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une 2007 | Main | August 2007 »

July 2007 Archives

July 1, 2007

제5도살장

제5도살장
- 커트 보네거트 지음/박웅희 옮김/아이필드/9000원

<이벤트 호라이즌(Event Horizon)> 이라는 영화가 있다. 97년에 나왔던 영화인데, 내가 본 건 아마도 99년 정도의 어느 지루한 여름날이었던 것 같다. 아직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VHS를 빌려 보던 시절. 영화는 컬트적 매력이 있었지만 내가 그리 선호하는 타입은 아니었던지라 그냥 한 번 흘려 본 정도로만 기억이 난다. <매드니스>에 이어 또 한 번 멋진 호러 연기를 보여준 샘 닐 정도가 인상적이었던 듯.

그렇게 잊고 지내다가, 몇 년이 지난 어느날 문득 <이벤트 호라이즌>을 다시 떠올리게 된건 순전히 한 시퀀스 때문이다. 영화에서 이벤트 호라이즌 호를 탐사하던 대원 하나가 우주선 중심에 있는 순간이동장치(?)에 빨려들어간다. 다행히 몸에 줄이 연결되어 있어 그를 끌어당겨 꺼내지만, 끌려나온 그는 별다른 외상은 없지만 완전히 넋이 나간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만 한다. 이를 보며 다른 대원들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도대체 그는 저 너머에서 뭘 보고 온걸까." 갑자기 <이벤트 호라이즌>을 기억 너머에서 길어올린 접점은 바로 여기였다.

2차 대전 후 기나긴 참호전에서 돌아온 병사들, 베트남의 밀림에서 돌아온 병사들 중 상당수가 육체적 외상과 별도로 어떤 정신적 외상=트라우마 증세를 호소했다. 전쟁에서 이겼는냐 졌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도저히 전쟁 이전과 같은 인격을 유지할 수 없었고, 그들의 삶 여기저기에서 균열이 생겨났다. 주변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이 의문과 함께 사람들은 비로서 승리 혹은 패배라는 전쟁의 거시적 결과에서 눈을 돌려 전쟁이 개개인에게 가한 압도적인, 그리고 폭력적인 영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은 거칠게 말하면 2차대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빌리 필그림이라는 참전군인의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빌리 필그림이라는 인물이 범상치가 않다. 그는 시간여행을 할 줄 알아서(거창한게 아니라, 한 순간 과거에 있다가 눈을 깜빡하면 현재로 돌아와 있다던가 하는 식이다)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외계인에게 납치당해 동물원 같은 곳에 전시되기까지 한다. 3인칭의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빌리 자신의 정신세계를 글로 옮긴 것이라는걸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상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빌리라는 인물은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있다. 미쳤군.

그런데, "전쟁에서 미쳐서 돌아온 어느 군인의 이야기" 라고 요약하기에 그의 분열된 정신세계가 보여주는 디테일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책은 결코 전쟁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빌리의 시간을 오가는 여정을 쫓다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전쟁이 개인에게 가한 충격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는 외계인에 의한 납치라는 황당한 이야기와 전쟁 경험, 그리고 전쟁 이후의 삶을 시간 여행이라는 장치를 통해 직조하면서 만들어내는 놀라운 시너지 효과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탁월함이라 할 것이다.

그렇게 가는거지

커트 보네거트는 이 책에서 죽음과 관련된 모든 문장의 뒤에 "그렇게 가는거지(so it goes..)"라고 읊조린다. 작은 벌레의 죽음부터 폭격에 희생당한 사람들, 주인공 아내의 비극적 죽음까지, 누가 어떻게 죽느냐에 상관없이 그렇게 가는 거란다. 죽음 앞에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달관의 경지 같기도 하고, 그저 뒤틀린 냉소 같기도 한 이 문장은 항상 아슬아슬한 줄타기처럼 느껴진다. 자칫 생명의 존엄에 대한 모독으로, 망자에 대한 모욕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이와 같은 거리두기 내지 무감각(?)은 비단 서술자의 태도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주인공 빌리 필그림을 납치한 외계 종족 트랄팔마도어인의 세계관에서 모든 존재는 죽은 동시에 살아있는 것이기에 삶과 죽음에 아무런 구분을 둘 필요가 없다. 슬퍼할 이유도 없고, 죽음을 피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저 행복한 순간만을 보고 기억하며 거기에 집중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시간을 초월한 감각을 지닌 트랄팔마도어인의 입을 빌어 설파되는 이 기묘한 숙명론 혹은 순응주의는 곧 빌리의 그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런 그를 보고 미쳤다고 말한다.

