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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07 Archives

May 12, 2007

무진기행

무진기행
김승옥 지음/문학동네/11000원

한국 문학에 대체적으로 무관심했던(다시 말해, 무지했던) 나에게 김승옥이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우연히 <환상수첩>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고, 그가 "김승옥 전집" 이 나올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했던 작가였고 한국 근현대 문학사에 중요한 분기점을 만든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건 그 이후의 일이다. 마치 어느 차에 관심을 갖게 되면 길을 가다 "이 차가 이렇게 많았던가" 하며 놀라게 되는 것처럼, 김승옥을 알게 된 후로는 여기저기 글에서 그의 이름을 접하게 되어 새삼 놀라곤 했다. 그래서 결국, "김승옥 전집"의 첫 권인 <무진기행>을 집어들었다.

<무진기행>은 김승옥의 단편 모음이다. 그의 등단 작품인 '생명연습(1962)'을 시작으로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1979)'에 이르는, 1981년 급작스레 종교에 귀의하여 절필을 선언하기까지 그의 짧지 않은 이력의 주요 작품들이 고스란히 이 한 권에 담겨 있다. 때문에, 아마 전집의 다른 권에 실린 중편, 장편들도 중요하겠지만, 이 한권으로도 김승옥의 세계를 느끼기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초기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무진기행>에 실린 단편들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다. "현대적"이라 함은 두 가지 의미에서인데, 첫째는 김승옥이 구사하는 언어의 측면에서이고, 둘째는 그가 짚어내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오늘날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이다. 그가 등단한 1962년은 일제로부터 독립한지 채 20년도 되지 않은 시점인데(지금으로부터는 40년도 더 지났는데), 내가 읽었던 일제 시대 문학들에 비해 김승옥의 언어는 훨씬 오늘날의 한글 문체에 근접해있다. 이는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도 한국 문학이 빠른 시일 내에 일본어 잔재를 털어내고 현대적 국어 문법을 정립했다는걸 뜻하는데, 아마 이 시기 문인들과 국문학자들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고 있자면, 이어령씨가 김승옥을 무척 아꼈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 김승옥의 현대성(?)은 그닥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그의 소설에서 묻어나는 냉소와 회한의 정서, 그리고 성애(性愛)에의 집착 등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충분히 공감을 불러일으킬만 하다. 이는 김승옥이 그의 시대에 이미 사회 속에서 파편화된 개인의 실존의 문제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김승옥이 시대를 앞서갔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가 자신의 시대와 정면으로 대면하길 거부했다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의 소설에서는 시대를 읽어내기가 어렵다. 그가 그려내는 삶은 대개 회색 공간 속을 살아가는 회색 인간들 뿐이다. 왜일까.

순전히 추론일 뿐이지만, 나는 그것이 긴 정치적 암흑기가 한국 문학에 드리운 질곡의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시대정신의 산물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예술은 시대정신의 산물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온 몸으로 시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배설한다. 하지만 외부의 권력이 그 시대정신의 형상화를 가로막을 때,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은 넓지 않다. 고난의 길을 걷던가, 도피하던가. 김지하가 전자의 길을 택했다면, 김승옥은 후자의 길을 택했을 것이다. 숲을 잊기 위해 나무에 몰입하는 것처럼, 개인의 삶에 천착하는 것 말이다. 성(性)의 문제로 도피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 도피는 영원할 수 없었다. 80년 광주의 충격 앞에 그는 결국 펜을 꺾었고, 어느날 문득 하나님의 품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쨌거나, 이 책 <무진기행>에서는 저릿저릿한 글들을 여럿 만날 수 있다. 오늘날의 쿨하고 트렌디한 소설들에서는 감히 발견하기 힘든 무게감이 실린다.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무진기행>, <들놀이>(나는 이 소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염소는 힘이 세다>, <서울의 달빛 0章> 등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글은 권두에 실린 "작가의 말"이다. 안타깝지만, 그의 절필과 함께 <무진기행>을 쓴 작가 김승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May 18, 2007

