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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브로크백 마운틴
- 애니 프루 지음/조동섭 옮김/미디어 2.0/9800원

바람이 불자 마른 풀들이 몸을 떤다. 건조하게 부서지는 땅에선 모래먼지가 일어 지평선은 마치 연한 황토색 안개가 뒤덮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방을 둘러봐도 움직이는 생명이라곤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 곳이 그저 진공상태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기 속에는 묘한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바위그늘 아래 웅크린 방울뱀, 꼬리를 움찔거리는 전갈, 풀잎 그늘에 도사린 모기떼까지. 이 땅에서 자연은 결코 서로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척박한 환경이 그 안에 살아가는 생명들에게 독기를 불어넣은 까닭이다.

독기를 품은건 인간도 다를 바 없다. 와이오밍. 미 중서부의 이 황량한 지역을 배경으로 작가가 그려내는 인간 군상의 모습은 거의 악다구니에 가깝다. 아버지의 여자와 도망치고 [벌거숭이 소], 로데오에 뼈가 무너지고 [진창],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외딴 해안], 목장 철조망을 끊다가 총에 맞아 죽는 [와이오밍의 주지사들]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악에 받쳐 보인다. 책머리의 짧은 인용구처럼 "이곳보다 더 현실적인 곳은 없다"면, 이 악에 받친 인간 군상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 측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리라.

허나, 황량한 와이오밍의 풍광 속에 벌어지는 이 난투극(?)들은 매끈한 도시가 보여주는 사악함과는 분명 거리가 멀다. 도시의 악이 간교하고 악랄한, 말 그대로 '사악함'의 화신과도 같다면, 이 곳 와이오밍의 그것은 그저 투박하고 직선적이다. 그건,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아귀다툼이 아닌, 순수한 욕망, 본능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탐욕의 결정체로서의 폭식과 배고픔의 해소를 위한 폭식이 똑같지 않은 것처럼, 이들의 악다구니에는 되려 보다 근본적인 순수함마저 느껴지곤 한다. 이 쯤 되면 이들을 '악'이라고 칭하는 것도 부적절해 보인다. 누가 방울뱀의 독을 '악'이라 칭하겠는가. 이것은 인간 그 자체의 한 측면일 뿐이다. 맞다. 그래서, 이곳보다 더 현실적인 곳은 없다.

"와이오밍 단편선집" 정도로 불려야 할 이 단편집에 [브로크백 마운틴]이 표제작이 된 것은 아마 출판사 마케팅의 산물일 것이다. 이안 감독의 동명의 영화 덕에 국내에도 알려진 작가니까. 하지만, 내게는 오히려 [브로크백 마운틴]이 보여주는 미학이 단편집 전체를 관통하는 와이오밍에 대한 작가의 사랑과 그녀가 느끼는 매력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영화에서 보여주는 아름다운 영상미를 말하는게 아니다. 오히려 영화와 대비되어 소설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짧고 간결한 문장 속에서 더 빛을 발하는 투박한 날 것 그대로의 진중한 매력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주인공 에니스는 정말 와이오밍을 닮았다. 한철 목장일로 연명하는 가진 것 없는 카우보이에, 아내에게 이혼당해 홀로 트레일러에 거주하는 이 남자는 이 단편집의 다른 소설 어디에 삽입해도 어색할 것 없어 보인다. 허나, 겉으로 비루해 보이는 이 과묵한 카우보이의 표정 뒤에 감춰진 옛 기억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 행복과 고통의 기억을 함께. 원하는 것만을 얻고 그 반대급부는 떠안으려하지 않는 얄팍함 대신, 에니스의 사랑은 본연의 감정에 충실하면서도 결코 삶의 무게를 피하지 않았다. 하긴, 안전하고 먹기 좋고 예쁜 것만을 취할 수 있다면 그게 과연 인생일까. 모래먼지가 일어나는 들판은 피할 수 없는 우리 삶의 현장이다. 그걸 알기에 우리는 카우보이의 얼굴에 새겨진 굵은 주름과 뽀얗게 먼지가 앉은 낡은 픽업 트럭에서 그 삶의 굴곡을 가늠하며 가슴 먹먹해 하곤 하는 것이다.

책을 덮자 바람이 불었다. 내 마음에도 모래먼지가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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