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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어둠의 속도
- 엘리자베스 문 지음/정소연 옮김/북스피어/14000원

"자폐"라는 증상에 대한 내 최초의 경험은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레인맨>에서였다. 이 영화에서 더스틴 호프만은 아직 솜털 보송보송한 애송이였던 톰 크루즈와 함께 출연해 연기력의 차이라는게 어떤건지 확실히 보여주었는데, 그 연기가 인상적이었던만큼 자폐증에 대한 나의 인식도 그 선에서 멈춰버리고 말았던 것 같다. 특정 분야에서 놀라운 집중력과 천재성을 보이는 정신지체인.. 이라는 이미지로 말이다. 이 이미지는 영화 <큐브>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되었는데, 이게 자폐인에 대한 내 경험의 전부인 셈이다. 실제로 자폐인을 만난 적이 없으니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게 사실 정확한 표현이다.

때문에, 대부분 자폐인 루 애런데일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이 책을 읽으며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야 기존의 자폐인에 대한 기존 이미지와 일치할지언정, 루의 목소리로 서술되는 내면은 오히려 '정상'인들보다 더 많은, 더 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자폐인들의 내면은 저럴까? 모른다. 아직 아무도 자폐인의 머리 속에 들어가 본 적도 없고, 자폐인이 스스로의 의식세계를 서술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책 말미의 인터뷰에서 루가 오늘날의 전형적인 자폐인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고 밝힌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소설이고, 책에 등장하는 자폐인들은 어린 시절 치료(아마도 현재의 기술로는 불가능한)를 통해 어느 정도 사회적 적응을 할 수 있게 된 사람들로 설정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에서 말하는 자폐인들은 허구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에 대해 자폐인들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묘사해 또 다른 편견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비판에 당당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바로 자폐아동을 입양해 20년이 넘도록 키워온 부모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처럼 "어떤 자폐아의 부모도 자폐증을 낭만적으로 말하거나, 자폐증이 아이와 아이가 살아가는 사회에 얹는 부담을 축소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자폐인을 괴물(당황하면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대고, 벽에 머리를 부딛혀 자해를 하는)처럼 묘사하는 기존의 시각을 바꾸고 싶어한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폐인도 하나의 완전한 인간이고,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욕망과 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단순한 사실이다. 저자가 자폐인 아이를 키우면서 교감해 온 경험은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이를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자폐인의 내면의 시각을 취함으로써 그들의 외견상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내적인 원리와 설명을 부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어둠의 속도>가 자폐 자체를 설명하기 위한 책은 아니다. 자폐인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서술한다는 것은 자폐인의 내면을 보여준다는 효과도 있지만, 동시에 자폐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대상, 즉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일종의 소격효과, 낯설게보기 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흔히 '정상'이라고 분류하는 사람의 행동들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만큼 '정상'적인가를 되돌아보게 된다. 예컨데, 자신의 불행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돈의 행동은 극도로 방어적이 되어 모든 것을 우선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게 아닐까 고민하는 자폐인들과 대비가 되는데, 과연 여기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정당한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는 담론의 권력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이 소설 속에서도 뇌과학의 이름을 빌어 자폐인들을 끊임없이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의사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담론에 기대어 자신들을 정상으로, 그리고 그들을 비정상으로 구분짓는다. 하지만 자폐는 루의 한 특징일 뿐이다. 담론에의 의존이 심한 사람일수록 루라는 존재의 풍부한 스펙트럼을 발견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볼 뿐이다. 우리가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항상 마찬가지의 함정이 존재한다. 우리는 상대를 항상 우리가 아는 만큼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보고 싶은 만큼만 재단하여 보기 때문이다.

빛은 앎, 어둠은 무지(無知)라는 상징은 다소 구태의연하지만, 저자는 이 상징을 통해 우리의 무지함을 드러내고자 한다. 엄밀하게 과학적으로 따지자면 어둠의 속도라는 것은 non-sense 이다. 어둠은 존재가 아니라 단지 빛의 부재요, 따라서 빛의 속도는 있을지언정 어둠, 존재하지 않는 것의 속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이 비추지 않는 곳에 어둠은 이미 존재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오직 빛이 비추어진 부분과 그 순간일 뿐, 우리는 언제나 무지라는 조건 속에서 앎을 찾아 나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어둠의 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길 때, 우리가 가진 빛에 자만하기보다 더 큰 어둠 앞에 겸손할 수 있지 않을까.

루가 성공 여부가 불확실한 자폐 치료를 받기로 결정한건 그 때문일거다. 그는 자폐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그저 '정상'이 되고 싶은 갈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치료가 성공해 더 이상 자폐인이 아닐 때, 그 때의 루는 더 이상 예전의 루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치료를 택한다. 그는 우주로 나가고 싶었다. 더 많은 세계를 알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 루는 항상 어둠이 더 빠르다는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려 할 때, 어둠은 언제나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나아갈 것이라는걸 알았던 것이다. 그를 이끈건 바로 어둠의 속도였다.

잊지 말자. 비록 내 눈은 빛만을 느낄지라도, 어둠은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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