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1880~1918
스티븐 컨 지음/박성관 옮김/휴머니스트/30000원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항상 인류 역사의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해왔다. 굳이 역사유물론까지 갈 필요도 없이,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선사시대 역사 구분이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 였음을 떠올려보면 된다. 기술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기술 결정론으로 귀결되서는 안되겠지만, 기술은 생산의 양식을 바꿔놓고, 그러한 생산양식의 변화가 사회 구조의 변화를 이끌어냈음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마찬가지의 시대 구분을 오늘날까지 확장시켜보자. 오늘날의 생산양식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테크놀로지는 열기관과 전기/전자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이니 휴대전화니 최근 급격한 기술 발전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지만, 그것도 근본적으로 보면 전기/전자 기술이라는 패러다임의 한 가지일 뿐이다. 여전히 우리는 화석연료를 태우는 자동차와 비행기를 타고(열기관), 확장된 모르스 부호로 인터넷을 즐기고 있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 진짜 기술혁명은 19세기 말에 일어났고, 우리는 아직 그 시대(뭐라고 불라야 할지 모르겠지만)의 연장선상에 살고 있다.
1880~1918년이라는 시기는 그래서 중요하다. 산업혁명의 결과 산업 자본주의가 정착하면서 사회 조직 전반이 자본주의적으로 재편되었고, 그에 따라 우리의 의식 세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들이 그 때의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때문에, 이 시기의 문화에는 이러한 변화의 충격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데, 이 책이 문화사를 통해 읽어내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대의 의식세계를 형성한 근본적인 충격 말이다.
게다가, 이 시기의 기술혁명은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의 기술이 1차적으로는 지배계급에 의해 향유되고, 그 후에야 차츰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간 반면(예컨데, 철의 사용은 지배계급의 전쟁무기로 우선적으로 활용되고, 시간이 상당히 흐른 후에야 농사도구 등으로 확산되었다), 19세기 말에 촉발된 기술혁명은 다수 대중을 직접적으로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른바 테크놀로지의 대중화, 민주화라고 할 수 있는데, 덕분에 기술혁명의 충격은 더욱 급속도로 사회 전체를 휩쓸었고 사람들의 의식 전반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기에 이른다.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이, 저자는 이 시기의 의식상의 변화를 시간감각과 공간감각의 변화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엮어낸다. 열기관으로 촉발된 이동 수단의 혁명적 발달은 세계를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시켰고, 통신의 발달은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동시적 사건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편리함? 2시간 걸리던 대전까지 1시간에 갈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편리함이다. 하지만 일주일 걸리던 거리가 반나절로 줄어든다면 그건 단순한 편리함을 넘어선다. 편지를 써서 보내고, 그 답장이 돌아오길 기다리던 사람에게 전화로 상대방과 동시에 대화할 수 있게 되는건 정말로, 편리함 이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충격적인 변화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세계"의 확장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세계"는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고장으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그의 의식세계 또한 이 경계를 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전 지구가 마음만 먹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로 축소되고("80일간의 세계 일주"는 이 시대의 소설이다), 움직이지 않고도 전세계의 소식들을 거의 동시적으로 전해들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저 언덕 너머에 더 큰 세계가 펼쳐져 있다는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던 세계가 내가 직접 가 볼 수 있고, 혹은 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다시 말해 통제가능한 "세계"가 된 것이다. 이제 서구문명은 바야흐로 전지구적 존재로 확장되기에 이른다.
그래서, 서구 문명은 미래에 대한 장미빛 전망에 도취되어 있었다. 새로운 기술은 세계를 서구 문명의 손바닥 안에 가져다 주었고, 그것은 새로운 번영과 평화(그들은 더 넓은 땅에서는 자기들이 적당히 서로 만족하며 살 줄 알았다)를 약속하는 듯했다. 물론 몇몇 날카로운 혜안을 지닌 이들(예컨데,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 같은 책에서 드러나듯)은 제국주의의 불길한 기운에 경고를 보내기도 했지만, 그런 우려조차도 이내 낙관론 속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채 덮여버리고 만다. 공간의 확장으로 점령할 식민지들이 무한정(?) 늘어났기 때문에 유럽 열강들끼리 서로 싸울 필요도 없을 것이며, 설혹 오해로 인한 갈등이 생기더라도 발달된 통신기술을 사용하여 갈등을 재빨리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기술은 파국을 막기보다는 가속시키는 역할을 했다. 발달된 이동수단 덕에 열강들은 서로의 공격 능력에 대해 신경과민 상태에 빠져들어 재빠른 선제공격만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동시 통신은 오히려 연락 과정에서의 시간지연이 해주었던 완충 역할을 제거함으로써 서로간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결국 사소한 실수나 뜻하지 않은 오해들마저 바로잡을 틈도 없이 사태의 흐름에 가속도를 더하기 시작하면서, 유럽은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리며 전쟁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인간은 세계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지만, 정작 그 세계를 감당하지 못하고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암흑의 핵심"에서 카츠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더 강력하고 파괴적인 무기들과, 더 나은 기술로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도 함께.
저자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이 시기의 다양한 문화 영역들을 훝어, 거기에 반영된 사람들의 의식상의 변화를 읽어낸다. 하지만 문화는 학술 분야처럼 명시적으로 존재하는 공리들에 따라 전개되는 논리적인 영역이 아닌지라, 그 안에서 일관된 흐름을 잡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다양한 문화 영역들이 서로간의 영향을 명시적으로 드러내 인정할리도 없기에, 그 안에서 공통점들을 읽어내는 작업은 상당한 정도의 유추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자칫 비약이 되기 쉬운 이 유추들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건, 풍부한 사료들과 과감하면서도 오버하지 않는 저자의 균형감있는 논지 전개 덕택이다. 또한, 중요한 사회학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다양한 문화 영역들의 기념비적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은 이 책의 더할 나위할 바 없는 장점이 된다. 근래 보기 드문 역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