어 짜증이 나고, 심지어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다. 그래서 세상살이가 힘겹다고 느껴지는 날이 있다. 하지만, 그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그 사람에게도 내가 힘든 세상살이에 얹혀진 또 하나의 짐 같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적대감이라는 가면을 벗고 마주하면 그들의 가면 뒤에 숨겨진 지친 얼굴과, 그 지친 얼굴이 품은 갓 구운 따뜻한 롤빵 같은 가슴을 만날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희망도 생겨난다.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의 빵집 주인처럼 말이다.
나는 아마도 책의 표제작인 [대성당]의 주인공 같은 사람일게다. 세상에 대해 냉소적이고 인생을 알만큼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가까운 사람들과도 온전히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 그런 나에게 카버의 소설은 주인공을 찾아온 맹인 같은 존재다. 소설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목소리는 내가 그저 머리 속으로만 안다고 생각했던 세상을 함께 그려주는, 인도해주는 손이 되어준다. 책을 덮고 눈을 감으면 그 손길이 느껴진다. 세상을 다시 그리는 내 손 위에 올려진 투박하지만 따뜻한, 그 두터운 온기를 말이다.
올 여름엔 그의 무덤에 들러 하아얀 꽃 한 송이 놓고 와야겠다.
Comments (0)
나도 읽어보고 싶다. ^^
Posted by starmaru | June 14, 2008 10:38 PM
Posted on June 14, 2008 22:38
엉, 읽어보렴. 나보다 한글 책 구하기는 쉽지 않수.. ^^;
Posted by 수띵 | June 16, 2008 2:25 PM
Posted on June 16, 2008 1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