빌리는 정말 미쳤는지 모른다. 아니, 분명히 미쳤다. 사실 이 모든게 빌리의 망상임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실에 조금 더 접근할 수 있다. 외계인의 납치니 시간여행이니 하는 빌리의 망상을 말 그대로 망상으로 밀쳐두고, 그가 망상 속에서 외면하고 있을 현실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해보자. 동료들의 시체를 바라보면서 죽는 것과 사는 것의 차이는 없다고 중얼거리는 모습을, 전쟁 후 평범한 삶 속에서 문득 시간여행을 하듯 드레스덴에서 폭격에 불타버린 시체가 눈 앞에 떠오르는 모습을. 그건 생존의 문제였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도처에서 밀려드는 죽음의 홍수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의식의 생존 전략 말이다. 그래서 책의 부제 중 하나는 이렇다.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

마찬가지로, 책 전체를 지배하는 "죽음과의 거리두기"는 일종의 탈색효과다. 영화 <300>에서 탈색된 그래픽이 살육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둔화시켰듯이, "그렇게 가는거지"와 같은 시니컬한 유머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둔화시킨다. 그렇게 책을 읽는 독자는 빌리와 같은 생존의 전략을 체득한다. 그리고 그렇게 낄낄거리며 빌리의 좌충우돌 인생을 읽다보면, 어느새 슬그머니 슬픔 같은 감정이 밀려오는게 느껴진다. 전쟁은 거대한 부조리극이고, 인간은 그저 그 안에서 미쳐버린 광대 같은 캐릭터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

하지만, 정말 미친건, 전쟁이다.

July 9, 2007

바람의 그림자

바람의 그림자
- 최남용 지음/한결/10000원

리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이 글은 어쩔 수 없이 "주례사 비평"의 범주에 들어갈 수밖에 없음을 고백해야겠다. 뭐 그렇다고 그저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독자들에 비해 내가 저자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창작의 과정도 일부 보아 왔기 때문에 가질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편듦이 존재함을 이해해 달라는 것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저자와 나의 특수관계는 내 머리 속에서 일종의 자기검열장치로 동작하고 있으니 다른 글들보다 훨씬 온건한 글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 책의 저자는 바로 나의 아버지시다.

자식된 입장에서 아비의 글을 평한다는게 온당한 일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당신께서도 아시다시피)늘상 책 읽는 족족 리뷰랍시고 글을 써서 웹에 올리다가 유독 이 책만 슬쩍 모른체 넘어가기도 힘들다. 그렇다고 이역 만리 떨어진 아들에게 소포로 보내주신 당신의 책을 그냥 전화로 "재밌었어요"라고 간단히 소감을 끝내버리는 것도 도리는 아닌 것 같고... 어쨌거나 리뷰는 써야 할 상황. 다만 '어떻게'라는 문제가 남아 있는건데, 일단 다른 상황에서처럼 "독자"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함부로 휘두를 수 없다는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대충 쓴다는 것도 "독자"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뿐더러, 당신의 작품에 대한 예의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가능한 성실한 독자로서의 의견을 들려드리는게 아닐까 싶다.

엄살은 이 정도로 해두고, 본격적으로 책으로 들어가보자. 크게 분류하자면, 이 소설은 요즘 많이 나오는 것처럼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혼합한 팩션에 해당하며, 동시에 저자가 나고 자란 지방의 역사와 문화에 주목하는 향토문학에 속한다.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바람의 저편" 장은 고려 건국 이후 태조가 사망한 다음 왕실을 둘러싼 권력암투를 배경으로 하는데, 실제 역사적 인물, 사건들을 바탕으로 그 위에 허구인 인물간의 사건을 얹었다. 조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고려 초기의 비사(秘史)를 읽는 듯한 긴박감은, 소설적 재미와 함께 역사적 지식도 함께 얻을 수 있는 팩션의 장점이다.

