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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2006 Archives

December 2, 2006

슬픔이여 안녕

프랑소아즈 사강 지음/김희동 옮김/푸른나무/4500원

사실, 조제 때문이었다. 이 책을 집어든건.

원래 읽고 싶었던건 조제가 나오는 "일년 후" 였다. 하지만 여기저기 찾아본 결과 그 소설은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고, 꿩 대신 닭이랄까, 프랑소아즈 사강이 어떤 느낌을 주는 작가인지 보자라는 느낌으로 선택한 책이다. 물론, 이 소설에서 조제를 찾을 수는 없었다.

"슬픔이여 안녕"은 사강이 18세에 발표한 그녀의 첫 소설이다. 주인공 세실의 나이도 그 무렵. 아마 소설 속 세실에게 사강의 모습이 겹쳐지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일게다. 그리고, 수많은 (아마도 여성) 독자들도 스스로를 세실과 겹치면서 그 섬세한 감수성과 감정의 떨림에 함께 전율했을 것이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유년의 감정은 강렬한 동시에 호불호가 분명했다. 좋은건 좋은거고 싫은건 싫은거라는 아주 명쾌한 감정이 있기에 웃음 혹은 울음이라는 극명한 표출 방식을 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의 감정은 점점 미묘해진다. 미소진 입술 끝에 살짝 걸리는 우수라던가, 눈물 속에 슬쩍 비치는 분노 같은 것들은 그렇게 미묘해진 감정의 증거일 것이다. 슬픔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이 슬픔이라는 감정에 어떤 낭만성이 서려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 힘들다. 슬픔에 잠긴 얼굴은 가슴 아프면서도 매력적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 슬퍼하면서도, 우리는 동시에 슬퍼하는 자신의 모습에 매혹되곤 한다. 가학적, 혹은 피학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양가적인 감정이 바로 슬픔의 마력이다.

제목이 한글로 번역되면서 뉘앙스가 다소 모호해져 버렸는데, "안녕"은 작별인사가 아니라 만남의 인사다. 슬픔을 알아버린 소녀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의 의미.

December 10, 2006

Little Nemo in Slumberland

Winsor McCay 지음

"잠의 나라의 어린 니모"는 1905년에서 1913년까지 New York Herald 와 William Randolph Hearst's New York American 신문 일요일판에 매주 연재되었던 만화(Comic-Strip)다.(1924년 Winsor McCay는 다시 한 번 Nemo를 지면에 되살려내지만, Nemo라는 작품의 생명력은 아무래도 초기 작품에서 더 생생하게 드러난다) Nemo가 처음 신문지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던 1905년은 Comic-Strip 이라는 형태가 처음 등장한 후 10년도 채 안 되었던 시기였는데, Winsor McCay는 Nemo를 통해 그 때까지의 모든 형식적 시도들을 일거에 정리시키고 Comic-Strip의 기본 형태를 확고하게 정착시키는데 성공한다. 물론 Comic-Strip의 역사에서 대부분의 "최초의"라는 수식어가 붙는 수사는 Richard F. Outcault의 "The Yellow Kid"에게 돌아가지만, "The Yellow Kid"가 열어놓은 세계를 완전히 정착시킨 것은 Winsor McCay와 Nemo의 공이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The Yellow Kid"가 시간이 지나면서 신문사 간의 무리한 경쟁과 상업주의에 물들어 Yellow Journalism 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의 유래가 된 것에 비해, "Little Nemo in Slumberland"는 끝까지 꾸준한 작품성을 유지했던 것도 좋은 대비를 이룬다.

오랜 기간 연재되었지만 Little Nemo의 기본적인 구성은 동일하다. Nemo는 꿈 속에서 Slumberland를 여행하면서 온갖 모험을 하게 되고, 마지막 컷에서는 항상 그의 작은 침대에서 잠을 깨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꿈의 배경인 Slumberland는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초현실적 공간이다. 그 속에서 왕인 King Morpheus와 Princess, Flip, Imp 등의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Nemo의 모험을 이끄는데, 어떤 모험을 했느냐에 따라 Nemo는 마지막 컷에서 울면서 잠에서 깨기도 하고, 침대에서 떨어지기도 하며, 때로는 꿈에서 깬 것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혹자는 Winsor McCay가 프로이트보다도 꿈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한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Little Nemo에서 그려지는 꿈의 세계는 일부 프로이트파 학자들에 의해서 분석되기도 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실제 경험하는 꿈의 세계의 특징을 상당히 잘 짚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데, Slumberland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서 Nemo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Nemo는 모든 사건들을 겪는 당사자이지만, 꿈을 예측치 못한 방향으로 이끄는건 외부적인 사건들이거나 Flip의 장난의 결과다. 그 외에도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이라던가, 갑자기 주변의 사물이 어마어마하게 커진다던가 하는, 어렸을 때 누구라도 경험해보았을 꿈들을 Winsor McCay는 아름다운 그림과 색으로 재현해내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바로 아름다운 그림이다. Slumberland는 그의 상상력이 자유롭게 펼쳐지는 공간이고, 이 상상력은 그의 손을 거쳐 형상화가 되는데, Winsor McCay는 거장이라 불리우는데 손색이 없는 탄탄한 일러스트로 Slumberland를 아름답게 재현해낸다. 아마 Nemo 가 끝까지 일관된 작품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누구도 Winsor McCay 만큼의 수준 높은 일러스트를 그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끝까지 작품을 직접 만들어내야만 했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너무 오래된 만화라서 그런지, 국내에는 Nemo 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니모"로 검색을 하면 "니모를 찾아서"에 관한 내용만 잔득 나온다) 하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 봐도 Little Nemo in Slumberland 는 책을 읽는 아이와 어른 모두 충분히 즐거워할만한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특히 일러스트나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꼭 한 번 봐야할 책이 아닐까도 싶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국내에도 Little Nemo가 정식으로 출판될 날이 있기를 바란다.

