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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06 Archives

April 7, 2006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

마누엘 푸익 지음/송병선 옮김/현대문학/9000원

책을 다 읽고 나서 안 정보인데, 왕가위 감독이 이 책을 읽고 너무나 강한 인상을 받아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관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찍고 나니 영화는 부에노스아이레스와는 전혀 상관 없는 영화가 되어 버렸고 감독은 결국 영화 제목을 바꾸어야만 했다. 그렇게 나온 영화가 바로 장국영 주연의 "해피투게더"라고 한다.

영화를 보지 않은 나로서는 자세한 내막은 알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이 책은 동성애를 다룬 내용도 아니며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도시에 대한 예찬도 아니다. 왕감독께서 이 책을 읽고 어떤 감흥을 느끼셨는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이 책과 "해피투게더"를 연관시키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의 모티프가 된 책" 따위의 판촉방법은 확실히 오버라고 생각된다.(하긴, 나도 해피투게더를 들먹여 독자들을 잡아두려 하고 있긴 하다)

<해피투게더>라는 영화와 좀 부적절하게 얽히긴 했지만, 거꾸로, 마누엘 푸익이 영화에 보내는 애정은 무척이나 각별해 보인다. "거미 여인의 키스"(이건 영화로만 보고 소설로는 못 읽어봤지만)에서는 영화가 사건 전재의 중요한 얼개로 도입되었는데, 이 소설에서는 오히려 형식적인 측면에서 많이 차용된 듯하다. 이 책이 보여주는 서사 양식은 소설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정적인 공간을 하나하나 세부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등장인물간의 대화로 모든 것을 대체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느 장에서는 전화를 들고 이야기하는 한 명의 대사만으로 모든 이야기가 전개되기도 한다. 이 다양한 실험들을 관통하는 공통된 특징은 그것들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인 것처럼 시각적 이미지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글을 통해 독자에게 시각적 경험을 주고 싶었던게 아닐까.

안타까운 점은, 각 챕터의 시작부에 짧게 인용되는 영화들을 내가 거의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들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훨씬 풍성한 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다.

Anyway, pornography는 역시 eros가 아닌 권력의 문제다.

April 21, 2006

폭격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지음/김남섭 옮김/한겨레신문사/15000원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였다. 영화의 후반부에 접어들어 주인공들은 동막골로 향하는 미군의 폭격을 돌리기 위한 작전을 준비한다. 그리고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는 그들에게 육중한 비행기 엔진음이 들려오기 시작하고, 잠시 후 한쪽 하늘을 뒤덮은 비행기 무리가 지평선 쪽으로부터 다가오기 시작했다. 와... 처음이었다. 언제나 나는 폭격이라는 것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장면으로만 상상해왔다. 비행기가 지나가고 나면 잠시 후 땅에서 솓구쳐오르는 흙먼지만이 폭격의 이미지를 구성할 뿐이었다. 그런데 (비록 가상의 체험이지만) 아래로부터, 대상의 입장에서 바라본 폭격은 전혀 다른 진실을 보여줬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위압감이었고, 절망이었고, 그 무엇보다도 큰 공포였다.

그리고, "반딧불이의 무덤"을 읽었다. 비처럼 내리는 소이탄이 도시를 불태우고,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절규했다. 그들은 아마 황국의 신민으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일본의 전쟁 수행에 복무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해진 폭격은 정당했을까? 다행히도, 폭격을 가한 자들도 그런 변명은 하지 않는다. 대신, 전쟁에서 승리한 이들은 이 모든 사실을 아예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민간인에 대한 '고의적' 폭격은 없었다. 그렇다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함부르크는? 드레스덴은? 그 곳에게 다치고 죽어간 수십만의 사람들에게 그 어마어마한 절망과 공포를 가한 폭력이 고의가 아니었다면, 과연 그것이 실수로 가능한 일이었을까?

선언된 언설은 대개 현실을 기만한다. 히로시마를 순식간에 쓸어버린 그 어마어마한 폭탄의 이름이 'Little Boy' 였듯이, 이 땅에 공화주의의 전통을 수십년 후퇴시킨 독재자가 '공화'당을 만들고, 광주에서 수많은 민중을 학살한 자가 '민주정의'당을 만들었듯이. 언어는 자조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현실과 대척점에 선다. 하지만, 그렇게 기만된 현실을 복원하는 것이 바로 역사의 힘이다. 민간인을 향한 폭격은 없다는 선언, 폭격이 종전을 앞당겨 결국은 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것이라는 논리, 정밀 폭격으로 군사적 목표물만을 파괴한다는 선전이 있다. 하지만 폭격의 역사는 전혀 다른 진실만을 보여줄 뿐이다.

