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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무진기행
김승옥 지음/문학동네/11000원

한국 문학에 대체적으로 무관심했던(다시 말해, 무지했던) 나에게 김승옥이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우연히 <환상수첩>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고, 그가 "김승옥 전집" 이 나올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했던 작가였고 한국 근현대 문학사에 중요한 분기점을 만든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건 그 이후의 일이다. 마치 어느 차에 관심을 갖게 되면 길을 가다 "이 차가 이렇게 많았던가" 하며 놀라게 되는 것처럼, 김승옥을 알게 된 후로는 여기저기 글에서 그의 이름을 접하게 되어 새삼 놀라곤 했다. 그래서 결국, "김승옥 전집"의 첫 권인 <무진기행>을 집어들었다.

<무진기행>은 김승옥의 단편 모음이다. 그의 등단 작품인 '생명연습(1962)'을 시작으로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1979)'에 이르는, 1981년 급작스레 종교에 귀의하여 절필을 선언하기까지 그의 짧지 않은 이력의 주요 작품들이 고스란히 이 한 권에 담겨 있다. 때문에, 아마 전집의 다른 권에 실린 중편, 장편들도 중요하겠지만, 이 한권으로도 김승옥의 세계를 느끼기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초기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무진기행>에 실린 단편들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다. "현대적"이라 함은 두 가지 의미에서인데, 첫째는 김승옥이 구사하는 언어의 측면에서이고, 둘째는 그가 짚어내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오늘날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이다. 그가 등단한 1962년은 일제로부터 독립한지 채 20년도 되지 않은 시점인데(지금으로부터는 40년도 더 지났는데), 내가 읽었던 일제 시대 문학들에 비해 김승옥의 언어는 훨씬 오늘날의 한글 문체에 근접해있다. 이는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도 한국 문학이 빠른 시일 내에 일본어 잔재를 털어내고 현대적 국어 문법을 정립했다는걸 뜻하는데, 아마 이 시기 문인들과 국문학자들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고 있자면, 이어령씨가 김승옥을 무척 아꼈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 김승옥의 현대성(?)은 그닥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그의 소설에서 묻어나는 냉소와 회한의 정서, 그리고 성애(性愛)에의 집착 등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충분히 공감을 불러일으킬만 하다. 이는 김승옥이 그의 시대에 이미 사회 속에서 파편화된 개인의 실존의 문제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김승옥이 시대를 앞서갔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가 자신의 시대와 정면으로 대면하길 거부했다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의 소설에서는 시대를 읽어내기가 어렵다. 그가 그려내는 삶은 대개 회색 공간 속을 살아가는 회색 인간들 뿐이다. 왜일까.

순전히 추론일 뿐이지만, 나는 그것이 긴 정치적 암흑기가 한국 문학에 드리운 질곡의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시대정신의 산물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예술은 시대정신의 산물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온 몸으로 시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배설한다. 하지만 외부의 권력이 그 시대정신의 형상화를 가로막을 때,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은 넓지 않다. 고난의 길을 걷던가, 도피하던가. 김지하가 전자의 길을 택했다면, 김승옥은 후자의 길을 택했을 것이다. 숲을 잊기 위해 나무에 몰입하는 것처럼, 개인의 삶에 천착하는 것 말이다. 성(性)의 문제로 도피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 도피는 영원할 수 없었다. 80년 광주의 충격 앞에 그는 결국 펜을 꺾었고, 어느날 문득 하나님의 품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쨌거나, 이 책 <무진기행>에서는 저릿저릿한 글들을 여럿 만날 수 있다. 오늘날의 쿨하고 트렌디한 소설들에서는 감히 발견하기 힘든 무게감이 실린다.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무진기행>, <들놀이>(나는 이 소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염소는 힘이 세다>, <서울의 달빛 0章> 등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글은 권두에 실린 "작가의 말"이다. 안타깝지만, 그의 절필과 함께 <무진기행>을 쓴 작가 김승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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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

zuzana:

가끔 들러보곤 하는데, 정말 책을 많이 읽으시네요. 반성반성;; 독후감?서평? 아무튼 이런 글을 읽으면 막 이 책이 읽고싶어져요. 오늘은 무진기행에 꽂혔습니다. 후후.

수띵:

권 수가 뭐 중요한가요 뭐. 얼마나 제대로 읽냐가 중요하죠. z/n 두 분 모두 책 읽는 내공이 출중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

근처에 계시면 책도 빌려드리고 할텐데, 미 대륙 가로질러 대서양 건너는 너무 멀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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