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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도시들

보이지 않는 도시들
- 이탈로 칼비노 지음/이현경 엮음/민음사/7500원

쿠빌라이 칸이 묻는다. 나의 제국은 실재하는가?

조금 어울리지 않지만, 나는 문득 어린 시절 TV에서 종종 보았던 도날드 덕 만화가 떠올렸다. 금고에 가득 쌓인 금화 속을 헤엄치는 도날드 덕의 모습은 쿠빌라이 칸의 고뇌와 정반대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도날드 덕의 소유는 즉물적이다. 그의 소유는 숫자나 상징이 아닌 금고 속의 금화들로 실체화되어 있고, 도날드 덕은 그 속을 헤엄치며 금화 하나하나를 (문자 그대로) 느낀다. 반면, 쿠빌라이 칸은 광대한 제국을 소유하고 있지만, 정작 칸 자신은 그 제국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다. 자신이 보는 것은 오직 자신이 살고 있는 제국의 수도와 방문해 본 몇몇 도시들일 뿐, 제국은 지도상의 표식과 한번도 가 본 적도 없는 도시들에서 보내오는 조공들로만 확인될 뿐이다. 그렇다면 칸은 자신의 제국이 실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인식에 대한 철학적 질문은 언제나 우리를 당혹케 하지만, 그 중 가장 고약한 것은 인식에 대한 질문은 곧 인식하는 자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존재는 오롯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의 관계를 통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제국의 실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은, 칸이 스스로가 칸임을 확신할 수 없음을 뜻한다. 칸의 고민도 여기에 맞닿아 있었을 것이다. 하여, 칸이 마르코 폴로에게 그대가 여행한 도시의 모습을 이야기해 달라고 했을 때, 칸이 듣고 싶었던 것은 애초에 아름답거나 신기한 도시의 풍광이 아니었으리라. 칸의 사유는 이미 소유의 굴레를 넘어 자아와 인생, 그리고 세계를 넘나들며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고 있지 않았을까.

이에 화답하여 마르코 폴로가 들려주는 도시 이야기도, 따라서 제국의 도시에 대한 기행문이 아니다. 이야기 속의 도시들은 과연 실제 제국의 도시들이기는 할까? 모른다. 그러나, 이 도시들은 우리에게 낯설면서도 친숙하다. 우리는 이 도시들에 가 본 적도, 심지어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지만, 동시에 마르코 폴로가, 아니 마르코 폴로의 입을 빌린 작가가 들려주는 도시들의 이야기는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도시의 이야기라고 해도 틀릴 것이 없어 보인다. 모든 도시란 결국 인간의 거주지이며, 인간이란 존재의 근본적 문제들에 대한 응답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책 속의 도시들이 기억, 욕망, 기호, 교환, 하늘, 죽음 등의 키워드들로 묶여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조금 과장을 섞자면,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처럼 이 짤막짤막한 하나하나의 도시 이야기들은 우리 인생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날 것 그대로의 현실에서는 은폐되고 모호해져 잘 보이지 않는 삶의 면면들은,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찬 이 세계에서는 보다 날카롭게, 그러나 훨씬 풍부하게 드러난다. 그러니, 어찌 이 아름다운 언어와 심오한 상징들로 가득한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편 한편의 이야기들은 짧지만, 그 여운은 마치 향기처럼 오래도록 남는다.

네루다가 우편배달부 마리오에게 가르쳤듯, 시는 메타포이다. 이 책 <보이지 않는 도시들>도 한 편의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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