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번째 이야기
- 다이안 세터필드 지음/이진 옮김/비채/12900원
시작은 좋았다. 데릭 젠슨은 <네 멋대로 써라>에서 푸코의 <감시와 처벌>의 예를 들며 성공적인 글쓰기의 조건 중 하나로 독자를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는 도입부를 들었는데, 이 책에서 비다 윈터 여사의 편지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편지는 주인공을 끌어당겼듯 독자마저 글 속으로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인터뷰 때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내던 소설가가 드디어 밝히는 감춰둔 과거. "진실을 말해주세요" 라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린건 주인공 뿐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초반의 두근거림을 끝까지 이끌고 나가는 힘이 부족했다. 이야기의 얼개 자체는 나쁘지 않았는데, 능숙한 작가의 세밀한 세련됨이 부족하다는 느낌. 장황한 묘사는 입에 착 감긴다기보다는 쓸데없이 화려한 장식을 보는 듯 거추장스러울 때가 많았고, 들쑥날쑥한 챕터 길이 덕에 책을 읽는 독자의 호흡마저 들쑥날쑥해져서 때로는 숨이 차고 때로는 리듬을 놓쳐버리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첫 장편이라는데, 아직은 더 많이 다듬어야 할 것 같다.
그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무난하게 재밌다. 약간의 고풍스러움과, 약간의 음산함, 약간의 미스테리가 뒤섞여 있는데, 읽고 나서 크게 남는게 있다기보다는 그냥 재미로 읽을만한 책이다. 아무래도, 난 좀 더 치열하게 인간이라는 존재를 파고 드는 소설이 좋은데, 이 책은 그런 내 취향에는 좀 말랑말랑하네. 가볍게 머리 식히는 정도로는 훌륭했다. 여름밤 독서로 추천하기에는 좀 부담스러운 분량이라는게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