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진기행 | Main |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

칠레의 모든 기록

칠레의 모든 기록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조구호 옮김/간디서원/12000원

1973년 9월 11일, 칠레의 대통령궁인 모네다 궁 위로 칠레 공군의 폭격기가 날아들었다. 대통령궁 주변은 이미 탱크로 포위되어 있었다. 폭격기는 자국의 대통령궁을 향해 폭탄을 투하했고, 불길과 연기가 솟아오르는 건물 안으로 탱크의 엄호 사격을 받은 보병들이 진입했다. 산발적인 저항이 있었지만, 막강한 화력을 지닌 군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통령궁을 장악했다. 그날 오후, 군사평의회는 짤막한 성명을 통해 칠레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교전 중 자살했다고 발표한다. 하지만 대통령의 처참한 주검을 목격했다는 증언들은 그가 교전 중 살해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쿠데타 이후 칠레는 독재자 피노체트의 치하에서 17년간의 길고 긴 암흑의 시대를 거치게 된다.

미겔 리틴. 살바도르 아옌데에 의해 국영 '칠레 영화'의 대표로 선임된 그는 쿠데타 직후 멕시코로 망명한다. 시간이 흘러, 피노체트 정권은 일부 망명자들에게는 칠레로 돌아올 것을 허용했으나 미겔 리틴의 이름은 영원히 입국을 허용치 않을 망명자 목록에 올라있었다. 칠레를 떠난지 12년만인 1985년, 미겔 리틴은 우루과이 출신의 사업가로 변장하고 칠레로 잠입한다. 12년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그는 6주에 걸쳐 여러 촬영 팀과 국내 비밀조직들의 힘을 빌어, 칠레의 현실을 카메라에 담는데 성공한다. 이 필름은 4시간짜리 TV 용 영화와 2시간짜리 극장용 영화로 만들어지는데, <칠레의 모든 기록>은 후자, 즉 2시간짜리 극장용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책 <칠레의 모든 기록>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미겔 리틴과의 인터뷰를 통해, 미겔 리틴이 칠레에 잠입하여 영화를 찍고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의 저자를 가르시아 마르케스라고 하는 것은 다소 어폐가 있어 보인다. 마르케스는 그의 수려한 문장으로 미겔 리틴의 여정을 글로 잘 담아냈지만, 궁극적으로 이 책은 마르케스의 이야기가 아닌 미겔 리틴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니, 미겔 리틴의 "모험담"이라기 보다는, 그가 잃어버린, 칠레인들이 잃어버린 새로운 사회의 꿈과 열정, 그리고 그들의 영원한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에 대한 기록이라고 보아야 한다.

목숨을 걸고 영화를 찍어야 했던 미겔 리틴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책은 마치 한 권의 첩보소설을 읽는 듯 스릴이 넘친다. 독재 정권의 코 밑에서 그들을 조롱하듯 영화를 찍는 과정은 묘한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건 맘 편하게 관조하는 배부른 독자의 감상일 뿐, 미겔 리틴의 독백을 지배하는건 슬픔과 분노의 정서다. 겉보기에는 번지르해진 산티아고의 이면에서 극심한 빈부격차에 허덕이는 민중들과 사방에서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이는 비밀경찰들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12년전 군부 쿠데타가 산산조각낸 조국의 현실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피노체트는 저항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했다. 피노체트 집권 17년 동안 약 3200여명이 정권에 의해 피살되고 수만명이 고문을 당했다. 이 공포 정치를 통해 칠레인들의 정치적 자유가 철저히 유린당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피노체트는 사회주의 정권을 쿠데타로 전복했음을 강조라도 하듯 극단적인 자유주의적 경제 정책들을 강행했다. 국영 기업, 광산 등을 민영화하고, 외국 자본의 무제한적인 투자를 허용하며, 예산 절감이란 명목 하에 사회보장제도들을 해체했다. 그 결과 칠레 사회의 빈부격차는 심화되었고 노동 인구의 상당 수를 차지하던 농민들과 광산 노동자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항상 그러하듯, 피노체트 자신을 비롯한 지배층은 부패할대로 부패하여 각종 부정한 방법들로 어마어마한 재산을 그러모았음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슬프게도, 피노체트 치하의 칠레는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80년 광주에서의 학살, 삼청교육대, 고문과 의문사 등은 우리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두 나라 모두에서 학살의 주범은 처벌받지 않았다. 피노체트는 스스로를 면책 특권을 지닌 종신 상원의원으로 만듦으로써 역사의 심판을 피해갔고, 우리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궤변으로 학살자에 대한 심판을 포기했다. 양쪽 모두 학살자에 대한 면죄가 "법"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정권이 바뀌고 세상이 변한 듯 해도, 권력은 여전히 그들 기득권 세력이 틀어쥐고 있다는걸 보여주고 있으니까.

또다시 광주의 그날이 돌아왔다. 27년째 같은 날이 돌아오지만, 여전히 억울한 이들의 눈물은 멈추지 않고 있다. 학살자들을 단죄하는 것은 결코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을 고통 속에서 사는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이며, 다시는 그 누구도 총칼로 정의를 유린할 수 없도록하는 미래의 약속이다. 피노체트는 결국 역사의 단죄를 받지 않고 죽었지만, 우리는 또 다시 칠레의 전례를 따르지 않길 바란다.

TrackBack

TrackBack URL for this entry:
http://www.turnleft.org/cgi/mt/mt-tb.cgi/1510

Post a comment

About

This page contains a single entry from the blog posted on May 18, 2007 10:58 PM.

The previous post in this blog was 무진기행.

The next post in this blog is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Many more can be found on the main index page or by looking through the arch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