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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소녀시대

프라하의 소녀시대
- 요네하라 마리 지음/이현진 옮김/마음산책/10000원

1960년, 10세의 소녀 요네하라 마리는 국제 공산주의 기관지 편집국에 일본 공산당 대표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프라하로 이주했다. 그 곳에서 그녀는 약 5년간 소비에트 학교를 다니면서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만났고, 1965년 아버지를 따라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30년이 지난 후, 마리는 프라하의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그리스에서 온 리차, 루마니아에서 온 아냐,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에서 왔던 야스나. 소비에트가 붕괴하고 내전과 독재로 얼룩진 시대를 이들은 어떻게 헤쳐왔을까.

이거이거.. 일단 이 특이한 이력만으로도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책이다. 30년만에 처음 만나는 여고 동창생 이야기로도 충분히 얘기거리가 되련만, 공산주의 국가에서 보낸 소녀시절 이야기에, 이후 그녀들이 고스란히 겪어야했던 동유럽의 굴곡 많은 역사가 겹쳐져 그야말로 이야기거리의 성찬이라 할 만하다. 남은 문제는 저자가 이 다양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균형 있게 버무려내느냐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리차, 아냐, 야스나 세 인물을 각각의 장으로 나누고(유년기의 기억이란 대개 서로 얽히기 마련인데, 이렇게 인물별로 분절된 기억은 다소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각 장을 다시 세 개의 층위로 나누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첫 단계에서는 우선 프라하에서의 시절을 회상하면서 각 인물의 캐릭터를 구축한다. 그 다음으로 30년 후 저자가 친구들을 찾아 나서는 과정을 통해 20세기 후반 동유럽의 격변을 가름하고, 그 후 실제 친구와의 해후를 통해 개인과 시대를 조우시키는 방식이다. 다소 지나치게 도식화해 이해하는 측면도 없지 않지만, 3번에 걸쳐 같은 구조가 반복되다보니 마지막에 가서는 좀 형식적이라는 느낌이 든게 사실인지라.. ^^;;

어쨌거나, 저자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개인적인 감회와 시대를 읽는 분석적 사유를 상당히 성공적으로 배합해낸다. 그리스,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의 현대사는 좀 더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하는 내용이지만, 30년만의 해후를 담은 이 책에 그런 정보까지 요구하는건 별로 공정한 일은 아니리라. 다만, 독자의 이해를 위해 간략하게나마 각 나라의 현대사를 개괄하는 보너스 정도는 가능하지 않았나하는 아쉬움은 있다. 다른 때는 별로 도움도 안 되는 추천사 등등으로 책 두께만 늘리던 출판사들이 왜 이런 작은 친절에는 이렇게 야박한지. 투덜.

하지만, 책의 중심은 역시 그녀들의 재회 아닌가. 낯설었지만 따뜻했던 프라하에서의 유년 시절에 대한 향수와 친구들에 대한 애정, 그리고 그녀들의 생사도 모른채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의 안타까움은 저자의 섬세한 문체에 담겨 고스란히 읽는 이에게 전해진다. 그리스의 파란 하늘을 자랑스러워했던 리차, 다소 교조적(?)이었던 아냐, 그리고 총명한 야스나를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는건 저자의 그들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30여년의 시간과 굴곡진 역사가 그녀들의 삶을 변화시켰음에도, 그녀들 안에서 30년전 프라하에서의 "소녀시대"를 재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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