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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07 Archives

June 3, 2007

말리와 나

말리와 나
- 존 그로건 지음/이창희 옮김/세종서적/10000원

새벽 1시. 연일 계속되는 야근에서 돌아와 얼른 씻고 지친 몸을 침대에 누워 책을 집어들었다. 오늘은 말리를 보내야 할거다. 평소 눈물이 많은 나는 분명 엉엉 울게 틀림없었고, 따라서 이 책을 까페 같은 곳에서 끝낼 수는 없었다. 차라리 방에서 남 신경쓰지 말고 맘껏 울어버리고 잠들어야지. 예감은 적중. 실컷 눈물을 쏟고 노곤해진 상태로 잠들어 버렸다.

사실, 신파를 좋아하진 않는다. "울어"라고 강요당하는 느낌이 들면 기분이 찝찝하다. 게다가 찝찝해 하면서도 시키는대로 울고 있는 날 보는게 더 짜증난다. 하지만, 이 책은 신파와는 거리가 멀다. 말리라는 이름의 말썽꾸러기 래브라도 리트리버와 13년을 동고동락한 이 이야기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건 기껏해야 마지막의 몇 장일 뿐이다. 그 외의 90%에서 나는 행복했다. 개를, 애완동물을 키운다는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아니, 누군가에게 애정을 갖고 교감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지 않을까. 영화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에서 하나하나 복기해낸 기억이 말해주었던 것처럼.

개와 고양이를 좋아하긴 하지만 나는 애완동물 애호가는 아니다. 오히려 간혹 사람에게보다 동물들에게 더 관대한 사람들을 보면 삐딱한 마음이 먼저 앞서는 편이다. 그래서 침이 마르도록 칭송으로 일관하는 개/고양이 예찬서라면 사절이다. 하지만 이 책 <말리와 나>는 다르다. 제목이 <"말리"와 "나">인 이유가 있다. 말리는 "개"라는 일반명사가 아닌 "말리"라는 한 존재의 고유명사이고, 이 책은 그 존재가 "나"의 인생과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말리는 저자가 신혼 초기부터 아이를 여럿 낳고 이사를 가고 직장을 옮기는 인생의 중요한 전환기를 오롯이 함께한 동반자였다.

소중한 이의 의미는 종종 함께 있을 때는 보이지 않다가, 헤어진 후에야 더 시리게 다가오곤 한다. 말리와 함께 울고 웃었던 여러 해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말리가 죽은 후 말리를 추억하는 대목에서 더 소중한 이야기들이 많이 읽힌다. 개가 없으니 집안이 참 깨끗하게 유지된다던지, 가구나 집이 망가질 일이 없어 가욋돈이 덜 든다든지 등등 개가 없으니 사는게 참 편해졌다고 말하면서 그들은 깨닫는다. 말리의 존재는 그 모든 불편함들을 모두 보상하고도 남는, 결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음을.

말리. 너는 결코 남들이 말하는 최고의 개는 아니었지만, 너의 가족들에게는 최고의 개였단다. 사랑은 어떤 이유도 필요치 않고 그저 존재 자체로 충만하다는 진리를 너는 너무도 잘 보여주는구나. 편히 쉬렴. 안녕.

June 14, 2007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 홍은택 지음/한겨레출판/15000원

읽은 책은 쌓여가는데 리뷰가 점점 밀린다. 바쁜 와중에도 자기 전 잠깐, 휴일 한 나절을 온전히 책 읽는데 쓰면서도 이상하게 리뷰를 쓸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절대적 시간이 부족한게 아니라, 되새김질을 할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탓일게다. 읽기가 휴식이었다면 쓰기는 생산인데, 이 input -> output conversion 에 투입할 에너지가 부족하니 결과물이 없을 수 밖에. 어쨌거나, 더 미뤘다간 책 내용과 감흥이 모두 날아가 버릴 것 같다. 서둘러야지.

