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라하의 소녀시대 | Main | 제5도살장 »

푸른 알약

푸른 알약
- 프레데릭 페테르스 지음/유영 옮김/세미콜론/11000원

감기에 걸렸다. 한동안 몸을 좀 혹사시켰다 싶더니, 어김없이 몸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감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내 몸이 아니라 내 몸에 침투한 바이러스다. 잠시 틈을 허락했더니 비집고 들어와 제 것도 아닌 몸을 이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콧물을 훌쩍이며 그 작고 바글바글한 것들(너무 작아 보이지는 않지만)에게 욕설을 퍼붓지만, 실질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병원에서 주사를 맞지 않으면 알약 몇 알에 의지하는 것 뿐이다. 참 무력하지 않은가.

감염. 질병. 죽음.

단어들이 낯설다. 나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진 것 같은 저 단어들. 아니, 어쩌면 그리 멀리 있지 않은데 그저 멀리 떨어져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두려움 때문이다. 일단 시작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무력함, 내 의지가 아닌 다른 무엇에 의해 나의 삶, 존재가 뒤틀려 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나를 두렵게 한다. 나는 나의 이 두려움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건 그저 (내 생각에) 아주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일 뿐이다.

하지만, 내 안의 두려움을 실제 사람에 투사할 때 이야기는 달라진다. 두려움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사람을 인간 이전에 어떤 질병의 덩어리, 보균자로 낙인찍고 소외시켜 버린다. 물론, 드러내놓고 배척할 정도로 "교양"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래봤자, 가장 흔한 반응, "이해하는 척하면서 경계하는 쪽"에 속할 뿐이다. 여기서 교양은 이해를 가장한 속물근성의 다른 이름이다.

감기에서 출발해서 너무 건너뛰어 버린 것 같은데,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이쯤에서 귀뜸해 두자면, 이 책은 에이즈 환자와의 사랑 이야기다. Fiction 이 아닌 작가 프레데릭 페테르스의 실제 이야기. 그가 사랑하는 여인 카티는 에이즈 환자이고, 그녀의 아들 역시 에이즈에 감염된 채 세상에 태어났다. 카티는 프레데릭과 가까워지면서 먼저 자신이 에이즈 환자임을 고백했고, 놀랍게도 프레데릭은 그런 그녀를 받아들인다. 그는 두렵지 않았던 것일까?

두렵다. 콘돔이 찢어진걸 발견한 날 그는 곧바로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의사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그가 감염될 확률은 길가다가 흰 코뿔소를 만날 확률과 같다고 말하지만, 길을 걸으며 뒤에서 코뿔소가 계속 따라오는 기분이 드는건 어쩔 수 없다. (만화적 상상력이 빛나는 장면이었다. 조용히 뒤따라 걸어오는 코뿔소라니!!) 하지만 그는 코뿔소가 쫓아올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힐끗 뒤를 돌아보며, 그 곳에 코뿔소가 없음을 확인하고 미소지을 뿐이다. 두려움의 근원을 아예 멀리 피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그 자체를 삶의 한 조건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 중심에는 물론 카티가 있다. 침대에 누운 채 카티가 프레데릭에게 왜 자기를 좋아하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왠만한 연인들 사이에 적어도 한 번씩은 오갔을 질문이지만, 카티가 묻고 싶은건 아마 더 깊숙한 질문이었을거다. 두렵지 않냐고. 감염될 위험을 무릅쓰고 왜 내 곁에 있는거냐고. 사실, 카티도 두렵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병을 안고 살아가는 아이에게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고, "당신마저 감염된다면, 난 정말 죄책감에서 헤어날 수 없을"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녀에게 프레데릭은 대답해 준다. 한 남자 한 여인에게서 발견하는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특별한 매혹을 느꼈음을.

프레데릭은 친구에게 카티와 자신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맞는 커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따금 20분의 1미리짜리 얇은 고무를 껴야 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그래 그건 그렇지.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을 만나는게 결코 흔한 일은 아니지. 그렇게 완벽한 반쪽을 만나기가 흰 코뿔소 만나기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쉽지는 않을지도. 프레데릭은 카티를 사랑하고, 그게 가장 중요한거다. 두려움은 그저 그들의 사랑을 둘러싼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전혀 개의치 않고 둘 만의 즐거운 대화를 즐기고 있는 표지그림처럼 말이다.

카티와 그녀의 아들은 아마 평생을 치료제와 항생제에 의지하며 질병과 싸우며 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푸른 알약은 결코 그들의 삶에 드리워진 고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삶의 한 조건이고, 그들은 담담히 그 조건을 받아들일 것이다. 아니, 어찌 보면 푸른 알약은 삶에 대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가방 가득 푸른 알약을 넣고 걸어오는 카티의 얼굴에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는건 그 때문이 아닐까.

TrackBack

TrackBack URL for this entry:
http://www.turnleft.org/cgi/mt/mt-tb.cgi/1523

Post a comment

About

This page contains a single entry from the blog posted on June 26, 2007 11:35 PM.

The previous post in this blog was 프라하의 소녀시대.

The next post in this blog is 제5도살장.

Many more can be found on the main index page or by looking through the archives.

Powered by
Movable Type 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