개경(개성)을 중심으로 한 고려 왕실의 비사가 내 고향이자 아버지의 고향인 강원도 춘천 지방과 연결되는건, 청평사 입구 환희령에 위치한 한 작은 공양탑을 통해서이다. 원래 청평사와 인근 구성폭포에는 평양공주와 상사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전설과 연계되어 이 탑은 공주탑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아마 이 탑의 특이한 이력이 당신의 관심을 끌었던 것 같다. 대개 공양탑은 절 경내에 위치하는게 일반적인데, 이 탑은 절 경계를 벗어난 곳에 축조된 것도 유별스럽거니와, 신라 후기 양식으로 고려 초에 만들어진 탑이 그 무렵(10세기 초엽) 이미 쇠망한 당나라의 공주가 등장하는 전설과 연계된다는 것도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전설이라는게 엄밀한 역사적 기록과 꼭 맞아 떨어지리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이 간극은, 향토 문화를 아끼는 한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자, 이렇게 해서 하나의 창작 설화가 만들어진다. 탑이 만들어진 시기(고려 초)와 '평양'공주라는 이름, 그리고 궁예가 태봉국의 수도로 삼은 철원과 태조 왕건의 심복이었던 신숭겸의 묘(춘천)가 인근 강원도 일대에 있다는 사실은 탑을 둘러싼 전설이 고려 건국 무렵을 배경으로 하는 충분한 개연성을 제공해준다. 거기에 윤회와 전쟁의 이야기를 섞어 과거와 현재를 연결지음으로써 소설은 역사적 고증 자체가 목적이 아닌 설화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야기(話)는 본질적으로 작자가 독자에게 하고픈 말이다. 소설적 재미는 이야기가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고, 그 근저에는 핵심이 되는 주제가 있기 마련이다. 이 소설에서는 업(業)이 그 화두이다.

윤회, 전쟁, 업 등의 단어에서 눈치챘겠지만, 소설은 다분히 불교적인 색채를 띈다.(물론, 책 속에서 석우 스님의 목소리를 통해 윤회가 온전히 불교적인 개념은 아니라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굳이 불교라는 특정 종교에 기대지 않더라도, 환갑을 눈 앞에 두신 당신께서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오시던 내용을 이 책에 담았음은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언젠가 내게 "현세의 삶은 혹 과거의 업을 폴기 위해 주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하셨던게 책을 읽으며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당신의 고민과 철학을 이 소설을 통해 업이라는 화두를 통해 나누고 싶으셨으리라.

처음에 이 소설이 향토문학에 속한다고 했는데, 군데군데 엿보이는 향토 문화재에 대한 애정은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우리가 흔히 잊고 사는 지방 문화재에 대한 관심 환기라는 측면에서 당신의 노력은 매우 소중한 일이다. 묻혀진 자료를 발굴해내고 그에 적절한 맥락을 부여하는 일은 사실 보통 이상의 끈기를 요구하는 일일 것이다. 흔히 말하는 "전국구" 작가들은 해 낼 수 없는 일을 지방의 문인들이 해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적인 측면에서 볼 때, 중간 중간 필요 이상의 설명이 이야기의 맥락을 끊거나 늘어지게 만드는 부분들이 보인다. 문화재에 대한 소개나 설명은 과감하게 주석의 형태로 돌려 이야기의 흐름이 더 간결하고 속도감 있게 갈 수 있도록 하는게 어땠을까 싶다.

아울러, 원래 전문적인 글쟁이가 아니셨던만큼, 아직 미흡하다고 여겨지는 부분들도 눈에 들어온다. 우선 언어의 문제가 있다. 현세의 주인공들은 20대 젊은이들이지만, 그들이 쓰는 말투는 젊은이들의 그것이라고 하기 힘들다. 구어체라기보다 문어체에 가까운 이 대화들은 젊은이들이 읽기에 소설의 리얼리티를 상당히 갉아먹어 소설에의 몰입을 방해한다. 게다가 현재의 이야기가 책의 앞머리에 해당하기 때문에 독자들을 강하게 끌어당겨야 하는 책 초반부에서 이 같은 리얼리티의 상실은 꽤나 치명적이다. 그 외에 지나치게 자주 반복되는 복선 등 이야기를 쌓은 후에 불필요한 문장을 쳐나가는 다이어트가 아직 좀 더 필요해 보인다. 불충분한 교정/교열도 눈에 거슬리는 부분. 출판사가 좀 영세해서 그런 것 같은데, 다음번 소설에서는 가능하면 내가 교정을 좀 봐드리는게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이 소설은 당신의 첫 장편 소설이다. 이만한 분량의 책을 호흡이 가쁘지 않게 잘 이끌어 가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축하드려야 할 일이라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앞으로 더 많은 글들을 쓰실테고, 그 첫 단추를 잘 끼우셨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책을 쓰면서, 자료를 조사하시면서, 그리고 지인들과 책의 내용을 함께 이야기하시면서 즐거우셨을 당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다음 책도 그렇게 즐겁게 쓰시길 빌어본다.

