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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008 Archives

February 27, 2008

보이지 않는 도시들

보이지 않는 도시들
- 이탈로 칼비노 지음/이현경 엮음/민음사/7500원

쿠빌라이 칸이 묻는다. 나의 제국은 실재하는가?

조금 어울리지 않지만, 나는 문득 어린 시절 TV에서 종종 보았던 도날드 덕 만화가 떠올렸다. 금고에 가득 쌓인 금화 속을 헤엄치는 도날드 덕의 모습은 쿠빌라이 칸의 고뇌와 정반대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도날드 덕의 소유는 즉물적이다. 그의 소유는 숫자나 상징이 아닌 금고 속의 금화들로 실체화되어 있고, 도날드 덕은 그 속을 헤엄치며 금화 하나하나를 (문자 그대로) 느낀다. 반면, 쿠빌라이 칸은 광대한 제국을 소유하고 있지만, 정작 칸 자신은 그 제국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다. 자신이 보는 것은 오직 자신이 살고 있는 제국의 수도와 방문해 본 몇몇 도시들일 뿐, 제국은 지도상의 표식과 한번도 가 본 적도 없는 도시들에서 보내오는 조공들로만 확인될 뿐이다. 그렇다면 칸은 자신의 제국이 실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인식에 대한 철학적 질문은 언제나 우리를 당혹케 하지만, 그 중 가장 고약한 것은 인식에 대한 질문은 곧 인식하는 자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존재는 오롯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의 관계를 통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제국의 실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은, 칸이 스스로가 칸임을 확신할 수 없음을 뜻한다. 칸의 고민도 여기에 맞닿아 있었을 것이다. 하여, 칸이 마르코 폴로에게 그대가 여행한 도시의 모습을 이야기해 달라고 했을 때, 칸이 듣고 싶었던 것은 애초에 아름답거나 신기한 도시의 풍광이 아니었으리라. 칸의 사유는 이미 소유의 굴레를 넘어 자아와 인생, 그리고 세계를 넘나들며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고 있지 않았을까.

이에 화답하여 마르코 폴로가 들려주는 도시 이야기도, 따라서 제국의 도시에 대한 기행문이 아니다. 이야기 속의 도시들은 과연 실제 제국의 도시들이기는 할까? 모른다. 그러나, 이 도시들은 우리에게 낯설면서도 친숙하다. 우리는 이 도시들에 가 본 적도, 심지어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지만, 동시에 마르코 폴로가, 아니 마르코 폴로의 입을 빌린 작가가 들려주는 도시들의 이야기는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도시의 이야기라고 해도 틀릴 것이 없어 보인다. 모든 도시란 결국 인간의 거주지이며, 인간이란 존재의 근본적 문제들에 대한 응답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책 속의 도시들이 기억, 욕망, 기호, 교환, 하늘, 죽음 등의 키워드들로 묶여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조금 과장을 섞자면,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처럼 이 짤막짤막한 하나하나의 도시 이야기들은 우리 인생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날 것 그대로의 현실에서는 은폐되고 모호해져 잘 보이지 않는 삶의 면면들은,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찬 이 세계에서는 보다 날카롭게, 그러나 훨씬 풍부하게 드러난다. 그러니, 어찌 이 아름다운 언어와 심오한 상징들로 가득한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편 한편의 이야기들은 짧지만, 그 여운은 마치 향기처럼 오래도록 남는다.

네루다가 우편배달부 마리오에게 가르쳤듯, 시는 메타포이다. 이 책 <보이지 않는 도시들>도 한 편의 시다.

February 29, 2008

바둑의 발견

바둑의 발견 : 현대 바둑의 이해
- 문용직 지음 / 부키 / 13000원

이 책은 바둑책이다.

바둑의 '바'자도 모르는 내가 이 책을 집어든 것은 굳이 바둑을 몰라도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데 도움이 된다는 어느 소개글 때문이었다.(소개글을 쓴 이에게 따지고도 싶은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난다 -_-)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위의 저 문장, 이 책은 바둑책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바둑이라는 게임의 규칙과 용어들을 알고, 그것도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한 정도로 바둑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상당한 고역이다.

물론, 바둑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이 책은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 될 것이다. 일단, 이 책은 다른 바둑책과는 확연히 다르다. 바둑책이라면 응당 기대하는 룰 설명이나 사활, 정석 등의 내용은 전혀 없다. 대신, 프로 5단 기사이자 정치학 박사인 저자는 바둑이라는 놀이를 자신의 전공과 접목시켜 이론적 측면에서 고찰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바둑 이론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패러다임이라는 과학철학 개념을 사용하고, 바둑의 여러 규칙이 가지는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통계적 기법과 게임 이론을 적용한다. 자신이 즐기던 게임이 이토록 풍부한 맥락에서 접근될 수 있음을 알게 될 때 애호가들이 느꼈을 즐거움은 충분히 이해되는 바이다.

하지만, 그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바둑 문외한이 거쳐야 할 장벽은 지나치게 높다. 기초적인 용어(덤, 수상전, 두칸협공, 날일자로 받기 등)에 대한 해설이 없어 수많은 인터넷 검색을 거쳐야 했음은 물론이고, 내용을 따라가기 위해서 바둑 기보를 계속 읽어야 한다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예를 들어, 저자의 설명은 "1에서 14까지의 수순은 당연하고 그 후 A와 B 사이에서 선택이 중요하다"라는 식이데, 1에서 14까지가 왜 당연한 수순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A와 B 사이의 선택이 어떤 의미인지 와 닿지 않음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차라리, 과학철학의 제 개념들을 알고 싶은 이들은 <현대의 과학철학>과 같은 개설서과 훨씬 유용할 것이고, 게임이론이나 기타 과학적 방법론들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것이다. 이 책의 유용성은 오직 한 가지 전제, 당신이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전체 하에서만 성립된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

이 책은 바둑책이다. 그러나, 아주 훌륭한 바둑책이라는데는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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