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원을 팝니다 | Main | 무진기행 »

빅 슬립

빅 슬립(Big Sleep)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박현주 옮김/북하우스/9500원

"일단 죽으면 어디에 묻혀 있는지가 중요할까? 더러운 구정물 웅덩이든, 높은 언덕 꼭대기의 대리석 탑이든 그게 중요한 문제일까? 당신이 죽어 깊은 잠에 들게 되었을 때, 그러한 일에는 신경쓰지 않게 된다. 기름과 물은 당신에게 있어 바람이나 공기와 같다. 죽어버린 방식이나 쓰러진 곳의 비천함에는 신경쓰지 않고 당신은 깊은 잠에 들게 되는 것뿐이다."

빅 슬립(Big Sleep)은 죽음을 뜻한다. '영원히 잠들다'라는 표현처럼, 이 제목도 죽음이란 단어를 순화한다. 하지만 정말 죽음은 그저 깊고 긴 잠에 불과할까. 이 혼란스런 세계 속에 누군가가 죽는다는건 어떤 의미를 지닐까. 선은 승리하고 악은 단죄받는다는건 그저 옛 이야기. 별 볼 일 없지만 그래도 삶의 긍지로 눈빛이 빛나던 사람은 죽어 웅덩이 속에 썩어가고, 아무렇지 않게 남의 시체를 밟고 선 타락한 눈빛의 그들은 흥청거리며 살아가는 비열한 세계여. 고작 하루 이십오불의 비용으로 생사의 경계 속에서 총탄 사이를 누비는 까닭은 혹 차라리 죽음으로 자기가 어떤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은게 아니었을까.

트렌치 코트와 중절모, 우수에 잠긴 눈빛으로 시니컬한 독백을 내뱉는 이 남자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영웅이다. 올드 팬들에게는 험프리 보가트의 이미지로 더 친숙할 그의 이름은 필립 말로. 요즘 말로 하자면 까칠하다고 할 수 있을 이 남자에게는 하지만 냉소 뒤에 숨겨진 슬픈 미소가 엿보인다. 하긴, 냉소의 본질은 분노보다는 슬픔에 가까울지 모른다. 착한 사람들은 힘없이 당하고만 마는 세상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건 아무 것도 없다는 무력감. 필립 말로의 독설은 그 세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막일테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자신의 첫 장편 <빅 슬립>에서 창조한 이 인물은 돈이 지배하고 가치가 무너진 시대의 산물이다. 악을 단죄하고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과거 탐정/추리소설의 이상과는 달리, 필립 말로는 자신의 행위가 정작 세상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정의는 승리하기는 커녕, 그저 살아남기 급급할 뿐이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패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물러서는 대신 세계를 향해 온 몸으로 부딛히고 부서지기 때문이다. 비정한 세계는 너무도 견고하여 때로 그는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을 지켜내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망신창이가 된 몸 속에서 그의 정신은 여전히 밝게 빛난다. 비록 공허해진 가슴을 술로 달래야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독한 위스키로도 쓸어내릴 수 없는 씁쓸한 세계는 고통스럽다.

TrackBack

TrackBack URL for this entry:
http://www.turnleft.org/cgi/mt/mt-tb.cgi/1502

Post a comment

About

This page contains a single entry from the blog posted on April 30, 2007 3:36 PM.

The previous post in this blog was 낙원을 팝니다.

The next post in this blog is 무진기행.

Many more can be found on the main index page or by looking through the arch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