December 11, 2006

마지막 거인

프랑수아 플라스 지음/윤정임 옮김/디자인하우스/8800원

우연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마음이 그 쪽을 향하고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부쩍 환경과 생태에 대한 책들이 손에 자주 잡히는 편이다. 사실 이 책을 집어든건 수채화풍의 삽화가 맘에 들어서였는데, 뜻하지 않게도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담긴 책이라서 놀랐다. 가볍게 읽으면서도 부드럽고 깊이 있는 울림. 동화는 이래서 좋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 책은 학문적 호기심으로 가득찬 주인공이 거인족을 만나 그들의 삶을 기록하지만, 세상에 거인족의 존재를 알림으로써 그들을 파멸로 이끄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인간의 발이 닿지 않는 고원에서 살아가는 거인족들은 피부로 자연과 공명하며 이야기를 하고, 밤이면 별을 보며 노래하는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그에 반해 인간은 그 아름다움을 경배하기는 커녕, 이익을 위해 그것을 파괴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주인공은 명예욕에 취해 거인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남은 평생을 어부로 살아간다.

생각해보면 뻔한 얘기다. 인간의 욕망과 욕심이 자연을 파괴하고 결국 스스로의 터전을 망칠 것이라는 뻔한 이야기. 요즘은 툭하면 신문지상에서 환경 오염이 심각해서 조만간 심각한 위기가 닥칠 거라는 류의 기사를 볼 수 있다. 지구 온난화로 닥치는 대재앙을 다룬 스펙터클한 헐리웃 영화도 수많은 사람들이 봤다고 한다. 사람마다 심각하게 느끼는 정도는 다르겠지만, 아마도 모두들 어렴풋하게나마 뭔가가 문제라는걸 알고 있을거다. 근데 왜 계속 이 모양일까?

물론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함으로써만 기능할 수 있는 체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윤은 그 자체로 물신화된 욕망이기도 하지만, 이윤을 형성하는 방식 자체가 끊임없이 타인의 욕망을 자극함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체제의 문제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어떤 체제이건, 인간이 스스로의 욕망을 다스리는 법을 깨우치지 못한다면, 인간이 지구의 진정한 재앙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현경 교수는 "아름다움이 결국 우리를 구원할거"라고 말했다. 그 분이 어떤 뜻으로 그 말을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 말은 내게는 상당히 역설적인 의미로 다가왔다. 내게 있어 인류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자신들이 얼마나 아름다움의 반대에 있는, 즉 추한 존재인가를 깨닫는데 있다고 본다. 아마 이 책의 저자가 정성들여 묘사하는 거인의 아름다움은, 눈 앞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파괴하며 아귀다툼을 벌이는 인간의 추함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치일 것이다. 여전히 추상적인 이야기지만, 생명의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의 추함을 깨달을 때,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해 반성할 때, 어쩌면 아름다움은 진정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지 모른다.

ps. 책은 예쁜데, 사실 좀 비싸다.

December 16, 2006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우석훈 지음/녹색평론사/10000원

오래간만에 읽은 정세적인 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미 FTA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름의 원인규명과 해법을 제시하는 책이다. 한미 FTA에 관한 글은 여럿이 있지만, 이 책은 저자가 경제학자로서의 이론적 지식과 국무조정실 등에서의 실무적 경험을 잘 버무려서 한미 FTA의 제반 문제점들을 매우 설득력있게 짚어낸다는 점이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저자가 실무자의 관점에 서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엄밀히 말하면 저자의 주장은 "한미 FTA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한다. 그러나 지금은 제대로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협상을 중단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국민투표로 부결시켜야 한다"라고 정리될 수 있다. 결론만 보자면 "한미 FTA는 안된다"는 여타의 주장과 궤를 같이하지만, 반미 프로파간다로 FTA 반대를 끌어들이면서 원론적인 주장만 되풀이하는 주장에 비해서는 훨씬 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이다.(데모만 한다고 실천적인건 아니다. 중요한건 복잡한 현실 세계 안에서 개연성을 가지고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는게 실천이다)

