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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07 Archives

April 11, 2007

Fear and Loathing in Las Vegas

Fear and Loathing in Las Vegas : A Savage Journey to the Heart of the American Dream
Hunter S. Thompson 지음/Vintage/$12.95

1969년 12월 6일, 북부 California 에 위치한 Altamont Speedway 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원래 San Francisco의 Golden Gate Park 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Free Concert 였지만, Rolling Stones가 공연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군중이 몰릴 것을 두려워한 주정부는 공연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공연 장소는 San Francisco 동쪽 Tracy와 Livermore 사이에 위치한 Altamont Speedway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공연 시작 20시간 전에야 공연 장소가 확정되면서 Altamont Free Concert는 이미 비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화장실이나 의료 시설 등은 몰려든 사람들을 감당하기엔 너무도 부족했고, 급조된 낮은 무대와 열악한 음향 시설은 사람들이 무대 앞쪽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환경을 제공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비극의 씨앗은, 당시 공연의 안전요원 역할로 Hell's Angels 라는,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오토바이 갱단이 고용된 것이었다.(Rolling Stones의 로드 매니저였던 Sam Cutler가 이들을 고용했다고 한다) Hell's Angels는 Harley-Davidson 같은 대형 오토바이에 가죽 재킷을 입고 다니는 근육질의 마초 집단을 생각하면 되는데, 이들의 복장이 Rolling Stones의 리더였던 믹 재거와 유사한 스타일인데다가 Hell's Angels 가 가지고 있던 "무법자" 이미지가 기성 세계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미 Rolling Stones는 런던 공연에서 Hell's Angels를 고용하여 사고 없이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던터라, 별 고민 없이 Hell's Angels를 고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했던 것은, 영국의 Hell's Angels에 비해 미국의 Hell's Angels 는 훨씬 더 폭력적이고 과격한 집단이었다는 사실이다.

공연이 무르익어 갈수록 무대 앞쪽으로 모여드는 관중들과 그 앞을 지키던 Hell's Angels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Rolling Stones가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하던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고야 만다. 무대 앞 한 쪽에서 Hell's Angel과 충돌을 빚던 Meredith Hunter라는 18살 흑인 청년이 총을 꺼내들었고, Hell's Angel 중 한 명에게 찰과상을 입힌 후, 자신은 그들의 칼에 찔려 사망한 것이다. 이 청년이 살해되는 광경은 공연 실황을 녹화하던 카메라에 그대로 잡혀 후에 "Gimme Shelter"라는 다큐멘터리 필름에 실리게 된다. Rolling Stones는 후에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 공연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한다.

Altamont는 불과 4개월 전 열린 Woodstock Festival 에서 최고조에 올랐던 60년대 미국 청년 운동의 기치, 즉 평화와 사랑이라는 메세지를 일거에 무너뜨렸다. San Francisco를 기점으로 동쪽으로 번져나가던 이 젊은 문화는 총 대신 꽃을, 전쟁 대신 사랑을 나눌 것을 외치며 이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Altamont은 이 사랑과 평화의 메세지가 폭력, 그것도 내부의 폭력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마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말았던 것이다. 스스로의 가치를 부정해버린 이 반문화는 결국 스스로 붕괴해버리고 말고, 이후 미국의 젊은이들은 자기 보신을 최우선으로 하는 개인주의 문화로 돌아서버리고 만다. 결국, Altamont는 60년대의 종언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 된 것이다.

Fear and Loathing in Las Vegas의 부제는 A Savage Journey to the Heart of the American Dream(어메리칸 드림의 심장을 향한 잔인한 여행)이다. 여기서 American Dream의 의미는 중의적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황금 만능주의, 일확천금의 꿈을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60년대의 반문화(counter culture)/마약문화(drug culture)가 추구했던 새로운 미래를 의미하기도 한다. Las Vegas는 60년대 젊은이들이 꿈꿨던 새로운 미래(사랑과 평화로 충만한 세계)가 무너진 폐허 위로, 일확천금의 허황된 꿈이 마천루처럼 솟아오른 타락한 American Dream의 상징이 된다.

