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투르니에 지음/이은주 옮김/현대문학/15000원
오랜만에 읽는 미셸 투르니에.
미셸 투르니에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흡혈귀의 비상"이라는 제목을 보며 신화를 변주하는 또 다른 소설을 기대하며 그답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제목이 "미셸 투르니에 독서노트"라는 부제와 함께 묶이면 일단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흡혈귀라니. 호러 소설이라도 읽은걸까.
"... 한 권의 책을 출판할 때 그는 익명의 남녀의 무리 속으로 종이로 만들어진 새떼를, 피에 굶주려 야윈 흡혈조들을 풀어놓는 것이다. 그 새들은 닥치는 대로 독자를 찾아 흩어진다. 한 권의 책이 독자를 덮치면, 그것은 곧 독자의 체온과 꿈들로 부푼다. 그것은 활짝 피어나고, 무르익어, 마침내 자기 자신이 된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들과 독자의 환상들이 구별할 수 없게 뒤섞여 있는 - 어린아이의 얼굴에 아빠의 모습과 엄마의 모습이 섞여 있듯이 - 풍부한 상상의 세계이다."
저자 서문에 담긴 이 흡혈귀의 비유는 (비록 피를 빨리는 입장이긴 하지만) 독자의 지위를 수동적인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격상시켜 책읽기를 즐기는 독자에게 제법 으쓱하는 기분이 들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이내 이 기분은 위화감으로 바뀌기 마련인데, 미셸 투르니에가 몸소 보여주는 독서는 지친 하루를 마감하는 잠자리 독서 같은 나같은 소시민적 독서와는 차원이 다르다는걸 깨닫기 때문이다. 텍스트를 넘나들고 각 작가의 생애와 유럽의 역사를 아우르는 '읽기'라니!
차라리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쓰기'에 가깝다. 유럽 근현대의 거장들과 그들의 작품을 소재로 삼아 미셸 투르니에 자신의 정신세계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흡혈귀는 책이 아니라 미셸 투르니에 자신이 되지 않을까. 거꾸로 그들 책에서 피를 빨아 자신의 세계를 살찌우고 있으니 말이다. 아닌게 아니라, 책을 읽고 나면 유럽 문학에 대해서보다 미셸 투르니에라는 작가에 대해 더 풍성하게 알게 되는 느낌이 든다. 예컨데 중간 중간 등장하는 대립항들은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진짜 이 번역제목 맘에 안 들지만)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내용들이 다시 서술되고 있으며, 레비 스트로스에 대한 회고에서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기원을 짐작할 수 있게 되는 식이다.
우연한 일이겠지만, "독서 노트"에 해당하는 프랑스어는 "Note de Lecture"인데, 여기서 영어 "reading"에 해당하는 단어 "lecture"는 영어의 "lecture", 즉 "강의"라는 단어와 철자가 같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마치 미셸 투르니에에게서 유럽 문학사 강의를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교재에 해당하는 각 원전들을 미리 읽는다면 더욱 풍성한 강의가 될 것이다. 물론 언제나처럼 불성실한 학생인 나는 교재도 읽어보지 않고 수업을 들어 많은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점은 고백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