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rry Potter and the Deathly Hallows | Main | 열세번째 이야기 »

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나카지마 아츠시 지음/명진숙 옮김/다섯수레/8000원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상처입히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남에게 지기 싫어서 온갖 궤변을 끌어다 붙이고 인신공격을 일삼는 것은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한다. 그보다 더 위험한건 정의 혹은 진리라는 이름 하에 남을 심판하려 드는 자들이다. 상대의 잘못이나 결점을 핑계삼아 그들을 몰아붙이고, 종국에는 굴복시켜 그 위에 올라서려는 사람들이 있다. 왜? 정의 구현을 위해서? 아니다. 그들은 정의의 가면을 쓰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라는, 우월하다라는 알량한 자부심을 느끼려는 것 뿐이다. 노력하지 않고 손쉽게. 타인의 상처를 당신의 영광으로 삼아.

중요한건 "왜, 내 말이 틀렸어?" 이게 아니다. 당신의 말은 옳다. 내가 묻고 싶은건, 왜 "당신이" 그 정의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가이다. 내게는 칼날 아래 무릎 꿇고 있는 그들 죄인보다, 당신의 눈에 번들거리는 자아도취의 기운이 더 위험스럽게 느껴진다. 하나 묻자. 세상이 이 모양인건 자기성찰의 부족해서인가, 아니면 단죄가 부족해서인가. 안다. 성찰이라는게 강요할 수는 없는 법, 부득불 차선책으로 법이 존재하고 법의 단죄가 존재한다. 하지만, 남에게 강요할 수 없다면, 왜 먼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까? 넘쳐나는 블로그 글들 속에서 남의 허물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블로그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건 하나의 사회적 병리증상으로 봐야하는게 아닐까?

어느날 호랑이로 변한 <산월기(山月記)>의 이징은 자신이 호랑이로 변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시(詩)로 명성을 얻으려 하면서도 스스로 스승을 찾아가려고도, 친구들과 어울려 절차탁마(切磋琢磨)에 힘쓰려고도 하지 않았다네. 그렇다고 속인들과 어울려 잘 지냈는가 하면 그렇지도 못했다네. (중략) 내가 구슬이 아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애써 노력해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내가 구슬임을 어느 정도 믿었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던 것이라네."

이징은 자신의 이 겁많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렇게 마음 속에 맹수를 키우던 그는 결국 겉모습이 속마음과 어울리도록 변한 것이다. 호랑이는 상처 입은 마음이 괴로워 울부짖지만, 아무도 그의 상처 입은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그저 두려움에 떨며 그를 멀리할 뿐이다.

저마다의 가슴 속에 살고 있는 이 맹수를 떨쳐내지 않고는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만 입히고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당신이 휘두르는 정의의 칼날은 상대만 상처입히는게 아니다. 그런 자신 역시 그저 외로운 호랑이일 뿐인 것을. 굴 속에 웅크려 잠자는 신세이면서도 자신의 시집이 사람들에게 읽히는 꿈을 꾸는 호랑이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보관함에 넣어둔지 오래 된 책들 중에서 내가 왜 이 책을 보관해 뒀는지 기억이 안 나는 책들이 있다. 이 책이 딱 그랬는데, 뭐 어디선가 좋은 소개글을 봤기 때문에 넣어뒀겠지 싶어 지난번 책 주문할 때 같이 주문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존재감이 적어서 다른 책들에 밀려 책장 구석에서 한동안 묻혀 있었다가 문득 지난 주말 나에게 간택된 이유는 단 하나, 두께가 얇다는 것. 한동안 꽤 묵직한 책을 붙잡고 씨름을 했더니 주말 동안 좀 가볍게 머리를 식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표지를 장식하고 있던 이철수 화백의 담백한 그림도 이 선택에 한 몫 했다.

표지의 그림이 실은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였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지만(^^;), 그보다는 짧은 글에 담긴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가 나른하게 흐트러져 있던 내 마음을 화들짝 놀라게했다. 책머리의 신영복 선생님의 추천글부터 심상치가 않았는데, 다소 과잉해설의 혐의가 있어서 읽다 말고 본문으로 바로 뛰어넘긴 했어도 가볍게 읽어서는 안 될 책이라는 암시를 주는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렵지 않은 글임에도 대화 하나하나 곱씹어야 할 정도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들이 나를 맞이했다.

일본 작가의 글이지만, 이 책에 실린 4편의 이야기는 각기 중국 고전 혹은 역사 속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이야기의 얼개나 사건 자체는 이미 작가의 창작물이 아닌 바, 작가가 온전히 심혈을 기울이는건 캐릭터 자체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일이다. 우화의 교훈이나 장대한 서사에 매몰되었던 인물에 조명을 비추니, 드러나는건 인간의 연약하면서도 강인한 내면이다. 삶의 격랑 속에서 끊임없이 번뇌하고 반추하는 인간. 따라서 이들 각기 다른 중/단편에서 일관된 주제는 "인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직접 지은 제목은 아니지만, 책의 제목 <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은 역사라는 틀 안에서 화석화된 인물들을 되살려낸다는 뜻에서 이 4편의 이야기들을 잘 아우르는 제목이라 하겠다.

앞서 언급한 <산월기>의 이징과 <명인전>의 기창, <제자>의 자로, <이능>의 이능, 사마천 등의 인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자기 성찰의 힘이다. 외부에서 원인을 찾기보다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행동의 원인을 찾고자 하면서, 이들 인물들은 삶의 위기를 한 단계 더 높은 자아(自我)로 나아가는 기회로 만든다. 그 인물들의 고뇌를 함께 느끼며 같이 고민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나는 어떠한가라는 질문에 다다르게 된다. 나른한 주말,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이 인물들을 거울 삼아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TrackBack

TrackBack URL for this entry:
http://www.turnleft.org/cgi/mt/mt-tb.cgi/1539

Post a comment

About

This page contains a single entry from the blog posted on September 5, 2007 9:35 AM.

The previous post in this blog was Harry Potter and the Deathly Hallows.

The next post in this blog is 열세번째 이야기.

Many more can be found on the main index page or by looking through the archives.

Powered by
Movable Type 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