60년대의 반문화는 동시에 마약문화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세대에게 마약은 오늘날처럼 쾌락이나 현실도피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마약을 통해 정신적 고양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고양 상태를 통해 이기심과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잊고 사랑과 평화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기를 바랬다. 이와 같은 낙천적 인식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어떻게 광범위하게 퍼져갔는지, 그리고 그것이 Altamont에서 어떻게 급격히 무너졌는지를 저자는 이 책의 8장에서 절묘한 은유를 통해 표현해낸다.

이 장에서 주인공은 과거 자신이 처음으로 마약을 복용했던 때를 되돌아본다. LSD에 취한 채 그는 차를 몰아 동쪽을 향하지만 이내 길을 잃고 만다. 하지만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면서도 그는 불안해하지 않는다. 어디로 향하던 거기에는 역시나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고, 거기서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잠식당하지 않았기에 그는 해방감에 가득 차서 바람을 맞으며 길을 달린다. 귓전을 스치는 바람과 음악의 비트에 취해 그의 마음은 점점 거대한 파도를 타고 높이 날아오른다. 그리고 그 파도가 최고점에 도달한 순간, 파도는 벽에 부딛혀 급격히 튕겨나와 부서지고 만 것이다.

1971년 쓰여진 이 소설은 바로 60년대의 폐허 위에 서 있다. 이 잃어버린 American Dream 을 찾기 위해 두 주인공은 그들의 여정을 온갖 마약과 알콜에 곤죽이 된 채로 시작한다. 하지만 한 때 그들이 마약을 통해 찾았던 낙천적인 희망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마약에 흐릿해진 의식에 비친 세계는 온통 불안과 공포 뿐이다. 검은 하늘은 거대한 박쥐 무리가 되어 덮쳐오고, 여행 내내 주인공은 언제 잡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기만한다. American Dream의 상징이라는 Las Vegas는 결코 그들이 기억하는 American Dream의 땅이 아니었고, 더 이상 그들은 자신들의 American Dream을 찾지 못한채 좌충우돌 광폭한 여정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미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약이라는 소재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 책은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와 비교될 수 있다. 하지만 두 소설은 정반대의 방향을 향한다. 류의 소설이 마약을 통한 현실도피에서 각성/희망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마약을 통한 각성/희망에서 절망을 향하는 이야기다. 이 절망은 60년대를 거쳐 70년대에 들어선 젊은이들이 하나같이 공유했던 아픔이었다. 한 때 세계를,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그들을 이끌었지만, 이제 그 방향타가 사라진 땅에서 그들은 그저 목숨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약은 전진이 아닌 퇴행, 현실도피의 수단이 되어버릴 뿐이다.

1971년 Rolling Stone 지에 2회에 나누어 연재된 이 소설은 시대의 아픔과 혼란, 절망을 고스란히 담아내어 그 시대의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60년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때의 젊은이들은 어느덧 나이가 들어 과거의 꿈을 잃어버린채 그저 오늘을 살아갈 뿐이다. 마치 마약을 통해 한껏 부풀어 올랐던 마음이 약기운이 물러나면 몇 배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맞닥뜨려야 하는 것처럼, 이들에게 60년대의 꿈이 급격히 사라진 채 맞이해야 했던 70년대는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미래는 희망이 아니라 불안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저자 Hunter S. Thompson은 2005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ps. 1998년, 이 소설은 Terry Gilliam 감독, Johnny Depp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소설의 시대적 맥락은 무시한채 마약에 취한 효과를 시각화하는데 치중하여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참담한 실패를 겪는다.

ps2. 이 책은 여러가지 면에서 내 독서습관을 많이 흔들어 놓았다. 우선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경우, 실제 예약한 책이 내 손에 들어오는 날짜가 제 멋대로라서 내키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다른 책을 밀쳐두고 읽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어로 된 책은 내용 외에 신경써야 하는게 너무 많아 몰입이 어렵다.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April 16, 2007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 : 만화로 보는 한국 현대 인권사
이정익 지음/길찾기/9800원

이 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일단 조금은 부담스러운 저 제목을 지나쳐 바로 부제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만화로/보는/한국/현대/인권사... 라니. 만화라는건 알겠는데, 한국 현대사라는건 알겠는데, 마지막 "인권사"라는 단어가 쉽게 혀에 감기지가 않는다. 그냥 현대사도 아닌 현대 인권사.

