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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 지음/푸른역사/14500원

개인적으로 이 책은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어떤 역사서보다도 생생하게 조선 시대의 민간 풍속을 그려낸 민속학의 걸작이다. 풍부한 자료와 꼼꼼한 분석이 돋보이며, 자료가 부족한 부분에서는 개연성 있게 추론해 나가지만 결코 근거 없는 예단을 하는 법이 없다. 게다가 눈을 즐겁게 하는 도판까지 갖추었으니 금상첨화. 근래 보기 드물게 책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그런데,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저자의 겸손(?)이 마음에 걸렸다. 저자는 서문에서부터 시작하여 본문 이곳 저곳에서 자신의 작업이 "진지한" 학자들로부터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는 분야를 다루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물론 저자가 정말로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겸손 아닌 겸손에는 현재의 역사학계가 민속학을 다루는 시선에 대한 반어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물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 시대의 사료들은 대부분 양반 지식인 계층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따라서 사료에 의존하여 과거를 재구성하는 역사학의 입장에서는, 풍부한 자료를 남진 지배계급의 역사가 민초들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풍성한 이야기거리가 될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역사는 가진 자들의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건 변명이다. 역사는 지금까지 가진 자들의 것이었지만, 앞으로도 가진 자들의 것일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분명 과거의 역사는 가진 자들을 "훨씬" 더 많이 서술하고 있지만, 민초들의 역사 역시 그 흔적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은 필연이 아닌 역사가의 선택일 뿐이다. 바로 이 책의 저자가 다른 선택을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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