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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07 Archives

March 8, 2007

새로운 인생

-오르한 파묵 지음/이난아 옮김/민음사/9000원

인식론적 관점에서, 세계는 전적으로 주관적이다. 세계는 오직 주체가 인식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존재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중해를 세계로 이해했듯이,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中' 이라고 이해했듯이,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들이 "세계"를 지구로 한정시켜 이해하듯이. 이 집단적 의식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의 분화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그처럼 끊임없는 지진과 화산활동으로 가득한건 이 저마다의 세계들이 서로 부딛히고 부서지기 때문이리라.

되돌아보면, 젊은 날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다른 세계가 솟아났던 기억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학교에 잡혀 있었고, 그저 약간의 일탈로 세상에 복수라도 한 양 의기양양했던 나의 세계는 얼마나 작았던가. 그 작은 세계의 의기양양했던 개구리 왕은 우물 밖 세상을 만나자 이내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세계는 눈부셨다. 비록 새로운 세계에서 나는 작은 개구리에 불과했지만, 그 모든 불안과 모험을 감내할만큼 새로운 세계는 매혹적이었다. 게다가 내 옛 왕국은 이미 새로운 세계의 빛에 녹아내린지 오래. 나는 이 새로운 세계를 향해 모험을 떠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여기, 또 하나의 세계가 방금 무너졌다. 책 한 권이 인생 전체를 흔들었음을 고백하는 이 강렬하고도 간결한 두 문장을 시작으로 소설 "새로운 인생"은 우리를 새로운 인생을 찾아 나서는 주인공의 여정 속으로 이끈다. 하지만 주인공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그 책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인공이 찾고자 한 새로운 인생이 무엇인지는 끝내 나오지 않는다. 허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이 소설을 다른 성장소설들과 구분짓는 가장 큰 차이이다.

때로, 중요한건 답이 아니라 질문 그 자체일 때가 있다. 샤르트르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가 추구한 것은 지식인은 이러저러하다는 답이 아니라, 질문 그 자체였다. 답을 내놓는 순간, 그것은 관습이 되고 규범이 된다. 때문에, 질문하기를 멈추는 순간 진리는 화석이 되어 바스러진다. 진리는 끊임없이 부정되고 재규정되는 과정 속에서만 생명력을 얻는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 책에서 작가는 바로 삶이 이러저러하다는 규정 대신, 삶의 의미에 대한 끊임없는 모색 자체를 옹호하고 있다.

무슨 말이냐고? 어떤 단어의 의미가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을 때는 그 반대말을 보면 된다. 새로운 인생을 찾아 헤메는 주인공과 자린, 마흐메트의 대척점에는 나린 박사가 서 있다. 그는 존중받을 만한 삶을 이루었고, 스스로 삶과 세계에 대한 어떤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믿는 인물이다.

"... 그 음악이 바로 우리가 세계라 부르는 것을 형성하고 있지. (중략) 주의 깊은 사람이라면 그것을 듣고 보고 이해할 수 있어."