요즘 부쩍 내 몸에 대한 관심이 늘어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몸보다는 머리를 신뢰하는 타입니다. 운동을 할 때도 몸이 반응하기보다는 원리를 파악해 머리로 배운다. 고등학교 때 농구 레이업슛을 실기시험으로 보는데, 남들은 쉽게 그냥 휙휙 넣는 것 같은데 나는 '왼발, 오른발, 왼발, 점프, 슛' 이런식으로 단계화해서 몸을 움직였던 기억도 난다 -_- 지난 겨울 스노우보드를 처음 배울 때도 비슷한 식으로 시도하다가 하루종일 땅에서 기다시피 했던 기억도 아울러;; 암튼, 내 몸은 나에게 '머리가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무엇' 정도의 의미였을 뿐이다. 최근 들어 뱃살은 생각대로 절대 안 움직인다는걸 깨달았지만 -_-

얼마 전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을 읽었다.(묘하게도, 이 책의 저자인 홍은택씨가 번역한 책이다) 미국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종주하는 이야기인데, 읽으면서 과연 나는 책 속에 나오는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에 속할까, 아니면 저자처럼 어떻게든 "끝까지 가보는 사람"에 속할까 궁금해졌다. 물론, 현재로서는 90% 이상의 확률로 전자에 속할거다. 하지만, "과연 내 몸이 어느 정도까지 버텨줄까?", 혹은 "내 몸을 내가 어느 정도까지 한계점으로 끌고 갈 수 있을까?"와 같은 의문이 계속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내 몸에 대해 거의 모른다는 깨달음과 함께.

이번에는 자전거다. 이 책의 저자 홍은택씨는 버지니아주 요크타운에서 자전거의 뒷바퀴를 대서양에 담근 후, 오레곤주 플로렌스에서 자전거의 앞바퀴를 태평양에 담글 때까지 미국을 동서로 가로질러 6400km 를 달렸다. 자동차로 워싱턴주를 가로지르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거리다. 그 먼 거리를, 그것도 화석연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인간의 심장이 내뿜는 에너지만으로 정복한다는건 과정도 과정이지만 성취 그 자체로 가치가 있어 보인다. 저자가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처럼, 자신의 몸을 믿을 수 있게 되는 과정이니까.

하나의 목표를 향해가는 저자의 여정이 나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면, 저널리스트다운 꼼꼼한 글솜씨로 기록한 미국과 미국인의 모습은 책의 다른 축이 되어 읽는 이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준다. 이미지를 걷어내고 몸으로 직접 만나는 미국의 모습은 역시 다면적이다. 초강대국의 오만이 은근히 도사리고 있는가하면, 인종이나 국적 따위는 개의치않고 맞이해주는 따스한 얼굴들도 있다. 어느 곳에 가나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아무 연고도 없는 바이커들에게 잘 곳을 제공해주고 환대해 주는 사람들을 보자면, 사람은 본래 따뜻한 존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이윤을 최고의 가치로 삼지 않는다면, 국가니 민족이니 이런 이름을 지울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인간 대 인간으로 진실하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호들갑스럽게 자전거를 장만하고 페달을 밟을 계획은 없지만, 나도 차츰 내 몸에 대한 통제(?)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앉아서 공부만 하느라 몸이 둔해졌다는 엄살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자전거로 미국을 횡단할 수 있었던건 기초 체력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달리기나 수영으로 단련한 몸이 있었기에 더 큰 목표를 향할 수 있었던 것. 책 몇 권 읽고 나서 그저 마음만 들떠서 내 능력 밖의 목표를 잡아서는 금새 포기하고 말 뿐이다. 조금씩 움직이자. 틈 나는 대로 산행도 하고. 그러면 나도 내 인생의 하프 타임에 뭔가 큰 목표에 도전해볼 수 있을게다.

