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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짧은 동거

장경섭 지음/길찾기/8800원

한 남자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사과를 우적거리며 책을 보고 있다. 그의 너머로 어스름히 보이는 싱크대 앞에서는 펑퍼짐한 몸매의 '그'가 설겆이를 하고 있는게 보인다. 잠시 후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리자 남자는 "뭐야? 또 깬거야?"라며 다가가 다친다며 깨진 접시를 치우는 '그'의 손을 잡지만, '그'는 남자의 손을 매섭게 뿌리치고 한 번 째려본 후 다시 설겆이를 계속한다. 남자는 자신이 요즘 소흘했다며 바닷가나 같이 다녀오자며 '그'를 달래려한다. 익숙한 풍경이다. 단 하나, '그'가 바퀴벌레라는 사실만 빼고.

이거 심상치 않은 만화다. 아니, 그저 바퀴벌레가 등장했기 때문이 아니다. 바퀴벌레와 동거하고 있다는 농담(?)이야 수많은 자취생들이 울궈먹은 레파토리겠지만, 이 농담같은 설정을 존재와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로 이끌어가는 능수능란함은 작가가 보통의 내공을 지닌 이가 아님을 알게 해준다. 갑자기 어디서 이런 고수가 나타난걸까.

웹에서 장경섭이라는 이름을 찾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실은 그가 창비에서 나온 인권만화 "십시일反"에 참여한 10인 중 한명이었다는 사실이다(그렇다면 나도 그의 만화를 분명 보았을텐데, 기억에는 남아있지 않다). 그 외에는 10년전(1996년) 어느 독립만화잡지에 실었다는 <장모씨 이야기>가 그의 짤막한 이력의 전부다. 10년 전에도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내공을 일부 설명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두어줄로 요약되는 짧은 이력은 여전히 미스테리다.

아마도, 작가는 많이 방황했나보다. 만화가로서의 자신의 길을 고민하는 모습은 그의 작품세계 곳곳에서 묻어난다. 끊임없이 중첩되는 자의식의 세계를 보여주는 "즐거운 나의 방"이나, 미래의 나를 만나는 "히말라야에 가보셨나요"와 같은 단편들을 통해 작가는 만화를 생업으로 삼은 자신의 선택을 끊임없이 반추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으로 봐서는, 그 길었던 갈등의 시간들이 그에게 헛되었던 시간은 아닌 것 같다. 차곡차곡 쌓인 성찰과 고민은 그의 속에서 제대로 숙성이 되어 이렇게 진국으로 흘러넘치고 있지 않은가. 오랜만에, 느리지만 긴 호흡으로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는 작가를 만난 것 같다.

어쨌거나, 다시 '그'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우선 "'그'와의 짧은 동거"에서 처음 느껴지는 인상은, 이것이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야기는 주인공인 장모씨가(어느 모로 보나, 장모씨는 작가의 페르소나다) 어느날, 정도를 지나친 외로움에 지쳐 덜컥 바퀴벌레인 '그'와의 공존을 인정해 버리면서 시작된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돌아온 싸늘하게 불꺼진 자취방 속에 담긴 그 공허함. 방바닥에 어지러이 흐트러진 잡동사니 사이에 비집고 앉아 있자면 울컥 밀려오곤 하는 그 서러움. 혼자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봤을 바로 그 외로움에, 장모씨는 그동안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무시했던 타자에게 마음을 연다.

장모씨가 마음을 연 타자가 바로 '그', 바퀴벌레다. 설정상, 만화 속의 사회에서 의인화된 곤충들은 낯선 존재는 아니다. 사람들은 곤충과의 대화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인간'사회의 철저한 타자일 뿐이다. 곤충들을 인간사회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이 만화는 기본적으로 알레고리로 읽힐 수밖에 없다. 곤충들이 뭘 의미하는지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어느 해석이건 그네들이 실제 우리 사회의 "타자"들 중 하나(혹은 전부)를 의미함은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외국인 노동자일 수도 있고, 동성애자들일 수도 있고, 장애인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장모씨가 이중의 의미(개인/사회)로부터 타자인 존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고, 때문에 타자와의 만남은 개인적인 변화를 넘어 사회적인 함의를 갖도록 확장되게 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중의 타자와의 만남은 간단치 않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 전적으로 개인적인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첫 장면에서 보이는 권력관계(설겆이하는 '그'와 사과를 먹는 장모씨)는 기실 사회가 타자를 대하는 권력관계의 반영이며, 애초에 이 두 동거인(?)들의 관계는 그 권력관계 속에 규정되어 있었다. 타자와의 만남에 필연적인 어긋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변화를 강요받는 쪽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장모씨는 "내가 그의 쪽으로 가거나 아니면 그를 내 쪽으로 끌여들여 주거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을 뿐이다.

이 권력관계를 뒤집는건 "의수"의 존재다. 장모씨의 여자친구인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함으로써 타자이기를 거부한, 애초부터 적응을 택한 쪽이다. 하지만 장모씨, 그리고 '그'와의 만남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결국 날개를 펼치고 비행을 시작한다. 본능을 거부하고 공존을 위해 인간에게 맞추고자 했던 '그'와 타자로서의 삶을 당당히 택한 의수. 이 대비 속에서 '그'의 좌절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우리가 타자에게 강요하는 선택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말이다.

그러면, 남은 것은? 우리는 그렇게 타자와 스쳐 지나가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잊고 살아가야 하는걸까? 아니다. 비록 슬픈 결말일지라도 타자와의 만남은, '그'와의 짧은 동거는 결코 헛된 시간은 아니었다. '그'와 의수 모두를 떠나보낸 장모씨는 겨울이 찾아오자(그의 옥탑방에 뽀얗게 눈이 내린 장면 - 눈을 잔뜩 짊어진 나무가지처럼 툭 꺾어지는 스탠드 - 은 인상적이다) 동면에 들어간다. 고치 속에서 그는 벌레의 형상을 하고 웅크린채 겨울을 보낸다. 봄이 되어 고치 밖으로 나온 장모씨의 겉모습은 변한 것이 없지만, '그'를, 그리고 의수를 가슴 속에 품은 그의 내면은 탈피를 끝낸 성충처럼 한층 성숙해 있을거다. 그는 더 이상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을거고, 타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을거다. 타자는 자아의 거울이고, 모든 성찰은 바로 그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발견하면서 시작됨을 깨달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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