예컨데, 우리 농업을 살려야 한다는 명제는 당연한 것이지만, 종국적으로는 관세장벽을 없애고 완전한 자유무역의 실현을 향해 가고 있는 세계적 추세를 무작정 거스르는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자본주의를 완전히 거부하는 혁명이 일어난다면 모를까) 이런 상황에서 모든 농산물 수입을 거부하고 우리 농업을 살리자는 당위만을 되뇌이는 것보다는, 농업 문제를 미국과의 일대일 협상에서 제외하고 다자간 협상틀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제시하는 것이 훨씬 유의미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실무적인 접근은 때론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이는 대부분의 행정관료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인데, 자기가 담당한 분야만을 보다보니 국가의 발전방향과 미래라는 전체적인 밑그림과는 상관없이 부처의 입장만을 내세우는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저자에게는 국가적 미래에 대한 고민과 제도적 장치들의 동작원리, 정치 역학에 대한 이해가 함께하고 있다. 때문에 FTA의 문제점에 대한 그의 지적들은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개인적으로 우석훈씨의 블로그를 자주 들어가서 보는 편인데, 사실 저자의 어투는 다소 단정적이고 시니컬한 면이 많아 거부감을 줄 때도 많다. 저자는 자주 스스로를 "C급 경제학자"라고 폄하하곤 하는데, 사실 이런 식의 자기비하는 논쟁의 상대를 모욕하기 위해 더 자주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비주류적 입장을 가진 사람으로 오랫동안 좌충우돌하며 학문적 입장을 견지하다보니 이런 까칠함이 몸에 밴게 아닐까 싶다. 아뭏든 재밌는 사람인 것 같고, 한동안 그의 블로그를 즐겁게 지켜볼 생각이다.

December 23, 2006

햇빛 찬란한 나날

조선희 지음/실천문학사/9800원

소설을 읽으며 종종 드는 생각은, 소설가는 아마 다중인격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직업이 아닐까 싶다는 것이다. 소설가가 반드시 자신의 이야기를 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어떤 캐릭터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캐릭터의 입장에 서 보는 것이고, 그래서 그 캐릭터가 작가 자신의 경험과 강하게 공명할 때 생명력 있는 캐릭터가 탄생한다. 그렇게 탄생한 캐릭터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독자에게도 그러하거니와, 작가 자신에게는 평생을 함께 할 또 하나의 자아와도 같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의 시작이 두 인격이 하나의 몸에서 살아가는 샴 쌍둥이의 이야기라는 점은 흥미롭다. 작가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내게는 여러 개의 자아와 함께 살아가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책 곳곳에서는 그녀의 여러 자아를 만날 수 있다. 작가로서의 자아와, 기자로서의 자아, 20대로서의, 30대로서의, 40대로서의 자아. 어머니로서의 자아와 딸로서의 자아, 그리고 인텔리로서의 자아까지. 그녀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동시에 그녀의 이야기다.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은 마지막으로 실려 있는 "향수"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남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인 탓도 크겠지만, 다른 어느 글보다도 잔잔하게 마음을 울리는 감동이 있는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에 상처받은 이를 치유하는건, 역시 사랑이다.

December 25, 2006

느린 희망

유재현 지음/그린비/14900원

쿠바를 꿈꾼지는 벌써 여러해째다. 카리브해의 아름다운 풍광과 강렬한 살사 리듬, 스페인 식민지의 추억, 그리고 혁명의 흔적들. 쿠바는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나라다. 하지만 직장에 매여 있는 샐러리맨의 입장에서, 카리브해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저 섬나라를 가보겠다는 계획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가게 된다면, 적어도 한 달은 거기서 지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몇년째, 정보만 모으고 있다.

그동안 본 쿠바 여행기만 몇 권인데, 그 중 이 책은 단연 발군이다. 자세한 여행 정보야 론리 플래닛 쿠바 편이 대부분 제공해주기 때문에, 내가 쿠바 여행기를 읽으면서 기대하는건 정보보다는 경험담이다. 다행스럽게도 저자는 스페인어를 꽤 깊이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다. 덕분에, 이 책에서는 장소에 대한 나열보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사회주의 국가 쿠바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었구나 싶다. 중간중간 삽입된 "쿠바 리포트"도 쿠바의 정치/사회에 대한 정보를 적절하게 제공해준다.

하지만, "느린 희망, 지속 가능한 사회"를 운운하는 책이 너무 화려하다. 번들거리는 종이에 잔뜩 멋을 부려 여백을 충분히 활용한 도판은, 쿠바의 친환경/생태적 정책에 대한 찬사와 영 어긋난다. 혁명을 논하는 작가의 언설이 관념의 과잉처럼 느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쿠바의 민중을 말하던 당신도 결국 자본주의 대한민국의 인텔리일 뿐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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