June 21, 2007

프라하의 소녀시대

프라하의 소녀시대
- 요네하라 마리 지음/이현진 옮김/마음산책/10000원

1960년, 10세의 소녀 요네하라 마리는 국제 공산주의 기관지 편집국에 일본 공산당 대표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프라하로 이주했다. 그 곳에서 그녀는 약 5년간 소비에트 학교를 다니면서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만났고, 1965년 아버지를 따라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30년이 지난 후, 마리는 프라하의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그리스에서 온 리차, 루마니아에서 온 아냐,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에서 왔던 야스나. 소비에트가 붕괴하고 내전과 독재로 얼룩진 시대를 이들은 어떻게 헤쳐왔을까.

이거이거.. 일단 이 특이한 이력만으로도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책이다. 30년만에 처음 만나는 여고 동창생 이야기로도 충분히 얘기거리가 되련만, 공산주의 국가에서 보낸 소녀시절 이야기에, 이후 그녀들이 고스란히 겪어야했던 동유럽의 굴곡 많은 역사가 겹쳐져 그야말로 이야기거리의 성찬이라 할 만하다. 남은 문제는 저자가 이 다양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균형 있게 버무려내느냐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리차, 아냐, 야스나 세 인물을 각각의 장으로 나누고(유년기의 기억이란 대개 서로 얽히기 마련인데, 이렇게 인물별로 분절된 기억은 다소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각 장을 다시 세 개의 층위로 나누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첫 단계에서는 우선 프라하에서의 시절을 회상하면서 각 인물의 캐릭터를 구축한다. 그 다음으로 30년 후 저자가 친구들을 찾아 나서는 과정을 통해 20세기 후반 동유럽의 격변을 가름하고, 그 후 실제 친구와의 해후를 통해 개인과 시대를 조우시키는 방식이다. 다소 지나치게 도식화해 이해하는 측면도 없지 않지만, 3번에 걸쳐 같은 구조가 반복되다보니 마지막에 가서는 좀 형식적이라는 느낌이 든게 사실인지라.. ^^;;

어쨌거나, 저자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개인적인 감회와 시대를 읽는 분석적 사유를 상당히 성공적으로 배합해낸다. 그리스,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의 현대사는 좀 더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하는 내용이지만, 30년만의 해후를 담은 이 책에 그런 정보까지 요구하는건 별로 공정한 일은 아니리라. 다만, 독자의 이해를 위해 간략하게나마 각 나라의 현대사를 개괄하는 보너스 정도는 가능하지 않았나하는 아쉬움은 있다. 다른 때는 별로 도움도 안 되는 추천사 등등으로 책 두께만 늘리던 출판사들이 왜 이런 작은 친절에는 이렇게 야박한지. 투덜.

하지만, 책의 중심은 역시 그녀들의 재회 아닌가. 낯설었지만 따뜻했던 프라하에서의 유년 시절에 대한 향수와 친구들에 대한 애정, 그리고 그녀들의 생사도 모른채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의 안타까움은 저자의 섬세한 문체에 담겨 고스란히 읽는 이에게 전해진다. 그리스의 파란 하늘을 자랑스러워했던 리차, 다소 교조적(?)이었던 아냐, 그리고 총명한 야스나를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는건 저자의 그들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30여년의 시간과 굴곡진 역사가 그녀들의 삶을 변화시켰음에도, 그녀들 안에서 30년전 프라하에서의 "소녀시대"를 재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June 26, 2007

푸른 알약

푸른 알약
- 프레데릭 페테르스 지음/유영 옮김/세미콜론/11000원

감기에 걸렸다. 한동안 몸을 좀 혹사시켰다 싶더니, 어김없이 몸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감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내 몸이 아니라 내 몸에 침투한 바이러스다. 잠시 틈을 허락했더니 비집고 들어와 제 것도 아닌 몸을 이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콧물을 훌쩍이며 그 작고 바글바글한 것들(너무 작아 보이지는 않지만)에게 욕설을 퍼붓지만, 실질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병원에서 주사를 맞지 않으면 알약 몇 알에 의지하는 것 뿐이다. 참 무력하지 않은가.

감염. 질병. 죽음.