물론 이 말은 나린 박사의 자아도취만은 아니다. 그는 실제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으며, 가족에게도 인자하고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자신이 깨달은 삶의 지혜를 그의 아들이 왜 거부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준수한 외모에 좋은 머리를 가진데다가 풍족한 경제적 삶과 아버지(나린 박사)의 지혜까지 상속받을 수 있었던(나린 박사가 보기에는 모든 것이 완벽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마흐메트가, 그 모든 것을 뿌리치고 새로운 인생을 찾겠다고 헤메이는 것은 나린 박사에게는 헛된 낭비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린 박사는 바로 모든 젊은이들의 아버지이다. 아버지들 역시 한 때 젊은이였고 새로운 인생에 목말라했었지만, 이제 그들은 그 젊은 날의 열병을 극복하고 나름의 해답을 찾았을 것이다. 어느새 아버지의 입에서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젊은 날의 아픔을, 그 젊은 날의 방황을 이겨낸 목소리에는 피로감과 함께 자부심이 묻어나온다. 이해한다. 자신의 자식들에게 그 아픔과 혼돈을 다시 겪게 하고 싶지 않은 당신들의 사랑을.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에게 필요한건 답이 아니라 과정이었음을. 모든게 완벽하고 모든게 갖추어진 미래가 혹 우리를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버스 창문 너머로 흐르던 그 불빛을, 잠든 자린의 어깨로 흘러내리던 그 머리칼을, 점멸하는 TV 불빛으로 어른거리던 고뇌의 그림자들을, 그 모든 것을 그저 헛된 지난날의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고처럼 불현듯 다가오는 인생의 순간들을 피하기 위해 그저 한 곳에 안전하게 정착해 있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새로운 인생의 빛을 보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한 듯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은 마치 신기루와 같았다. 소설에서도, 새로운 인생의 빛을 강력하게 내비추던 그 책은 아버지의 친구가 몇 권의 책을 짜집기하듯 베낀 것이었고, "새로운 인생" 캬라멜의 천사는 그저 마를렌 디트리히의 어느 영화 제목에서 나온 단어였을 뿐이었다. 지난 날의 열정도, 그 뜨거웠던 사랑도, 운명같던 우연들도 뒤돌아보면 그렇게 그저 하나의 그림자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내 삶 그 자체였다. 그게 당신들의 삶 자체였다. 그 뜨거웠던 모색을 마감하고 결론에 안착하는 순간, 다시 말해 주인공이 아내와 아이가 기다리는 행복한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버스는 멈췄다. 그렇게, 삶도 멈췄다.

되돌아보면, 젊은 날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다른 세계가 솟아났던 기억이 있다. 지금의 나는 비록 그 세계를 떠났지만, 그 세계는 여전히 나의 한 부분이다. 사랑했던 이들이여, 그대들도 나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여전히, 또 다른 세계, 또 다른 사랑을 찾는 모험은 계속되어야 한다. 질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새로운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March 11, 2007

이현의 연애

- 심윤경 지음/문학동네/9500원

뭐랄까, 이진이라는 인물의 인상이 너무 흐릿하다. 그녀의 외모에 대한 묘사도 부족하거니와, 세상사에 전혀 관심없이 거의 감정이랄게 없는 그녀의 성격은 마치 마네킹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 뿐이다. 캐릭터 자체가 워낙 비현실적이다보니 감정을 이입할 적당한 역할모델을 찾기 힘들다. 그저 어렴풋하게 접근하자면, 말 한 번 못붙여보고 힐끗거리기만 했던 도서관 그녀?(기억하는 그녀의 모든 모습은 무표정하게 공책에 사각거리며 공부하던 모습뿐이었으니 -_- 게다가 그녀에 대해 내가 갖는 모든 인상은 내가 제멋대로 부여한 판타지 아닌가.)

반면에 이현은, 너무 쿨하다. 사실은 쿨한게 아니라지만, 이 정도로 감정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산다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똑똑한 머리에, 재력, 그리고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군살 없는 몸매를 유지하는 부지런함(서른을 막 넘긴 내 배에 한심한 눈길 한 번 주고)은 왠지 중년의 로망이랄까, 또 다른 판타지의 모양을 갖춘다. 남녀 공히, 환상 속의 그 남자 그 여자일세.

그러니, 너무 심각하게 고민할 소설은 아닌 것 같다. 이 판타지의 세계 속에서 그나마 현실 세계의 그림자라곤 짝사랑의 고뇌 정도랄까. 반향 없는 일방적인 짝사랑은 사실 영원히 지속된다는게 불가능하다. 제아무리 이현이랄지라도. 너무 서두르면 도망가버리는 까탈스러운 고양이 길들이기라는 사랑 게임을 이현은 꽤 능숙하게 해냈다. 하지만 문제는 애초에 작가가 이진이라는 인물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인물로 설정했다는 것이고, 이현의 일방적인 사랑이 파국을 맞는 것이 불가피했다는 점이다. 이거이거.. 아무리 짝사랑의 현실이 그렇다곤 하지만, 판타지의 미덕에는 어긋난단 말이다. 쳇.