칠레의 모든 기록

칠레의 모든 기록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조구호 옮김/간디서원/12000원

1973년 9월 11일, 칠레의 대통령궁인 모네다 궁 위로 칠레 공군의 폭격기가 날아들었다. 대통령궁 주변은 이미 탱크로 포위되어 있었다. 폭격기는 자국의 대통령궁을 향해 폭탄을 투하했고, 불길과 연기가 솟아오르는 건물 안으로 탱크의 엄호 사격을 받은 보병들이 진입했다. 산발적인 저항이 있었지만, 막강한 화력을 지닌 군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통령궁을 장악했다. 그날 오후, 군사평의회는 짤막한 성명을 통해 칠레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교전 중 자살했다고 발표한다. 하지만 대통령의 처참한 주검을 목격했다는 증언들은 그가 교전 중 살해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쿠데타 이후 칠레는 독재자 피노체트의 치하에서 17년간의 길고 긴 암흑의 시대를 거치게 된다.

미겔 리틴. 살바도르 아옌데에 의해 국영 '칠레 영화'의 대표로 선임된 그는 쿠데타 직후 멕시코로 망명한다. 시간이 흘러, 피노체트 정권은 일부 망명자들에게는 칠레로 돌아올 것을 허용했으나 미겔 리틴의 이름은 영원히 입국을 허용치 않을 망명자 목록에 올라있었다. 칠레를 떠난지 12년만인 1985년, 미겔 리틴은 우루과이 출신의 사업가로 변장하고 칠레로 잠입한다. 12년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그는 6주에 걸쳐 여러 촬영 팀과 국내 비밀조직들의 힘을 빌어, 칠레의 현실을 카메라에 담는데 성공한다. 이 필름은 4시간짜리 TV 용 영화와 2시간짜리 극장용 영화로 만들어지는데, <칠레의 모든 기록>은 후자, 즉 2시간짜리 극장용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책 <칠레의 모든 기록>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미겔 리틴과의 인터뷰를 통해, 미겔 리틴이 칠레에 잠입하여 영화를 찍고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의 저자를 가르시아 마르케스라고 하는 것은 다소 어폐가 있어 보인다. 마르케스는 그의 수려한 문장으로 미겔 리틴의 여정을 글로 잘 담아냈지만, 궁극적으로 이 책은 마르케스의 이야기가 아닌 미겔 리틴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니, 미겔 리틴의 "모험담"이라기 보다는, 그가 잃어버린, 칠레인들이 잃어버린 새로운 사회의 꿈과 열정, 그리고 그들의 영원한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에 대한 기록이라고 보아야 한다.

목숨을 걸고 영화를 찍어야 했던 미겔 리틴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책은 마치 한 권의 첩보소설을 읽는 듯 스릴이 넘친다. 독재 정권의 코 밑에서 그들을 조롱하듯 영화를 찍는 과정은 묘한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건 맘 편하게 관조하는 배부른 독자의 감상일 뿐, 미겔 리틴의 독백을 지배하는건 슬픔과 분노의 정서다. 겉보기에는 번지르해진 산티아고의 이면에서 극심한 빈부격차에 허덕이는 민중들과 사방에서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이는 비밀경찰들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12년전 군부 쿠데타가 산산조각낸 조국의 현실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피노체트는 저항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했다. 피노체트 집권 17년 동안 약 3200여명이 정권에 의해 피살되고 수만명이 고문을 당했다. 이 공포 정치를 통해 칠레인들의 정치적 자유가 철저히 유린당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피노체트는 사회주의 정권을 쿠데타로 전복했음을 강조라도 하듯 극단적인 자유주의적 경제 정책들을 강행했다. 국영 기업, 광산 등을 민영화하고, 외국 자본의 무제한적인 투자를 허용하며, 예산 절감이란 명목 하에 사회보장제도들을 해체했다. 그 결과 칠레 사회의 빈부격차는 심화되었고 노동 인구의 상당 수를 차지하던 농민들과 광산 노동자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항상 그러하듯, 피노체트 자신을 비롯한 지배층은 부패할대로 부패하여 각종 부정한 방법들로 어마어마한 재산을 그러모았음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슬프게도, 피노체트 치하의 칠레는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80년 광주에서의 학살, 삼청교육대, 고문과 의문사 등은 우리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두 나라 모두에서 학살의 주범은 처벌받지 않았다. 피노체트는 스스로를 면책 특권을 지닌 종신 상원의원으로 만듦으로써 역사의 심판을 피해갔고, 우리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궤변으로 학살자에 대한 심판을 포기했다. 양쪽 모두 학살자에 대한 면죄가 "법"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정권이 바뀌고 세상이 변한 듯 해도, 권력은 여전히 그들 기득권 세력이 틀어쥐고 있다는걸 보여주고 있으니까.

