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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31, 2008

인간에 대한 오해

인간에 대한 오해
-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김동광 옮김/사회평론/25000원

성폭력에 관련한 토론을 보다보면, 가해 남성들이 성욕을 억제 못하는 까닭을 진화론적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주장을 종종 접하게 된다. 과거, 인류가 아직 생존을 위해 투쟁하던 당시, 종족 번식을 유도하기 위해 남성의 유전자는 성욕을 강화하는 식으로 진화했고, 여성은 남성에게 자신과 아이의 생활을 책임지도록 하기 위해 방어적으로 한 남자에게 집착하는 식으로 진화했다는 식의 설명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설명들은 '그럴듯하게' 들릴 수는 있어도 증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또한 생물학자들의 간단한 반론(예컨데, 여전히 대부분의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있지만, 강간은 인간에게만 나타난다는 사실)에도 그 설득력을 잃는다. 하지만 여전히 이 어설픈 진화론은 남성의 성욕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이들의 단골 소재로 차용되고 있다.

여기서 질문 하나. 왜 하필이면 '진화론'일까. 이런 류의 주장에서 '과학'이 동원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 인류 역사에서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과학 이전의 인기 레퍼토리는 '신의 섭리'였다. 진화론이든 신의 섭리든, 공통점은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외부의 권위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이성의 시대에 '과학'만큼 확실한 권위가 또 있을까. 허나 이들이 호명하는 '과학'은 엄밀한 의미의 과학이 아니다. '신의 섭리'가 입증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듯, 이들 '과학' 역시 입증할 수 없고 단지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야기일 뿐이다.

예를 들어, 손을 따서 체기를 내리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실용적인 지식은 그 자체로 요긴하지만, 이것이 나쁜 피가 질병의 근원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앞서의 체한 사례 덕에 이러한 주장은 그럴 듯하게 들릴 수 있지만, 과학은 유추가 아닌 엄밀한 인과관계의 증명 속에서만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를 뽑는 치료 방법은 한 시대를 풍미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이비 과학/의학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처럼 "옳은 것처럼 '생각되지만' 입증할 수 없는 주장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p. 269)"

인종차별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의 시도들이 반복되었다. 애초에 신이 인간을 불평등하게 창조하였다는 주장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면, 과학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인종차별을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속속 나타난다. 골상학이나 두개계측학과 같은 초기적 시도들부터 시작해 IQ 테스트와 같은 좀 더 고상한 이론들에 이르기까지, 인종주의는 지속적으로 과학의 이름을 호명해 왔다. 이들이 사용한 과학적 방법의 핵심은 인간의 측정(Measure)과 그 자료의 분석(Analysis)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굴드는 이 책 [The Mismeasure of Man] 을 통해 이들 이론들이 측정과 분석 모두에서 어떤 오류를 저질렀는지를 밝혀낸다.

우선 골상학과 두개계측학은 잘못된 측정(Mismeasure)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두뇌용적을 측정한다던가 아니면 신체의 여러 치수들을 측정하여 이를 근거로 인종간의 우열을 논하는 이들 이론들은, 사람들에게 숫자가 가지는 권위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눈을 어지럽히는 숫자들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자료들 사이의 비교를 통해 이상한 점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실험도구의 변화로 동일한 대상의 측정치가 달라지는 것은, 오차가 큰 실험도구를 썼을 때 실험자가 선입견에 따라 실험을 진행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때로는 원하는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 자료를 의도적으로 결과 산출 과정에서 제외하기도 하고, 터무니없이 적은 표본에서 산출한 평균을 해당 인종 전체의 평균값으로 제시하는 등, 이들 측정된 자료의 신뢰수준은 '과학'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이다.

아전인수격인 자료 해석은 더 가관이다. 대표적인 두개계측학자인 폴 브로카는 자신이 속한 인종(프랑스인)의 두뇌 용적이 독일인들보다 작은 사실을 변호하기 위해, 뇌의 크기가 신장 및 나이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브로카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미이라에서 측정한 작은 두뇌 용적을 열등함의 증거라고 주장할 때는, 그들의 작은 신장이나 사망 나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들 이론들의 가장 큰 난점은 인과관계의 증명 없이 자의적으로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예컨데 자신들이 가진 샘플에서 전두엽의 크기가 백인종 > 황인종 > 흑인종의 순서로 나타났을 때 이들은 가차없이 이것이 백인종의 우수성을 증명한다고 선언했는데, 후에 새로운 샘플에서 이 관계를 뒤집는 수치가 나타나면 이들은 전두엽 크기를 포기하고 다른 기준을 찾아나섰다. 이는 이들 이론들이 그저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수치를 찾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못했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신체적 측정을 통해 인종간의 우열을 가리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능력, 즉 지능을 측정하고자 하는 노력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른바 IQ 테스트의 탄생이다. 애시당초 IQ 테스트는 인간의 지능을 '서열화' 하고자 창안된 테스트는 아니었다. 오히려 IQ 테스트의 창안자 비네는 이 테스트가 학습능력이 극히 떨어지는 아이들을 일찍이 찾아내어 적절한 교육을 통해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결코 사람들을 서열화하여 낙오자들을 배제하고자하는 목적이 아니었음을 강조하였다. 허나 창안자의 이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된다.