단어들이 낯설다. 나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진 것 같은 저 단어들. 아니, 어쩌면 그리 멀리 있지 않은데 그저 멀리 떨어져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두려움 때문이다. 일단 시작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무력함, 내 의지가 아닌 다른 무엇에 의해 나의 삶, 존재가 뒤틀려 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나를 두렵게 한다. 나는 나의 이 두려움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건 그저 (내 생각에) 아주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일 뿐이다.

하지만, 내 안의 두려움을 실제 사람에 투사할 때 이야기는 달라진다. 두려움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사람을 인간 이전에 어떤 질병의 덩어리, 보균자로 낙인찍고 소외시켜 버린다. 물론, 드러내놓고 배척할 정도로 "교양"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래봤자, 가장 흔한 반응, "이해하는 척하면서 경계하는 쪽"에 속할 뿐이다. 여기서 교양은 이해를 가장한 속물근성의 다른 이름이다.

감기에서 출발해서 너무 건너뛰어 버린 것 같은데,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이쯤에서 귀뜸해 두자면, 이 책은 에이즈 환자와의 사랑 이야기다. Fiction 이 아닌 작가 프레데릭 페테르스의 실제 이야기. 그가 사랑하는 여인 카티는 에이즈 환자이고, 그녀의 아들 역시 에이즈에 감염된 채 세상에 태어났다. 카티는 프레데릭과 가까워지면서 먼저 자신이 에이즈 환자임을 고백했고, 놀랍게도 프레데릭은 그런 그녀를 받아들인다. 그는 두렵지 않았던 것일까?

두렵다. 콘돔이 찢어진걸 발견한 날 그는 곧바로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의사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그가 감염될 확률은 길가다가 흰 코뿔소를 만날 확률과 같다고 말하지만, 길을 걸으며 뒤에서 코뿔소가 계속 따라오는 기분이 드는건 어쩔 수 없다. (만화적 상상력이 빛나는 장면이었다. 조용히 뒤따라 걸어오는 코뿔소라니!!) 하지만 그는 코뿔소가 쫓아올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힐끗 뒤를 돌아보며, 그 곳에 코뿔소가 없음을 확인하고 미소지을 뿐이다. 두려움의 근원을 아예 멀리 피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그 자체를 삶의 한 조건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 중심에는 물론 카티가 있다. 침대에 누운 채 카티가 프레데릭에게 왜 자기를 좋아하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왠만한 연인들 사이에 적어도 한 번씩은 오갔을 질문이지만, 카티가 묻고 싶은건 아마 더 깊숙한 질문이었을거다. 두렵지 않냐고. 감염될 위험을 무릅쓰고 왜 내 곁에 있는거냐고. 사실, 카티도 두렵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병을 안고 살아가는 아이에게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고, "당신마저 감염된다면, 난 정말 죄책감에서 헤어날 수 없을"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녀에게 프레데릭은 대답해 준다. 한 남자 한 여인에게서 발견하는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특별한 매혹을 느꼈음을.

프레데릭은 친구에게 카티와 자신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맞는 커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따금 20분의 1미리짜리 얇은 고무를 껴야 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그래 그건 그렇지.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을 만나는게 결코 흔한 일은 아니지. 그렇게 완벽한 반쪽을 만나기가 흰 코뿔소 만나기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쉽지는 않을지도. 프레데릭은 카티를 사랑하고, 그게 가장 중요한거다. 두려움은 그저 그들의 사랑을 둘러싼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전혀 개의치 않고 둘 만의 즐거운 대화를 즐기고 있는 표지그림처럼 말이다.

카티와 그녀의 아들은 아마 평생을 치료제와 항생제에 의지하며 질병과 싸우며 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푸른 알약은 결코 그들의 삶에 드리워진 고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삶의 한 조건이고, 그들은 담담히 그 조건을 받아들일 것이다. 아니, 어찌 보면 푸른 알약은 삶에 대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가방 가득 푸른 알약을 넣고 걸어오는 카티의 얼굴에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는건 그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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