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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11, 2007

기생수

기생수 애장판 1 ~ 8
- 이와키 히토시 지음 / 학산문화사 / 5500원(각권)

내가 이 만화를 처음 본건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신림동 어느 지하 만화방에서 라면을 후루룩거리며 였던걸로 기억한다. 정확한 장소나 시간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만화방에 어울리는 나른함으로 책을 뒤적이던 내게 이 만화가 안겨주었던 예상치못한 그 얼얼한 충격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덕분에, 그 후로 1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 만화는 내 추천 도서 목록에서 절대 빠지지 않고 있다.

그럼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만화에 이토록 높은 점수를 주게 만든 것일까? 10여년만에 다시 읽는 <기생수>에서는 확실히 처음의 신선한 충격보다는 여러가지 다른 측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원래 그림체가 특별히 멋지거나 작화 수준이 아주 높은 만화는 아니었다. 박진감 있는 전개와 스토리의 완결성은 훌륭한 수준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만화에 비해 아주 독보적이라고 할 정도는 못된다. 외부생물이 사람의 몸을 차지해 조종한다는 설정도 SF에서 워낙 애용(?)되는 소재라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여전히 얼얼하다.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유에서 한 발짝 더 내딛어 절벽을 향해가는 아찔함은.

무슨 소리냐고? 사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해보면, 우리는 결론짓기 어려운 질문은 대충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는걸 깨닫게 된다. 대표적으로, 나는 우리가 어떤 권리로 먹기 위해 동물들을 사육하고 살해하는가를 묻는 채식주의자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동물들도 죽고 싶어하지 않으며 하물며 인간의 먹거리가 되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슨 권리로 그들의 생명을 우리의 먹거리로 재단하는가. 물론 반대의 의견도 있다. 육식 자체가 죄는 아니다. 인간도 생명이고 먹고 먹히는 생명의 순환고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호랑이에게 토끼의 생명을 재단할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이는 없다. 어느 쪽이 더 옳은지, 나는 아직 그 답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문제는 무지보다는 (다소 의식적인) 망각에 있다. 나에게 인간이 동물들의 생명을 재단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염치는 차마 없다. 그러나, 채식주의자가 되기엔 너무나 고기 매니아인 나로서는 이 양쪽의 의견 사이에서 답을 찾기보다는 질문 자체를 잊는 쪽을 택한다. 어차피 양쪽 사이에 권력을 가진 쪽은 인간이고, 나는 침묵함으로써 권력을 가진 쪽에 슬쩍 무임승차를 하는 셈이다. 이게 권력관계가 동작하는 방식이며, 옹호와 침묵은 모두 권력관계를 떠받치는 양대 축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적극적인 옹호이던 수동적인 침묵이던 권력관계에 따른 일방성을 인정하는 당신은, 만약 이 권력관계가 뒤집힌다면 얌전히 희생되는 쪽을 택하겠는가? 혹은, 죽고 싶지 않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욕구에도 당신에겐 동물들보다 우월한 무언가가 있다고 주장하겠는가? 만화 <기생수>가 건드리는건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가 권력관계의 우위에 서 있기 때문에 외면할 수 있었던 질문을 우리 눈 앞에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순수한 가정으로 '상상'해야 하는 문제를 만화라는 형식을 통해 생생하게 우리에게 제시해준다는 장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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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존재의 의미를 깊이 고민하는 기생수 "타무라 료코"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날 문득 누군가 인간의 수가 줄어든다면 더 많은 나무가 살아남고 지구가 더 깨끗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하늘에서 밤송이 같은 것이 떨어지더니 그 안에서 어떤 생물이 기어나온다. 이 생물은 인간의 몸에 침투해 뇌를 포함한 머리 부분을 자신의 조직으로 대체함으로써 인간의 몸을 차지하게 된다. 몸은 인간이되 머리는 자유자재로 변형하는, 그래서 평소에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 언제든 강력한 살상무기로 변할 수 있는 머리를 가진 기생수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미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집을 짓는 방법을 아는 것처럼, 이들에게도 누군가의 명령과도 같은 본능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종」을 잡아먹어라" 라는 명령이. 이들은 이 명령을 충실히 따른다.

인간을 잡아먹는 기생수. 겉으로는 인간처럼 보인다는 설정은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장치일 뿐, 중요한건 인간보다 강하며 인간을 잡아먹는 포식자의 존재를 설정한다는데 있다. 이쯤에서 왕년의 외화 [V]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V]는 (인간을 잡아먹는) 외계인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의 영웅담을 다루면서 적과 아군, 혹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에 치중해 평범한 SF 물 이상의 깊이를 제공해주지 못한다. 반면 <기생수>에서는 포식자로서의 기생수의 위치(vs. 인간)가 포식자로서의 인간의 위치(vs. 동물)와 비교되면서, 양쪽의 입장을 같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과연 기생수들은 없애야만 할 적인가? 그렇다면 인간 역시 동물들에게 마찬가지의 존재 아닐까? 와 질문들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차이를 가능하게 한 건, 주인공 신이치와 기생수의 기묘한 공존 덕분이다. 신이치의 몸에 침입한 기생수(오른손이)는 우연히 신이치의 뇌를 차지하는데 실패하고 그의 오른쪽 팔에 기생하게 된다. 오른팔에 자리잡은 기생수는 인간을 잡아먹을 필요가 없이 신이치의 혈액에서 직접 양분을 흡수해 살아갈 수 있지만, 어쨌거나 숙주인 신이치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신이치로서도 졸지에 오른팔이 사라진데다 훨씬 월등한 힘을 지닌 기생수를 떼어낼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기생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불가피한 공존이야말로 이들 사이의 가장 큰 장점이 된다. 상대를 물리쳐야 할 적으로만 바라보는게 아니라 공존해야할 동반자로 인정하는 순간, 대화가 시작되고, 상대에 대한 이해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화를 보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이해는 사고의 지평을 넓혀준다. 포식자로서의 기생수를 이해한다는건 포식자로서의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이고, 먹히는 입장의 인간을 이해한다는건 먹히는 입장의 동물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해가 문제를 단순화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해는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기 일쑤이다. 허나, 단순한 해법이 정답인 경우는 거의 없다. 양반과 상놈이 동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 그것은 인식의 혁명적인 변화와 함께 사회 제도의 총체적 재구성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것은 복잡한 일이었을지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지 않는가. 인간-동물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이 동물을 잡아먹는 것이 반드시 공존의 원리에 어긋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일방적 관계 역시 답은 아니다. 그 공존의 방식을 찾는 것, 그것이 인간이 지구라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지혜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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