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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마음

미안한 마음
- 함민복 지음/풀그림/9500원

올해로 직장 생활 8년차다. 월급쟁이 프로그래머가 수입이래야 뻔하긴 하지만, 그래도 경력이 쌓이고 직급이 높아지면서 수입도 같이 늘었다. 수입이 늘었다는건 단지 월급통장에 찍히는 급여액이 늘었다는 산술적인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점점 소비에 능숙해지고, 또 그걸 당연하게 여긴다.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을 사고(책도 그렇고), 더 맛난 음식을 찾고, 더 맵시나는 옷을 입으려 하는게 그 증거이다. 어김없이,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물론 소비가 죄악은 아니다. 인간은 단지 빵만으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가지는 비가역적 속성이다. 아이러니 같지만 가진게 많을수록 버리기가 힘들어진다. 지금보다 '덜' 벌었을 때 사는게 힘들었냐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런데도 지금 예전만큼 벌어서 먹고 살라고 하면 암담하다..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이렇게 보면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도 일종의 중독이다. 중독된 사람을 통제하기는 쉽다.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언제든 그 풍요와 편리함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럽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어찌 세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다시 한 번,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함민복 시인의 산문집 <미안한 마음>을 읽으며 우선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면, 작가의 존재 양식 역시 그/그녀의 의식을, 작품을 규정할 것이라고. 함민복 시인의 글이 주는 다른 종류의, 다른 깊이의 울림은 거기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강화의 작은 어촌 마을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시인의 삶에 군살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가난하지만, 그에게 가난은 결코 결핍과 동의어가 아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잉여를 남기지 않는 마음, 자연이 자신에게 허락한 만큼만 지니고 사는 간결함에 가깝다. 그의 글도 그만큼 담백하고 청초하다.


<긍정적인 밥>

詩 한 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국밥 한 그릇의 온기가 이리 넉넉하게 느껴지는건 그 국밥 한 그릇의 의미를 시인이 온전히 경험하고 느끼기 때문이다. 같은 밥벌이를 말하더라도 김훈이 말하는 "밥벌이의 위대함"이 어쩔 수 없이 "난 이 정도 벌어서 먹을 자격이 있다"는 식의 오만함을 풍기는 것과 대조적으로, 시인의 밥벌이는 겸허함, 감사함으로 가득하다. 집 앞 고욤나무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뻘에 들고 나는 물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그리고 이웃의 술잔을 받아들며 보내는 시선에도 항상 겸허함이 묻어난다. 제 한 몸 먹고 사는게 저가 잘나서가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의 도움을 받아 비로서 가능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고맙고, 또 미안하다.

종 다양성이 생태계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지표이듯, 다양한 글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한 사회의 의식세계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지표일 것이다. 수도권 거주 중산층 이상의 지식인 작가군이 한국 문학을 주름잡고 있는 현실에서 함민복 시인의 글은 차라리 신선한 청량감을 준다. 아파트 숲 속에서 사는 작가들에게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낮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낮은 목소리라는게 꼭 사는게 힘들다는 넋두리일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낮은 곳에 처하기 때문에 더 잘 느낄 수 있는 것들, 세상의 체온 같은걸 알려주는 따뜻한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 목소리는 내가 매몰되어 있었던 물질의 세계 안에서 나를 일깨운다. 더 갖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고 교감하는데 물질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왜 책을 읽는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하지만, 그 존재를 변화시키는 것은 역시 의식의 몫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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