기본적으로 역사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의 기록이지만, 그 기록이 결코 가치중립적인 "객관적" 기록은 아니라는 사실은 오늘날 더 이상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같은 사실도 그것이 어떠한 맥락 속에 놓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진리값을 가지기 마련이다. 때문에 역사는 그것을 기록한 이의 사관에 많은 부분을 기댈 수 밖에 없다. 불행히도, 이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역사는 학문의 영역에서 일정 부분 벗어나 정치의 영역, 권력 투쟁의 장으로 이끌려오게 된다. 어느 쪽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록하고 해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학문의 논리가 아닌 헤게모니 투쟁이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인식에 반기를 든 학파가 실증주의다. 실증주의는 객관적 사실에 최대한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맥락을 죽이고, 실제 벌어진 일들 자체를 기록하라는 주문.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복합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이러한 현실에 접근할 경우, 대개 우리는 건조한 팩트들 속에 매몰되어 길을 잃고 만다.

예컨데,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병하고 수탈한 것도 하나의 팩트고, 그들이 조선 땅에 철도를 놓고 공장을 세운 것 역시 동등한 진리치를 지닌 팩트가 된다. 이 팩트들만 놓고 보면 일제가 우리를 강점하여 수탈했다는 주장과 그들이 조선을 근대화했다는 주장 모두 각자 나름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마찬가지의 논리 구조는 박정희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켰다는 주장과 박정희가 산업화를 이루었다는 주장이 모두 옳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실증주의는 역사의 모든 교훈을 무화시킨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아니 정확히는 옳고 그른 것은 없고 그저 모두 팩트만이 남을 뿐이라는 이 역사관은 역사적 책임을 묻고 그 죄과를 가리고자 하는 모든 시도들을 희석시키고 만다. 일견 "객관적"으로 보이는 실증주의가 현실 속에서는 전혀 객관적이지 못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특히 멀지 않은 가까운 과거,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말이다. 실증주의적 역사인식을 가장 강조하는 집단이 조선일보를 위시한 극우세력과 그들을 보위하는 지식인들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때문에, "인권사"는 길을 잃은 현대사 논란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기 위한 시도가 될 수 있다. 그건 우리가 '인간'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버스럭거리며 부서지는 팩트들 사이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건 인간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역사이다. 이 책이 "인권사"라는 부제를 달고 말하려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리라. 유신정권의 칼날이, 인혁당 사건의 억울한 외침이, 그리고 80년 광주의 총성이 결코 다른 사실들(경제 발전? 안정?)과 같은 무게를 가질 수 없는건 바로 인간의 피가 홍건히 베어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정공법이다. 가해자는 침묵하는데 피해자가 오히려 화해를 구걸하고, 그들 중 일부가 마치 대표인 양 용서를 선언하는 우스꽝스러운 현실에 날리는 따끔한 일침이다. 만화의 형식을 취하지만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애니메이션 전공의 작가가 그려내는 그로테스크한 화면은 그 무게를 적절히 담아낸다. 전체적으로 구성이 꽉 짜이지 못한 듯한 느낌도 주지만, 모든 것이 가벼운 이 시대에 78년생이라는 어린(?) 작가가 그려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받아야 할 것이다. Epilogue를 읽고 나서, 앞서 지나친 제목으로 다시 눈을 돌린다.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라는 제목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절규였다.

April 28, 2007

낙원을 팝니다

낙원을 팝니다 : 지구의 미래를 경험한 작은 섬 나우루
칼 N. 맥대니얼,존 M. 고디 지음/이섬민 옮김/여름언덕/9800원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를 꿈꾼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야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바지만, 이 전지구적 시스템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낸다는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주의가 초래한 전지구적 환경 파괴 앞에서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과제는 그 절박함만큼이나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

과거 이념의 세기에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하나의 대안으로 생각했었지만,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야 제대로 알려진 사회주의의 실상은 자본주의보다 심각하면 심각했지 더 나을 것은 없었다. 친환경 낙원을 선전하던 동독의 영토 구석구석은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오염되어 있었고, 무리한 계획 농업의 추진으로 토지의 지력 등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자연은 스스로의 재생력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지속 불가능한" 시스템이라는 측면에서는 자본주의와 다를 것이 없었다.