또다시 광주의 그날이 돌아왔다. 27년째 같은 날이 돌아오지만, 여전히 억울한 이들의 눈물은 멈추지 않고 있다. 학살자들을 단죄하는 것은 결코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을 고통 속에서 사는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이며, 다시는 그 누구도 총칼로 정의를 유린할 수 없도록하는 미래의 약속이다. 피노체트는 결국 역사의 단죄를 받지 않고 죽었지만, 우리는 또 다시 칠레의 전례를 따르지 않길 바란다.

May 26, 2007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 오주석 지음/솔/18000원

한국 사회가 "민족"이라는 단어에 반응하는 방식은 상당히 모순적이다. 외형적으로 우리에게 "민족"은 불가침의 성역이다. 특히 역사 문제에 있어 민족의식은 가히 맹목적이라 할 만한데, 뿌리 깊은 반일 감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단고기> 류의 허황된 이야기에 열광하는 사람들조차 많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민족 문화에 대한 관심은 말 그대로 거의 無관심에 가깝다. 그나마 우리가 우리 역사에서 자랑스러워하는 것들은 대개 "세계 최초", "세계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들이다. 그 외의 것들은? 모른다. 다른 문화에 비해 비교우위를 가지지 않으면 아예 관심을 가질 가치조차 없다는 듯이.

한민족에 관한 신화가 주장하는 것처럼 단군으로부터 시작해 내려오는 단일 핏줄이라는 혈통주의적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나는 "민족"을 한반도라는 공간적 틀을 중심으로 수천년에 걸쳐 이어진 문화적 공동체라고 이해하고 있다. 수백 세대에 걸쳐 삶이 이어지면서 거기서 사회가 형성되고 정치체(政治體)가 만들어지고 예술이 꽃피니, 그것이 우리의 민족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문화는 (다른 어느 문화와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축적해 온 세계관의 산물이다. 각 문화가 저마다의 역사와 세계관을 갖기 마련이거늘, 이런 문화를 서로 비교하여 우열을 가린다는건 얼마나 우매한 짓인가.

예컨데, 우리가 흔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자랑하는 <직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직지>는 분명 서구의 구텐베르크 활자본보다 "오래되었지만", 사실 우리 문화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 일회적 산물일 뿐이다. <직지> 이후에도 우리 문화에서는 대부분 목판인쇄가 사용된 반면, 오히려 구텐베르크 활자본은 서적(특히 성서)을 대량 생산하는 길을 열어 근대 서구 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이렇듯 문화사적 의의가 전혀 다른 이 두 유물을 비교하며 단지 시기적으로 더 앞섰다는 이유만으로 <직지>를 우리의 대표적인 문화 유산으로 자랑한다는건, 그만큼 우리가 우리 문화를 스스로의 시각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외부와의 비교 우위라는 시각에서만 바라본다는 증거가 된다.

사실 이러한 민족 문화 인식은 민족과 국가를 등치시켜 국민 동원의 기제로 활용했던 개발/군사 독재 시대의 잔재이다. 모든 학생들에게 암송하게 했던 국민교육헌장의 첫 구절이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으로 시작했듯이, 당시 독재 정권이 근대화를 지상 과제로 설정하며 국민들을 호명하는 방식은 "민족"이라는 이름을 통해서였다. 전국의 사찰과 옛 건물들이 복원이라는 미명 하에 획일적인 양식으로 틀지워지고, '한민족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는 문화 유산들을 선별하여 "세계 최초/최고" 등의 수식어를 붙이기 시작한게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하지만 우리 문화를 우리 문화 자체의 맥락에서 그 생명력을 찾기보단, 밖에 내보여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식의 외형적 자긍심을 강조한 문화 정책은 오히려 많은 우리 예술품들의 참 가치를 사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그렇게 껍데기만 남은 문화에 누가 진심으로 애정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흐름이 그나마 바뀌기 시작한건 민주화 이후, 아마도 90년대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이후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서문에 나왔던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우리 문화를 외형적 결과물로만 보는게 아니라 그 근본을 알고 이해하려 노력할 때 비로서 그 참 가치가 드러난다는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여러 저자들이 우리 문화에 대한 쉬우면서도 깊이 있는 책들을 내놓으면서, 우리 문화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높이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 관심 있게 보고 있는 웹툰 <도자기> 같은 만화도 그 중 하나.