July 18, 2007

미안한 마음

미안한 마음
- 함민복 지음/풀그림/9500원

올해로 직장 생활 8년차다. 월급쟁이 프로그래머가 수입이래야 뻔하긴 하지만, 그래도 경력이 쌓이고 직급이 높아지면서 수입도 같이 늘었다. 수입이 늘었다는건 단지 월급통장에 찍히는 급여액이 늘었다는 산술적인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점점 소비에 능숙해지고, 또 그걸 당연하게 여긴다.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을 사고(책도 그렇고), 더 맛난 음식을 찾고, 더 맵시나는 옷을 입으려 하는게 그 증거이다. 어김없이,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물론 소비가 죄악은 아니다. 인간은 단지 빵만으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가지는 비가역적 속성이다. 아이러니 같지만 가진게 많을수록 버리기가 힘들어진다. 지금보다 '덜' 벌었을 때 사는게 힘들었냐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런데도 지금 예전만큼 벌어서 먹고 살라고 하면 암담하다..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이렇게 보면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도 일종의 중독이다. 중독된 사람을 통제하기는 쉽다.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언제든 그 풍요와 편리함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럽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어찌 세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다시 한 번,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함민복 시인의 산문집 <미안한 마음>을 읽으며 우선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면, 작가의 존재 양식 역시 그/그녀의 의식을, 작품을 규정할 것이라고. 함민복 시인의 글이 주는 다른 종류의, 다른 깊이의 울림은 거기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강화의 작은 어촌 마을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시인의 삶에 군살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가난하지만, 그에게 가난은 결코 결핍과 동의어가 아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잉여를 남기지 않는 마음, 자연이 자신에게 허락한 만큼만 지니고 사는 간결함에 가깝다. 그의 글도 그만큼 담백하고 청초하다.


<긍정적인 밥>

詩 한 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국밥 한 그릇의 온기가 이리 넉넉하게 느껴지는건 그 국밥 한 그릇의 의미를 시인이 온전히 경험하고 느끼기 때문이다. 같은 밥벌이를 말하더라도 김훈이 말하는 "밥벌이의 위대함"이 어쩔 수 없이 "난 이 정도 벌어서 먹을 자격이 있다"는 식의 오만함을 풍기는 것과 대조적으로, 시인의 밥벌이는 겸허함, 감사함으로 가득하다. 집 앞 고욤나무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뻘에 들고 나는 물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그리고 이웃의 술잔을 받아들며 보내는 시선에도 항상 겸허함이 묻어난다. 제 한 몸 먹고 사는게 저가 잘나서가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의 도움을 받아 비로서 가능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고맙고, 또 미안하다.

종 다양성이 생태계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지표이듯, 다양한 글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한 사회의 의식세계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지표일 것이다. 수도권 거주 중산층 이상의 지식인 작가군이 한국 문학을 주름잡고 있는 현실에서 함민복 시인의 글은 차라리 신선한 청량감을 준다. 아파트 숲 속에서 사는 작가들에게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낮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낮은 목소리라는게 꼭 사는게 힘들다는 넋두리일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낮은 곳에 처하기 때문에 더 잘 느낄 수 있는 것들, 세상의 체온 같은걸 알려주는 따뜻한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 목소리는 내가 매몰되어 있었던 물질의 세계 안에서 나를 일깨운다. 더 갖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고 교감하는데 물질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왜 책을 읽는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하지만, 그 존재를 변화시키는 것은 역시 의식의 몫이기 때문이다.

July 31, 2007

어둠의 속도

어둠의 속도
- 엘리자베스 문 지음/정소연 옮김/북스피어/14000원

"자폐"라는 증상에 대한 내 최초의 경험은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레인맨>에서였다. 이 영화에서 더스틴 호프만은 아직 솜털 보송보송한 애송이였던 톰 크루즈와 함께 출연해 연기력의 차이라는게 어떤건지 확실히 보여주었는데, 그 연기가 인상적이었던만큼 자폐증에 대한 나의 인식도 그 선에서 멈춰버리고 말았던 것 같다. 특정 분야에서 놀라운 집중력과 천재성을 보이는 정신지체인.. 이라는 이미지로 말이다. 이 이미지는 영화 <큐브>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되었는데, 이게 자폐인에 대한 내 경험의 전부인 셈이다. 실제로 자폐인을 만난 적이 없으니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게 사실 정확한 표현이다.