심윤경이라는 작가는 계속 장편소설로 승부했던 작가인데, 이번 장편은 어째 장편이라기보다 중편 하나와 단편 여러개로 구성된 옴니버스 방식에 가까운 것 같다. 이현과 이진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중간 이진이 기록하는 영혼의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데, 이 이야기들은 마지막 하나만 빼고는 본편의 이야기에 완전히 독립적이다. 때문에 마지막 영혼의 이야기가 급작스럽게 본편의 스토리와 합쳐지는 방식은 너무 거칠게 느껴진다. 이런 식의 합치를 바랬다면 좀 더 정밀하게 이야기를 직조해내서 다른 에피소드들도 본 스토리에 적당히 섞이게 갔어야 할 것 같은데, 이건 좀 뜬금없네. 이래저래 완성도에서 아쉬움을 남기는 소설이다.

ps. 모든 정황을 고려해볼 때, "이진은 사실 외계인" 이라고 가정하면 잘 들어맞는다 -_-;

March 14, 2007

느낌으로 아는 것들

-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김혜은 옮김/작가정신/9000원

가끔가다가 TV 코메디 프로그램을 보게 될 일이 있다. 한국 방송을 보기 힘든 이 곳에서는 한국 사람들 모임에서 종종 다운받은 한국 방송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함께 시청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이 단체 시청(?)도 적응이 안 되거니와 특히나 틀어놓는 프로그램이 코메디일 경우 아주 당혹스러운 기분이 든다. 웃찾사니 개콘이니 한국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누리는 프로그램들이라는데, 나는 도무지 어디서 웃어야 하는지를 모르겠으니 말이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웃는데 혼자 멀뚱거리고 앉아 있자면 왠지 내가 바보가 된 느낌이 든다.

때문에, 나한테는 웃음의 총량으로 치자면 한국식(?) 코메디보다 그저 말로 웃기는 스탠딩 코메디 류가 그나마 더 나은 편이다. "그나마"라고 하는건 내가 여전히 코메디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 왠지 상대가 나를 웃겨야겠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 느낌이 들면 무슨 얘기든 저~~언혀 웃기지 않는다. 즉, 억지 설정은 별로 즐겁지 않다는 뜻. 내가 즐기는 웃음은 평범한 일상 속에 툭툭 튀어나오는 위트들이다.

그래서인지, 사실 이 책이 내게 주는 만족감은 그다지 크지 않다. 스탠딩 코메디언인 저자 호어스트 에버스가 나름의 재담을 풀어놓았지만, 중간중간 피식거리는 정도 외에 별다른 감흥은 없다. 게다가 독일 사람들끼리나 통할 유머들(예컨데 베를리너에 대한 풍자라던가)이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지라, 약간 형광등처럼 한두번 생각해봐야 이게 웃긴지 알 수 있는 얘기도 있고. 비행기 안에서 시간 떼우기용으로는 적당한 선택이었는데, 이 사람의 책을 다시 돈 주고 사고 싶은 생각은 안 든다. 그래도 유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름 고급(?) 코메디를 선사하는 책이 아닐까 싶다.

March 22, 2007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 조중걸 지음/프로네시스/11000원

내가 '키치'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건 밀란 쿤델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였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노동절 퍼레이드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키치를 이야기하는데, 당시의 나로서는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었음은 물론이거니와 무슨 뜻인지 찾아보려는 노력도 부재했음을 고백해야겠다. 굳이 변명하자면 당시는 인터넷이라는게 보급이 안 되어 있던 시기라서 무언가 궁금한 것이 생겼을 때 도서관을 뒤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서관이라고는 시험 때 열람실에만 가던 그 시절에는 궁금한게 생겼다고 바로 찾아보는건 불가능-_-한 일이었다. 그나마 우연히 알게된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같은 책은 너무 어려워서 조금 읽다가 그냥 접었던 기억이 난다.