고 오주석 선생님도 우리 민족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다방면으로 힘써오신 분이다. 이 책은 오주석 선생님의 강연을 책으로 옮겨놓은 것인데, 읽고 있자면 청중의 관심을 이끌어내면서 이야기를 감칠 맛나게 끌어나가는 능력이 일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간혹 언뜻 내비치는 과도한 민족 의식이 약간 불편하긴 하지만, 그런 민족 의식이 맹목적인 칭송이 아닌 깊이 있는 이해에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우리 옛 그림을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살펴본건 처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인데, 아무래도 우리 전통 문화(특히 조선 시대)의 근저에 깔린 성리학적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그 세계관을 반영한 작품들 역시 그 지향점에 얼마만큼의 깊이로 다가서냐의 차이가 있을 뿐, 하나의 커다란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서구의 예술이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철학과 사조들이 충돌해가며 변증법적으로 발전해 온 것과는 대조적이다.

여기에서 오늘날의 문화가 과거의 문화와 섞이는 방식의 차이가 발생한다.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세계관이 급격히 변화할 때 단절이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시대를 거쳐 미국의 절대적 영향 하에 비주체적 근대화를 이룬 우리 역사에서 이 단절은 치명적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며 발전한 서구의 예술이 그 연속성을 유지하며 현대 예술 속에 녹아 있는 반면, 우리의 문화는 그 본래의 뜻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단절의 간극이 너무 커서 서구화된 오늘날의 문화와 쉽게 조화시키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간극을 뛰어넘는 것, 그것이 앞으로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다.

May 29, 2007

한밤의 작가사전

한밤의 작가사전
- 마뉘엘라 모르겐느 지음/클레르 뒤부아 그림/김주경 옮김/파랑새어린이/8000원

밤이다.

모두가 까맣게 잠든 이 밤, 뷔바르와 리코셰 형제는 오늘도 부모님 서재에서 작가들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A 부터 Z 까지, 그러니까 아폴리네르에서 졸라까지 알파벳 순으로 매일밤 한 명씩(XY는 합쳐서 작자미상 으로 처리했지만) 만나는 이 여행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며 아이들을 작가들의 삶이나 그들의 작품 속으로 이끈다. 시작하는 A는 까마득히 높은 제일 높은 책장에서 시작했지만, 끝에 다다라서는 제일 낮은 책장에 어렵지않게 손을 닿을 수 있다. 그만큼 아이들에게 문학이라는 문턱도 낮아졌겠지.

요슈타인 가아더의 <마법의 도서관> 같은 책을 언뜻 연상시키지만, 그보다는 훨씬 가벼운, 일종의 문학 입문서 같은 소설이다. 진지한 독자들로서는 책이 제공하는 작가나 작품에 대한 정보가 너무 단편적이라 아쉽겠지만, 아이들에게 특정 작가나 작품에 흥미를 느끼게 하기에는 좋을 것 같다. 매일 밤 부모님 몰래 모험을 떠난다는 설정 역시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생각해보면 한국 문학이든 서구 문학이든 "고전"이라는 이름이 너무 거창하게 느껴져 어려서부터 쉬이 접근을 못했던 것 같다. 책 도매업을 하셨던 친척 덕에 집에 세계 명작 전집을 비롯하여 몇 질의 전집류가 있었는데, 에이브(ABE) 시리즈의 책들이 어린 시절 내 상상력의 원천이 된 반면 세계 명작 전집은 손을 거의 못 댔었다. 언뜻 보기에도 짙은 갈색의 장정이 너무 어려워 보였거든. 그 때 이런 식의 입문서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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