비네의 이론은 터먼과 브리검 등에 의해 미국에 소개되면서 표준화된 문항들을 통해 지능을 측정하는 현대식 IQ 테스트의 형태를 갖춘다. 그러나 굴드가 밝혀내듯 이들이 실행한 IQ 테스트는 매우 조잡하고 사실상 엉터리로 진행된 실험이었는데, 문제는 이 테스트의 결과를 인종주의자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1920년대 미국은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IQ 테스트를 수행한 결과 낮은 수치가 나왔음을 근거로(수십일간 배를 타고 미국에 갓 도착한 비영어권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IQ 테스트를 수행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오겠는가) 이주민들이 미국 전체의 평균 지능을 떨어뜨리고 있다며 이민자의 수를 제한하는 이민제한법을 제정하였다. 덕택에 가난과 전쟁으로부터 도망친 수많은 유럽 이민자들이 다시 그들의 고향으로 쫓겨나 비참한 삶을 살거나 죽음을 맞아야 했음은 물론이다. 또한 정신박약인들이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는 "단종법"이 제정되어 수십만의 정신박약인들이 강제로 불임수술을 받기도 하였다. 잘못된 믿음이 가져온 또 다른 비극의 역사가 IQ 테스트로 인해 초래된 것이다.

"파괴에 이르는 길은 종종 간접적이지만, 사상은 총이나 폭탄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p. 382)"

'지능'을 기준으로 인간 본연의 권리를 말살한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과연 이 '지능'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냐는 점이다. 터먼과 브리검, 그리고 후에 일반지능 g를 창안한 스피어맨과 버트 등 IQ 테스트 옹호론자들의 공통점은 지능이 고정불변하며, 하나의 수치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이들을 통칭하여 '생물학적(유전적) 결정론자'라고 부를 수 있는데, 굴드는 이들 생물학적 결정론자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논파해 나가면서 '지능'이 결코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특징이 아님을 밝혀낸다. 이른바 '물화(物化)'의 오류이다. 또한 이들 이론들이 생물학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을 구분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도 갖지 못한채 성급하게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비약하고 있음도 굴드가 비판하는 주요한 오류이다.

스피어맨이 발견한 일반지능 g 는 IQ 테스트에서 수행된 다양한 테스트들을 관통하여 강한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어떤 수치를 지칭한다. 스피어맨은 요인분석 기법의 복잡한 계산을 통해 이 g 값을 산출한 후, 이것이 사람의 여러 정신적 능력들을 지배하는 '일반지능'을 실제로 측정한 값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굴드는 요인분석의 결과값은 분석에 도움이 되는 편의적 수치지, 결코 어떤 실체가 아님을 지적한다. 마치 우리가 '속도'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 생활에서 편의적으로 사용되는 수치일 뿐 어떤 실체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상대성 이론의 세계에서 사물의 속도는 간단히 사라져버린다. 일반지능도 마찬가지다. 요인축을 회전하면 일반지능은 사라지고 다른 형태의 해석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실체가 없는 값에 '지능'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여 실제 존재하는 무엇을 측정한 것처럼 착각한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IQ 인 셈이다. 따라서 지능이 생물학적으로 고정적이라는 주장은 그 근거를 잃게 된다.