아뭏든 그 후로도 여기저기서 키치의 이름을 들을 기회가 있었으나, 여전히 어렴풋하게만 그 뜻을 파악하고 있었으니(이젠 인터넷도 있는데 말이다!!) 나의 지적 나태함도 참 심각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 단어 하나의 뜻을 무려 10년이 넘게 모른채 방치해두고 있었다니. 그래서 이 책을 봤을때 옳다쿠나 싶어 집어들었다.(정확히 말하자면, 도서 리스트에 집어넣었다 -_-) 그간의 게으름을 이 책 한 권으로 만회해 보려는 얄팍한 심성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모르는건 알고 지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개인적인 변명은 여기까지 해 두고, 이제 책 안으로 들어가보자. 목차를 보면 이 책은 크게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키치에 대한 개괄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는 전반부(1장 '키치란 무엇인가')와 키치를 극복하기 위해 근현대 예술이 밟아온 여로를 개괄하는 후반부(2장 '키치 넘어서기'와 3장 '키치 해체하기')로 나뉠 수 있다. 4장은 앞의 내용에 대한 정리에 해당한다. 분량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키치 자체보다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덕분에 이 책은 (특히)현대 예술에 대한 훌륭한 소개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나 현대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키치라는 개념 자체에 충실할 필요가 있겠다.

키치라는 단어에는 몇가지 층위가 존재한다. 본래 키치는 19세기 독일에서 특정 예술 형식을 지칭하기 위해 생겨난 단어이다. 당시 자본주의의 정착과 함께 새로이 지배 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와 프티 부르주아 계급은 경제적 부를 축적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과거 귀족 계급과 같은 문화적 전통은 부재했다. 이들은 귀족 계급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들의 주변을 예술 작품들로 채우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소비햇던 것은 사실상 예술 자체가 아니라 예술을 소비하고 있다는 자기 만족이었다. 키치는 이들 부르주아들의 속물적 허위의식에 기대어 번식했던, 순수 예술을 가장한 기만적인 통속 예술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거칠게 분류하자면 예술은 크게 순수 예술과 통속 예술로 나뉠 수 있다. 순수 예술은 세계와 삶의 본질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며 표현으로, 감상자에게 정신적 긴장을 요구하는 예술이다. 하지만 세계와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듯이, 순수 예술 역시 이해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순수 예술은 어느 정도의 훈련과 지식을 필요로하는 예술이기도 하다. 이는 감상자가 순수 예술을 감상한다는 것은 그것을 새로운 긴장과 도전의 계기로 삼아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일상의 힘든 노동에 지친 대중들에게는 이와 같은 순수 예술을 즐긴다는건 사치에 가깝다. 이들에게는 힘든 일상을 위로하고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여흥으로서의 예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통속 예술이다. 통속 예술에게는 진리보다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의 행복감과 즐거움을 전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사람들은 순수하게 쾌락을 위해 통속 예술을 소비할 뿐이다. 하지만, 통속 예술은 스스로에게 쾌락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가장하지는 않는다. 통속 예술은 세계란 무엇이라고 삶이란 이런 거라고 짐짓 진지한 척 설교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통속 예술은 차라리 순수하고 솔직하다.

키치는, "뻔뻔스러움의 자리에 허위의식이 자리 잡은 통속 예술"이다. 키치는 의미를 가장한다. 감상자의 허위의식에 아첨하고 그들의 자의식을 만족시켜주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예술, 그것이 바로 키치다. 키치는 순수 예술의 형식을 빌리지만, 순수 예술이 감상자를 밀어내고 스스로의 진리를 구축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저하게 감상자의 기호를 따른다. 때문에 키치는 달콤하다. 감상자는 키치를 통해 손쉽게 자신이 고상한 예술행위를 감상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질 수 있다.

여기에서 키치의 의미는 확장된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키치는 예술을 예술 자체로서가 아니라 거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소비하는 태도 자체를 가리키게 된다. 감상자는 연극 작품을 보면서 작품 속에 담긴 슬픔에 매혹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된다. 키치는 "이차적 눈물"이다. "따라서 예술 감상에 있어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요소, 즉 작품 자체에 대한 관심은 지엽적인 것이 되고 예술작품은 단지 자기 감상을 위한 하나의 기회로 전락한다." 아무리 심오한 깊이를 담은 예술 작품도 키치적 태도에 사로잡힌 감상자 앞에서는 그저 하나의 거울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 더욱 나쁜 것은, 이런 감상자들이 많을 수록 그들에게 거짓 예술을 팔아먹는 키치 장사꾼들 역시 늘어난다는 것이다. 사회에는 점점 키치들이 범람하게 된다.