때문에, 대부분 자폐인 루 애런데일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이 책을 읽으며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야 기존의 자폐인에 대한 기존 이미지와 일치할지언정, 루의 목소리로 서술되는 내면은 오히려 '정상'인들보다 더 많은, 더 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자폐인들의 내면은 저럴까? 모른다. 아직 아무도 자폐인의 머리 속에 들어가 본 적도 없고, 자폐인이 스스로의 의식세계를 서술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책 말미의 인터뷰에서 루가 오늘날의 전형적인 자폐인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고 밝힌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소설이고, 책에 등장하는 자폐인들은 어린 시절 치료(아마도 현재의 기술로는 불가능한)를 통해 어느 정도 사회적 적응을 할 수 있게 된 사람들로 설정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에서 말하는 자폐인들은 허구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에 대해 자폐인들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묘사해 또 다른 편견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비판에 당당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바로 자폐아동을 입양해 20년이 넘도록 키워온 부모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처럼 "어떤 자폐아의 부모도 자폐증을 낭만적으로 말하거나, 자폐증이 아이와 아이가 살아가는 사회에 얹는 부담을 축소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자폐인을 괴물(당황하면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대고, 벽에 머리를 부딛혀 자해를 하는)처럼 묘사하는 기존의 시각을 바꾸고 싶어한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폐인도 하나의 완전한 인간이고,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욕망과 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단순한 사실이다. 저자가 자폐인 아이를 키우면서 교감해 온 경험은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이를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자폐인의 내면의 시각을 취함으로써 그들의 외견상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내적인 원리와 설명을 부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어둠의 속도>가 자폐 자체를 설명하기 위한 책은 아니다. 자폐인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서술한다는 것은 자폐인의 내면을 보여준다는 효과도 있지만, 동시에 자폐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대상, 즉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일종의 소격효과, 낯설게보기 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흔히 '정상'이라고 분류하는 사람의 행동들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만큼 '정상'적인가를 되돌아보게 된다. 예컨데, 자신의 불행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돈의 행동은 극도로 방어적이 되어 모든 것을 우선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게 아닐까 고민하는 자폐인들과 대비가 되는데, 과연 여기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정당한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는 담론의 권력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이 소설 속에서도 뇌과학의 이름을 빌어 자폐인들을 끊임없이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의사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담론에 기대어 자신들을 정상으로, 그리고 그들을 비정상으로 구분짓는다. 하지만 자폐는 루의 한 특징일 뿐이다. 담론에의 의존이 심한 사람일수록 루라는 존재의 풍부한 스펙트럼을 발견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볼 뿐이다. 우리가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항상 마찬가지의 함정이 존재한다. 우리는 상대를 항상 우리가 아는 만큼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보고 싶은 만큼만 재단하여 보기 때문이다.

빛은 앎, 어둠은 무지(無知)라는 상징은 다소 구태의연하지만, 저자는 이 상징을 통해 우리의 무지함을 드러내고자 한다. 엄밀하게 과학적으로 따지자면 어둠의 속도라는 것은 non-sense 이다. 어둠은 존재가 아니라 단지 빛의 부재요, 따라서 빛의 속도는 있을지언정 어둠, 존재하지 않는 것의 속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이 비추지 않는 곳에 어둠은 이미 존재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오직 빛이 비추어진 부분과 그 순간일 뿐, 우리는 언제나 무지라는 조건 속에서 앎을 찾아 나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어둠의 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길 때, 우리가 가진 빛에 자만하기보다 더 큰 어둠 앞에 겸손할 수 있지 않을까.

루가 성공 여부가 불확실한 자폐 치료를 받기로 결정한건 그 때문일거다. 그는 자폐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그저 '정상'이 되고 싶은 갈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치료가 성공해 더 이상 자폐인이 아닐 때, 그 때의 루는 더 이상 예전의 루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치료를 택한다. 그는 우주로 나가고 싶었다. 더 많은 세계를 알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 루는 항상 어둠이 더 빠르다는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려 할 때, 어둠은 언제나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나아갈 것이라는걸 알았던 것이다. 그를 이끈건 바로 어둠의 속도였다.

잊지 말자. 비록 내 눈은 빛만을 느낄지라도, 어둠은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About July 2007

This page contains all entries posted to 다락방 서재 in July 2007. They are listed from oldest to newest.

June 2007 is the previous archive.

August 2007 is the next archive.

Many more can be found on the main index page or by looking through the archives.

Powered by
Movable Type 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