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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오르한 파묵 지음/이난아 옮김/민음사/9000원

인식론적 관점에서, 세계는 전적으로 주관적이다. 세계는 오직 주체가 인식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존재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중해를 세계로 이해했듯이,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中' 이라고 이해했듯이,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들이 "세계"를 지구로 한정시켜 이해하듯이. 이 집단적 의식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의 분화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그처럼 끊임없는 지진과 화산활동으로 가득한건 이 저마다의 세계들이 서로 부딛히고 부서지기 때문이리라.

되돌아보면, 젊은 날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다른 세계가 솟아났던 기억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학교에 잡혀 있었고, 그저 약간의 일탈로 세상에 복수라도 한 양 의기양양했던 나의 세계는 얼마나 작았던가. 그 작은 세계의 의기양양했던 개구리 왕은 우물 밖 세상을 만나자 이내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세계는 눈부셨다. 비록 새로운 세계에서 나는 작은 개구리에 불과했지만, 그 모든 불안과 모험을 감내할만큼 새로운 세계는 매혹적이었다. 게다가 내 옛 왕국은 이미 새로운 세계의 빛에 녹아내린지 오래. 나는 이 새로운 세계를 향해 모험을 떠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여기, 또 하나의 세계가 방금 무너졌다. 책 한 권이 인생 전체를 흔들었음을 고백하는 이 강렬하고도 간결한 두 문장을 시작으로 소설 "새로운 인생"은 우리를 새로운 인생을 찾아 나서는 주인공의 여정 속으로 이끈다. 하지만 주인공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그 책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인공이 찾고자 한 새로운 인생이 무엇인지는 끝내 나오지 않는다. 허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이 소설을 다른 성장소설들과 구분짓는 가장 큰 차이이다.

때로, 중요한건 답이 아니라 질문 그 자체일 때가 있다. 샤르트르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가 추구한 것은 지식인은 이러저러하다는 답이 아니라, 질문 그 자체였다. 답을 내놓는 순간, 그것은 관습이 되고 규범이 된다. 때문에, 질문하기를 멈추는 순간 진리는 화석이 되어 바스러진다. 진리는 끊임없이 부정되고 재규정되는 과정 속에서만 생명력을 얻는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 책에서 작가는 바로 삶이 이러저러하다는 규정 대신, 삶의 의미에 대한 끊임없는 모색 자체를 옹호하고 있다.

무슨 말이냐고? 어떤 단어의 의미가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을 때는 그 반대말을 보면 된다. 새로운 인생을 찾아 헤메는 주인공과 자린, 마흐메트의 대척점에는 나린 박사가 서 있다. 그는 존중받을 만한 삶을 이루었고, 스스로 삶과 세계에 대한 어떤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믿는 인물이다.

"... 그 음악이 바로 우리가 세계라 부르는 것을 형성하고 있지. (중략) 주의 깊은 사람이라면 그것을 듣고 보고 이해할 수 있어."

물론 이 말은 나린 박사의 자아도취만은 아니다. 그는 실제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으며, 가족에게도 인자하고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자신이 깨달은 삶의 지혜를 그의 아들이 왜 거부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준수한 외모에 좋은 머리를 가진데다가 풍족한 경제적 삶과 아버지(나린 박사)의 지혜까지 상속받을 수 있었던(나린 박사가 보기에는 모든 것이 완벽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마흐메트가, 그 모든 것을 뿌리치고 새로운 인생을 찾겠다고 헤메이는 것은 나린 박사에게는 헛된 낭비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린 박사는 바로 모든 젊은이들의 아버지이다. 아버지들 역시 한 때 젊은이였고 새로운 인생에 목말라했었지만, 이제 그들은 그 젊은 날의 열병을 극복하고 나름의 해답을 찾았을 것이다. 어느새 아버지의 입에서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젊은 날의 아픔을, 그 젊은 날의 방황을 이겨낸 목소리에는 피로감과 함께 자부심이 묻어나온다. 이해한다. 자신의 자식들에게 그 아픔과 혼돈을 다시 겪게 하고 싶지 않은 당신들의 사랑을.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에게 필요한건 답이 아니라 과정이었음을. 모든게 완벽하고 모든게 갖추어진 미래가 혹 우리를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버스 창문 너머로 흐르던 그 불빛을, 잠든 자린의 어깨로 흘러내리던 그 머리칼을, 점멸하는 TV 불빛으로 어른거리던 고뇌의 그림자들을, 그 모든 것을 그저 헛된 지난날의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고처럼 불현듯 다가오는 인생의 순간들을 피하기 위해 그저 한 곳에 안전하게 정착해 있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새로운 인생의 빛을 보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한 듯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은 마치 신기루와 같았다. 소설에서도, 새로운 인생의 빛을 강력하게 내비추던 그 책은 아버지의 친구가 몇 권의 책을 짜집기하듯 베낀 것이었고, "새로운 인생" 캬라멜의 천사는 그저 마를렌 디트리히의 어느 영화 제목에서 나온 단어였을 뿐이었다. 지난 날의 열정도, 그 뜨거웠던 사랑도, 운명같던 우연들도 뒤돌아보면 그렇게 그저 하나의 그림자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내 삶 그 자체였다. 그게 당신들의 삶 자체였다. 그 뜨거웠던 모색을 마감하고 결론에 안착하는 순간, 다시 말해 주인공이 아내와 아이가 기다리는 행복한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버스는 멈췄다. 그렇게, 삶도 멈췄다.

되돌아보면, 젊은 날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다른 세계가 솟아났던 기억이 있다. 지금의 나는 비록 그 세계를 떠났지만, 그 세계는 여전히 나의 한 부분이다. 사랑했던 이들이여, 그대들도 나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여전히, 또 다른 세계, 또 다른 사랑을 찾는 모험은 계속되어야 한다. 질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새로운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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