사회주의라는 대안 모델이 붕괴하자, 많은 학자들이 다른 대안 모델을 찾기 위해 관심을 돌린 분야가 바로 인류학이다. 우리가 흔히 세계사라 칭하며 배우는 인류의 역사는 사실 서구 문명의 역사일 뿐이다. 같은 시기 지구의 구석구석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문화와 사회가 수천년간 안정적인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서구의 총칼 앞에 자신들의 문화를 강제로 포기해야 했던 이들 사회가 어떻게 수천년간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는가를 재조명 함으로써, 인류학은 인간이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고 유지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코자 했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 나우루의 역사는 지속 가능한 사회의 한 사례이자, 자본주의가 어떻게 그 지속 가능성을 파괴하는지를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나우루는 사실 사람이 살기에 좋은 땅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나우루인들은 생존의 방법을 찾아내었고, 적절한 인구를 유지하며 수천년간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며 살아왔다. 하지만 18세기 서구인들의 등장과 함께 모든 것은 바뀌기 시작했다. 서구인들과 함께 들어온 총기류들은 과거 원만히 해결했을 분쟁들을 내전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특히 20세기 초 나우루에 엄청난 양의 양질의 인광석이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나우루는 서구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하고 만다.

오스트레일리아, 독일, 그리고 일본이 번갈아 점령한 후 나우루는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유엔의 신탁통치 결정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의 신탁통치를 받는다. 이 기간 동안 나우루인들은 서구 열강에 일방적으로 수탈되어 오던 인광석 자원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서서히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8년 독립과 함께 나우루인들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나우루는 섬의 유일한 자원인 인광석을 판매하면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한 부분으로 남을 수도 있었고, 아니면 과거처럼 자급자족의 사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전자는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보장했지만 언젠가 인광석이 고갈되면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명백했고, 후자는 경제적 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들이 수천년간 유지했던 안정적인 사회로 돌아가 자신의 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었다. 이미 서구적 물질주의에 익숙해진 나우루인들은 물론 전자를 택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후, 나우루의 인광석은 드디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인광석을 팔아 얻은 수입으로 나우루는 남태평양에서 가장 부유한 섬 중 하나가 되었지만, 동시에 가장 비만율이 높고 당뇨, 고혈압 등의 질병이 만연하며, 수많은 생물종이 사라진, 다시 말해 낙원과는 거리가 먼 섬이 되었다. 이제 인광석이 고갈되어 가는 시점에 섬의 경제는 급격히 기울고 있었다. 나우루 정부가 인광석 고갈에 대비해 기금을 마련해두긴 했지만, 아시아발 경제위기(한국의 IMF 사태도 이 중 하나다) 등으로 인해 기금 운용은 실패해버렸다. 게다가 이제 황폐해진 섬의 환경은 예전 같은 자급자족의 시스템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외지인들이 떠난 후 흉물스럽게 버려진 건물들과 황량한 폐광들에 둘러쌓여 서 있는 나우루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우루의 오늘은 인류가 지금처럼 환경을 파괴해가며 지구의 자원을 무작정 소진할 때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시뮬레이션 결과와도 같다. 일차적으로, 나우루의 파국은 유한한 천연자원(특히 화석연료)에 대책 없이 의존하고 있는 현 자본주의 시스템이 조만간 경험하게 될 미래라고 할 수 있다. 태양열이나 풍력 등의 지속 가능한 대체 에너지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그 양이 한정되어 있는데다가 다량의 온실가스마저 뿜어내는 화석연료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이유는 단 하나, 눈 앞의 이윤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윤 앞에 눈이 멀어버린다. 자원이란 언젠가 고갈되기 마련인데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애써 모른채하며 오늘의 돈벌이에 탐닉한다. 하지만 이 이윤이란 결국 미래로부터 가불해 온 것에 불과함을 나우루의 역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나우루의 경험(그리고 라파누이와 같은 여타 종족들의 경험)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지속 가능한 시스템과 그렇지 못한 시스템 사이에 몇 가지 차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시스템의 가장 큰 조건은 주변의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인구 수를 적절히 조절하여 인간이 소비하는 양이 자연의 재생 속도를 초과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며, 인간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여 가능한 풍부한 생물 다양성을 보존해야 한다. 대신, 지속 불가능한 사회는 생태계 위에 군림하여 그것을 파괴한다. 파괴당한 생태계는 인간에게 음성 피드백을 보내지만, 인간이 그 위기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지속 가능한 사회는 결코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온 기술적 성과를 버리고 원시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 현명하게 자리잡기 위해서는 과학적/기술적 성과들을 십분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우리가 분명히 해야할 것은 과학 기술이 그 자체로 객관적인 지식 체계가 아니라 인간이 지향하는 가치체계,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지향을 가지고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고 이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최근 지구 온난화에 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졌다.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과 같은 다큐멘터리 필름이 기여한 바도 크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기후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기후 변화는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는 음성 피드백이다. 만약 이 경고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과거의 몇몇 종족이 걸었던 쇠퇴의 길을 전지구적 차원에서 재현하게 될 것이다. 기후 변화 협약과 같은 국제적 룰을 만들고 지켜나가는 것은 파국을 막는 첫 걸음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인류가 형성해 온 "지속 불가능한" 문명을 "지속 가능한" 문명으로 바꾸기 위한 근본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나우루의 교훈은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April 30, 2007