그러나 IQ의 옹호자들은 IQ 테스트의 결과를 끊임없이 확대 해석했다. 상류층 아이들의 IQ 테스트 결과가 높게 나온다는 사실에서 그들은 지능이 유전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낸다.(부모의 IQ는 재 보지도 않고!!) 좋은 환경은 아이들 부모가 지능이 높다는 증거이며, 그렇기 때문에 높은 지능을 유전받은 아이도 지능이 높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거꾸로, 좋은 환경이 아이들의 지적 능력을 높였다는 가설은 이들의 머리에 아예 떠오르지도 않았다. 이는 생물학적 결정론자들이 실험의 결과 생물학적 결정론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먼저 생물학적 결정론의 입장에 서서 실험결과를 해석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아닌게 아니라, 골상학이건 두개계측학이건 IQ 테스트건, 굴드가 밝혀내는 이들 이론들의 일관된 오류는 냉정한 관찰자의 눈조차 흐리게하는 선입견에 의한 왜곡이다. 원하는 결론을 위해 자료 자체까지 조작하는 조악한 시도들은 사이비 과학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날카로운 관찰력과 엄밀한 과학적 과정을 강조한 연구자조차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무런 의심 없이 인종주의적 결론으로 비약해 버리는 과정을 보고 있자면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회의마저 들 지경이다. 한마디로, 이 모든 사례들은 어떻게 '의도'가 '원하는 결론'을 향해 진실을 왜곡하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블랙홀의 존재가 빛의 진로마저 바꾸어 놓는 것처럼, 인종주의라는 사회적 통념의 힘은 이처럼 가장 객관적이어야 할, 그리고 객관적이라고 믿어지는 과학적 탐구마저 왜곡시켰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아무리 전문지식으로 무장했더라도 결국 과학자들도 이 사회의 평범한 한 명의 구성원에 불과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곱씹어야 할지 모르겠다. 다시 말해, 이들 이론들에서 나타나는 오류들은 사회적 통념과 선입견의 강한 요구가 과학자라는 사회 구성원을 통해 이론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들 이론들이 발표 당시 상당한 대중적 반향을 일으켰음은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이러한 이론들이 각광을 받은 것이 그 과학적 엄밀성과 획기적인 결과물 때문이 아니었다. 거꾸로 이들 이론들은 대중들이 이미 공유하고 있었던 선입견들을 확인해주는 일견 '과학적인'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인종주의'라는 비난과 마음 한구석의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을 제시했을 뿐이다. 자신이 속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지배하는건 그저 인간이 '원래' 만들어진대로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예들을 밟고 올라서서도 당당하게 "나는 관대하다"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쉽게 드러날 오류들이 묻혔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대중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결론을 얻은 이상, 그 과정을 짚어보는 것을 무의미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대중용 출판물에서 쉽게 보 수 있는 버트의 주장이나 자료에 분명한 잘못이나 의심스러운 주장이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지능에 대한 그의 주장을 믿었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이것은 객관성이라는 가면을 쓴 공유된 도그마에 대해 무언가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닐까? (p. 446)

사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결론'이 어떻게 진실을 왜곡할 수 있는지 너무나도 소상히 보아오지 않았던가. 한국 사회를 휩쓸었던 소위 '황우석 신드롬'에서 대중들이 원했던 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세계 최초'라는 허위 의식과 '국익'이라는 이름의 얄팍한 주판 굴림이 그들을 지배했을 뿐이다. 때문에 거짓 가면이 거의 벗겨진 순간에조차 사람들은 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들을 외부 세력의 불순한 음해 정도로 치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맹목적 믿음이 강했던만큼, 진실이 밝혀졌을 때 우리 사회는 더 큰 정신적 폐허를 견뎌야만 했다. 이 역시 공유된 도그마에 대해 무언가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닐까?

또 하나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과연 인간이 원래 평등하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생각하는걸까, 아니면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만약, 정말로 만약, 사람들 사이에 유전적 차이로 우열이 존재하는 것이 증명된다면 그 순간 우리는 평등이라는 가치를 집어던져야 하는 것일까. 내 대답은 아니다 이다. 생물계가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른다고 해서 인간 사회도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를 까닭은 없다. 만약 약자를 보호하고 다 같이 공존을 도모하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결정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 과학은 결코 우리 삶의, 우리 사회의 판관이 될 수 없다. 과학에서 답을 찾으려 했던 것은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인간은 평등한가'라는 사실관계의 질문이 아니라, '인간은 평등해야 하는가'라는, 우리가 추구할 가치를 묻는 질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 과학은 우리에게 지식을 줄 수는 있지만 답을 줄 수는 없다. 과학이 인간을 측정할 때, 그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가 다양성에 대해 배우는 것은 단지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기 위함이다. (p. 616)" 는 굴드의 조언을 다시 한 번 마음 속에 새기는 것이다.


ps. 원서와 비교하지 않아서 전체적인 번역의 정확성은 알 수 없지만, 책 표지의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잘못된 척도에 대한 비판" 이라는 문구는 어처구니가 없다. 과연 역자가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번역한게 맞을까? 출판사 쪽의 실수이길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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