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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 조중걸 지음/프로네시스/11000원

내가 '키치'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건 밀란 쿤델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였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노동절 퍼레이드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키치를 이야기하는데, 당시의 나로서는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었음은 물론이거니와 무슨 뜻인지 찾아보려는 노력도 부재했음을 고백해야겠다. 굳이 변명하자면 당시는 인터넷이라는게 보급이 안 되어 있던 시기라서 무언가 궁금한 것이 생겼을 때 도서관을 뒤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서관이라고는 시험 때 열람실에만 가던 그 시절에는 궁금한게 생겼다고 바로 찾아보는건 불가능-_-한 일이었다. 그나마 우연히 알게된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같은 책은 너무 어려워서 조금 읽다가 그냥 접었던 기억이 난다.

아뭏든 그 후로도 여기저기서 키치의 이름을 들을 기회가 있었으나, 여전히 어렴풋하게만 그 뜻을 파악하고 있었으니(이젠 인터넷도 있는데 말이다!!) 나의 지적 나태함도 참 심각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 단어 하나의 뜻을 무려 10년이 넘게 모른채 방치해두고 있었다니. 그래서 이 책을 봤을때 옳다쿠나 싶어 집어들었다.(정확히 말하자면, 도서 리스트에 집어넣었다 -_-) 그간의 게으름을 이 책 한 권으로 만회해 보려는 얄팍한 심성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모르는건 알고 지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개인적인 변명은 여기까지 해 두고, 이제 책 안으로 들어가보자. 목차를 보면 이 책은 크게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키치에 대한 개괄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는 전반부(1장 '키치란 무엇인가')와 키치를 극복하기 위해 근현대 예술이 밟아온 여로를 개괄하는 후반부(2장 '키치 넘어서기'와 3장 '키치 해체하기')로 나뉠 수 있다. 4장은 앞의 내용에 대한 정리에 해당한다. 분량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키치 자체보다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덕분에 이 책은 (특히)현대 예술에 대한 훌륭한 소개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나 현대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키치라는 개념 자체에 충실할 필요가 있겠다.

키치라는 단어에는 몇가지 층위가 존재한다. 본래 키치는 19세기 독일에서 특정 예술 형식을 지칭하기 위해 생겨난 단어이다. 당시 자본주의의 정착과 함께 새로이 지배 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와 프티 부르주아 계급은 경제적 부를 축적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과거 귀족 계급과 같은 문화적 전통은 부재했다. 이들은 귀족 계급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들의 주변을 예술 작품들로 채우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소비햇던 것은 사실상 예술 자체가 아니라 예술을 소비하고 있다는 자기 만족이었다. 키치는 이들 부르주아들의 속물적 허위의식에 기대어 번식했던, 순수 예술을 가장한 기만적인 통속 예술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거칠게 분류하자면 예술은 크게 순수 예술과 통속 예술로 나뉠 수 있다. 순수 예술은 세계와 삶의 본질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며 표현으로, 감상자에게 정신적 긴장을 요구하는 예술이다. 하지만 세계와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듯이, 순수 예술 역시 이해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순수 예술은 어느 정도의 훈련과 지식을 필요로하는 예술이기도 하다. 이는 감상자가 순수 예술을 감상한다는 것은 그것을 새로운 긴장과 도전의 계기로 삼아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일상의 힘든 노동에 지친 대중들에게는 이와 같은 순수 예술을 즐긴다는건 사치에 가깝다. 이들에게는 힘든 일상을 위로하고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여흥으로서의 예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통속 예술이다. 통속 예술에게는 진리보다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의 행복감과 즐거움을 전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사람들은 순수하게 쾌락을 위해 통속 예술을 소비할 뿐이다. 하지만, 통속 예술은 스스로에게 쾌락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가장하지는 않는다. 통속 예술은 세계란 무엇이라고 삶이란 이런 거라고 짐짓 진지한 척 설교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통속 예술은 차라리 순수하고 솔직하다.

키치는, "뻔뻔스러움의 자리에 허위의식이 자리 잡은 통속 예술"이다. 키치는 의미를 가장한다. 감상자의 허위의식에 아첨하고 그들의 자의식을 만족시켜주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예술, 그것이 바로 키치다. 키치는 순수 예술의 형식을 빌리지만, 순수 예술이 감상자를 밀어내고 스스로의 진리를 구축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저하게 감상자의 기호를 따른다. 때문에 키치는 달콤하다. 감상자는 키치를 통해 손쉽게 자신이 고상한 예술행위를 감상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질 수 있다.