빅 슬립

빅 슬립(Big Sleep)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박현주 옮김/북하우스/9500원

"일단 죽으면 어디에 묻혀 있는지가 중요할까? 더러운 구정물 웅덩이든, 높은 언덕 꼭대기의 대리석 탑이든 그게 중요한 문제일까? 당신이 죽어 깊은 잠에 들게 되었을 때, 그러한 일에는 신경쓰지 않게 된다. 기름과 물은 당신에게 있어 바람이나 공기와 같다. 죽어버린 방식이나 쓰러진 곳의 비천함에는 신경쓰지 않고 당신은 깊은 잠에 들게 되는 것뿐이다."

빅 슬립(Big Sleep)은 죽음을 뜻한다. '영원히 잠들다'라는 표현처럼, 이 제목도 죽음이란 단어를 순화한다. 하지만 정말 죽음은 그저 깊고 긴 잠에 불과할까. 이 혼란스런 세계 속에 누군가가 죽는다는건 어떤 의미를 지닐까. 선은 승리하고 악은 단죄받는다는건 그저 옛 이야기. 별 볼 일 없지만 그래도 삶의 긍지로 눈빛이 빛나던 사람은 죽어 웅덩이 속에 썩어가고, 아무렇지 않게 남의 시체를 밟고 선 타락한 눈빛의 그들은 흥청거리며 살아가는 비열한 세계여. 고작 하루 이십오불의 비용으로 생사의 경계 속에서 총탄 사이를 누비는 까닭은 혹 차라리 죽음으로 자기가 어떤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은게 아니었을까.

트렌치 코트와 중절모, 우수에 잠긴 눈빛으로 시니컬한 독백을 내뱉는 이 남자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영웅이다. 올드 팬들에게는 험프리 보가트의 이미지로 더 친숙할 그의 이름은 필립 말로. 요즘 말로 하자면 까칠하다고 할 수 있을 이 남자에게는 하지만 냉소 뒤에 숨겨진 슬픈 미소가 엿보인다. 하긴, 냉소의 본질은 분노보다는 슬픔에 가까울지 모른다. 착한 사람들은 힘없이 당하고만 마는 세상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건 아무 것도 없다는 무력감. 필립 말로의 독설은 그 세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막일테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자신의 첫 장편 <빅 슬립>에서 창조한 이 인물은 돈이 지배하고 가치가 무너진 시대의 산물이다. 악을 단죄하고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과거 탐정/추리소설의 이상과는 달리, 필립 말로는 자신의 행위가 정작 세상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정의는 승리하기는 커녕, 그저 살아남기 급급할 뿐이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패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물러서는 대신 세계를 향해 온 몸으로 부딛히고 부서지기 때문이다. 비정한 세계는 너무도 견고하여 때로 그는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을 지켜내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망신창이가 된 몸 속에서 그의 정신은 여전히 밝게 빛난다. 비록 공허해진 가슴을 술로 달래야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독한 위스키로도 쓸어내릴 수 없는 씁쓸한 세계는 고통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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