예를 들어, 최근 모 대기업의 전자제품 광고를 생각해보자. 이들은 '명품이 명화 속으로 들어갔다'며 명화들 속에 자신들의 제품 사진을 심어놓고 있다. 이 광고가 의도하는 바는 명확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제품이 가지고 있는 사용가치를 명화들이 가치고 있는 예술적 가치로 포장한다. 이들은 잠재적 소비자들의 허위의식을 자극하여 자신의 제품들을 소비하면 명화들과 같은 수준 높은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거짓 환상을 심어준다. 물론 그들의 목적은 그 환상을 이용해 제품을 팔아먹는 것이다.

키치가 범람하면서 그것은 단지 예술에 대한 태도나 예술 작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곳에 스며든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없는 의미를 가장하는 삶의 태도들이 모두 키치가 된다. 거짓과 기만이 우리의 삶을 점령한다. 실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인생과 세계에 대해 확신한다. 아니, 확신하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된다. 키치적 삶에서는 무엇을 하든 그것은 곧 그 행위를 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귀결된다. 심지어 슬픔이나 우울, 절망까지도 키치가 된다. 많은 자살하는 사람들이 실제 삶의 고달픔보다는 자살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도취되어 자살하곤 한다. 현대인의 삶은 이 달콤하면서도 시큼한 키치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근현대 미술의 역사는 바로 이 키치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삶을 가득 채운 거짓을 걷어내고 진리의 빛을 회복하는 것이 예술의 소명 아니었던가.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 시대의식도 바뀌고, 예술이 드러내야 하는 진리도 바뀐다. 단지 과거의 예술을 오늘날에 되살리는 것은 또 다른 키치가 될 뿐이다. 예술가들은 자기 시대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했다. 인상주의와 표현주의를 거쳐,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사조들은 이 모색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예컨데 객관적 세계의 인식 가능성을 부정했던 경험주의 철학은 예술가의 주관적 인상을 강조하는 인상주의 미술을 낳았고, 오늘날의 해체 철학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예술로 이어지는 식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보면 난해하게만 느껴지던 현대 예술이 하나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현대 예술을 설명하는 부분까지 오면, 어쩐지 저자의 관심은 키치 자체로부터 멀어지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일방적인 예찬으로 일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논리상, 포스트모더니즘은 키치 자체를 불가피한 무엇으로 인정하고 오히려 키치를 가지고 노는데(왕을 가지고 노는거야!!), 저자는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이 키치를 해체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내게 이 논리는 어째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왕따 당하는 학생이 자기가 다른 사람을 왕따시키는거라고 믿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의도야 어쨌든, 현실에서 여전히 우리는 키치에 압도당하고 있지 않은가? 키치를 비웃는다고 키치가 해체되는건 아니다.

거꾸로 포스트모더니즘 자체도 이미 하나의 키치가 되고 있기도 하다.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는 대표적인 사례인데, 소칼이 드러낸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하나의 스타일이 되어 내용보다는 스타일 자체가 소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이내 키치가 되어 우리를 포위한다. 심지어 키치를 간파하는 자신의 이미지도 또 다른 키치가 되지 않는가. 마치 거울의 방에 들어가서 무한히 반복되는 자신의 상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

다시 말해, 해답은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해답은 당연히 아니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 어디선가 키치화한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기 위한 또 다른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답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키치로 가득차 있다는 깨달음 그 자체이다. 사실, 우리는 키치를 소비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이 우리 삶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인식하느냐의 여부가 아닐까. 우리의 인생이 어떤 해답에 도달했다는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고, 언제나 스스로를 되짚어보는 끊임없는 모색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이 키치가 우리에게 주는 유일한 교훈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이제 쿤델라가 무슨 의미로 키치를 말했는지는 알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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