여기에서 키치의 의미는 확장된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키치는 예술을 예술 자체로서가 아니라 거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소비하는 태도 자체를 가리키게 된다. 감상자는 연극 작품을 보면서 작품 속에 담긴 슬픔에 매혹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된다. 키치는 "이차적 눈물"이다. "따라서 예술 감상에 있어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요소, 즉 작품 자체에 대한 관심은 지엽적인 것이 되고 예술작품은 단지 자기 감상을 위한 하나의 기회로 전락한다." 아무리 심오한 깊이를 담은 예술 작품도 키치적 태도에 사로잡힌 감상자 앞에서는 그저 하나의 거울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 더욱 나쁜 것은, 이런 감상자들이 많을 수록 그들에게 거짓 예술을 팔아먹는 키치 장사꾼들 역시 늘어난다는 것이다. 사회에는 점점 키치들이 범람하게 된다.

예를 들어, 최근 모 대기업의 전자제품 광고를 생각해보자. 이들은 '명품이 명화 속으로 들어갔다'며 명화들 속에 자신들의 제품 사진을 심어놓고 있다. 이 광고가 의도하는 바는 명확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제품이 가지고 있는 사용가치를 명화들이 가치고 있는 예술적 가치로 포장한다. 이들은 잠재적 소비자들의 허위의식을 자극하여 자신의 제품들을 소비하면 명화들과 같은 수준 높은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거짓 환상을 심어준다. 물론 그들의 목적은 그 환상을 이용해 제품을 팔아먹는 것이다.

키치가 범람하면서 그것은 단지 예술에 대한 태도나 예술 작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곳에 스며든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없는 의미를 가장하는 삶의 태도들이 모두 키치가 된다. 거짓과 기만이 우리의 삶을 점령한다. 실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인생과 세계에 대해 확신한다. 아니, 확신하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된다. 키치적 삶에서는 무엇을 하든 그것은 곧 그 행위를 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귀결된다. 심지어 슬픔이나 우울, 절망까지도 키치가 된다. 많은 자살하는 사람들이 실제 삶의 고달픔보다는 자살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도취되어 자살하곤 한다. 현대인의 삶은 이 달콤하면서도 시큼한 키치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근현대 미술의 역사는 바로 이 키치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삶을 가득 채운 거짓을 걷어내고 진리의 빛을 회복하는 것이 예술의 소명 아니었던가.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 시대의식도 바뀌고, 예술이 드러내야 하는 진리도 바뀐다. 단지 과거의 예술을 오늘날에 되살리는 것은 또 다른 키치가 될 뿐이다. 예술가들은 자기 시대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했다. 인상주의와 표현주의를 거쳐,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사조들은 이 모색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예컨데 객관적 세계의 인식 가능성을 부정했던 경험주의 철학은 예술가의 주관적 인상을 강조하는 인상주의 미술을 낳았고, 오늘날의 해체 철학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예술로 이어지는 식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보면 난해하게만 느껴지던 현대 예술이 하나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현대 예술을 설명하는 부분까지 오면, 어쩐지 저자의 관심은 키치 자체로부터 멀어지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일방적인 예찬으로 일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논리상, 포스트모더니즘은 키치 자체를 불가피한 무엇으로 인정하고 오히려 키치를 가지고 노는데(왕을 가지고 노는거야!!), 저자는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이 키치를 해체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내게 이 논리는 어째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왕따 당하는 학생이 자기가 다른 사람을 왕따시키는거라고 믿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의도야 어쨌든, 현실에서 여전히 우리는 키치에 압도당하고 있지 않은가? 키치를 비웃는다고 키치가 해체되는건 아니다.

거꾸로 포스트모더니즘 자체도 이미 하나의 키치가 되고 있기도 하다.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는 대표적인 사례인데, 소칼이 드러낸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하나의 스타일이 되어 내용보다는 스타일 자체가 소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이내 키치가 되어 우리를 포위한다. 심지어 키치를 간파하는 자신의 이미지도 또 다른 키치가 되지 않는가. 마치 거울의 방에 들어가서 무한히 반복되는 자신의 상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

다시 말해, 해답은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해답은 당연히 아니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 어디선가 키치화한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기 위한 또 다른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답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키치로 가득차 있다는 깨달음 그 자체이다. 사실, 우리는 키치를 소비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이 우리 삶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인식하느냐의 여부가 아닐까. 우리의 인생이 어떤 해답에 도달했다는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고, 언제나 스스로를 되짚어보는 끊임없는 모색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이 키치가 우리에게 주는 유일한 교훈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이제 쿤델라가 무슨 의미로 키치를 말했는지는 알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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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

독서인:

잘 읽었습니다. 좋은 리뷰입니다

수띵:

엇.. 감사합니다. 이 구석진 다락방 서재까지 찾아와서 읽어주시는 분이 계시네요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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