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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의 연애

- 심윤경 지음/문학동네/9500원

뭐랄까, 이진이라는 인물의 인상이 너무 흐릿하다. 그녀의 외모에 대한 묘사도 부족하거니와, 세상사에 전혀 관심없이 거의 감정이랄게 없는 그녀의 성격은 마치 마네킹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 뿐이다. 캐릭터 자체가 워낙 비현실적이다보니 감정을 이입할 적당한 역할모델을 찾기 힘들다. 그저 어렴풋하게 접근하자면, 말 한 번 못붙여보고 힐끗거리기만 했던 도서관 그녀?(기억하는 그녀의 모든 모습은 무표정하게 공책에 사각거리며 공부하던 모습뿐이었으니 -_- 게다가 그녀에 대해 내가 갖는 모든 인상은 내가 제멋대로 부여한 판타지 아닌가.)

반면에 이현은, 너무 쿨하다. 사실은 쿨한게 아니라지만, 이 정도로 감정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산다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똑똑한 머리에, 재력, 그리고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군살 없는 몸매를 유지하는 부지런함(서른을 막 넘긴 내 배에 한심한 눈길 한 번 주고)은 왠지 중년의 로망이랄까, 또 다른 판타지의 모양을 갖춘다. 남녀 공히, 환상 속의 그 남자 그 여자일세.

그러니, 너무 심각하게 고민할 소설은 아닌 것 같다. 이 판타지의 세계 속에서 그나마 현실 세계의 그림자라곤 짝사랑의 고뇌 정도랄까. 반향 없는 일방적인 짝사랑은 사실 영원히 지속된다는게 불가능하다. 제아무리 이현이랄지라도. 너무 서두르면 도망가버리는 까탈스러운 고양이 길들이기라는 사랑 게임을 이현은 꽤 능숙하게 해냈다. 하지만 문제는 애초에 작가가 이진이라는 인물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인물로 설정했다는 것이고, 이현의 일방적인 사랑이 파국을 맞는 것이 불가피했다는 점이다. 이거이거.. 아무리 짝사랑의 현실이 그렇다곤 하지만, 판타지의 미덕에는 어긋난단 말이다. 쳇.

심윤경이라는 작가는 계속 장편소설로 승부했던 작가인데, 이번 장편은 어째 장편이라기보다 중편 하나와 단편 여러개로 구성된 옴니버스 방식에 가까운 것 같다. 이현과 이진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중간 이진이 기록하는 영혼의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데, 이 이야기들은 마지막 하나만 빼고는 본편의 이야기에 완전히 독립적이다. 때문에 마지막 영혼의 이야기가 급작스럽게 본편의 스토리와 합쳐지는 방식은 너무 거칠게 느껴진다. 이런 식의 합치를 바랬다면 좀 더 정밀하게 이야기를 직조해내서 다른 에피소드들도 본 스토리에 적당히 섞이게 갔어야 할 것 같은데, 이건 좀 뜬금없네. 이래저래 완성도에서 아쉬움을 남기는 소설이다.

ps. 모든 정황을 고려해볼 때, "이진은 사실 외계인" 이라고 가정하면 잘 들어맞는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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