오래전부터, 심지어 아직 서구인들 스스로조차 창과 화살로 전쟁을 치룰 무렵부터, 하늘로부터의 폭격은 서구인들의 상상 속에 존재했다. 그것은 창과 화살로 무엄하게도 서구인들에 덤벼드는 야만인들에게 하늘로부터 내리는 단죄의 형벌이었다. 적들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저 높은 곳으로부터 안전하게 그들을 절멸시키는 힘에 대한 상상력이 서구인에게 준 카타르시스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신의 권능, 다시 말해 절대적 권력의 발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비행기가 발명되었다. 꿈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식민지 열강들은 세계 지도에 자로 줄을 그어가며 땅따먹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무렵의 역사 서술에는 서구 열강들 사이의 전쟁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무슨 전투를 했고, 그 결과 국경선이 어떻게 그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땅에 오래전부터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서구 열강들에게 얌전히 자신들의 땅을 헌납하고 영광스러운 노예의 길로 들어섰는가? 엄밀히 말하자면, 토착민들과의 사이에서 서구인들이 말하는 "전쟁"은 없었다. 전쟁은 인간사의 한 부분이다. 인간이 미천한 미개인들과 전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복종하지 않는 야만인들에게는 오직 "절멸"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늘으로부터의 단죄, 소돔과 고모라를 태운 불기둥이 이 땅에 내릴 지어다.

폭격은 20세기의 초반 식민지 곳곳에서 착실하게 실험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 폭격의 역사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서구인들이 비로서 폭격에 경악하기 시작한 것은, 그 폭탄이 자신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한 1,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였다. 그제서야 유럽인들은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이토록 무차별적인 살상을 저지를 수 있냐고 절규했지만, 그 절규는 비서구인들은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서구 중심주의의 야만을 재확인시켜줄 뿐이었다. 사실, 폭탄이 서구인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게 되기에는 많은 논리의 변화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와 다른 타자를 지배하거나 아니면 절멸시켜야 할 존재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 가했던 폭력과 동일한 논리 구조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폭격은 곧 상대에 대한 완전한 힘의 우위를 선포하는 행위였다. 미국이 아우슈비츠의 살인 공장을 파괴해달라는 유대인들의 요청을 거부한 채 대신 독일 도시들을 폭격했던 것도, 일본의 항복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던 시점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것도, 폭격의 목적 자체가 완전한 힘의 우위를 과시하는데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거대한 버섯구름이 2차대전의 끝을 선언했을 때, 세계는 새로운 권능의 주체가 어디로 옮겨갔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세계는 여전히 드레스덴과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정당성에 대해 침묵한다. 그건 과연 피해자들이 전쟁을 시작한 이들이라서일까, 아니면 폭격을 가한 자가 승자이기 때문일까.

대답은 오늘날에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미국은 이라크의 어느 마을에 폭탄을 쏟아붇고 있다. 군사적 목표만을 향한 제한적인 폭격이며 민간인 피해는 없다는 표준 멘트가 뉴스에서 흘러나온다. 하지만, 역사상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인도주의적' 폭격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으리라고 믿을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때때로 양심적인 언론인들의 목숨을 건 탐사보도를 통해 진실의 일부가 드러날 때조차 우리는 잠시 놀라는 척을 할 뿐이고, 그들은 단지 실수에 의한 오폭일 뿐이라는 뻔한 멘트를 반복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100년 동안 반복된 폭격의 역사이다.

April 30, 2006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송병선 옮김/민음사/9000원

생각해보니, 우리에게 노년은 일종의 "여분의 삶" 처럼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까, 이 시기 동안의 삶은 항상 "죽음"을 전제로 돌아가는 듯하다. 물론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한다는 것은 필요한 일일거다. 하지만 '삶'이 '살다'가 아니라 '죽다'를 중심에 놓는다는건 뭔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마르케스도 올해 일흔 여덟 살이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노년의 삶은 여전히 '살다'인 것 같다. 아흔번째 생일을 맞는 주인공은 여전히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생활 습관을 바꾸고,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그가 죽음을 그저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일상의 이곳저곳에서 자신이 늙었음을, 그리고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상기한다.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늙음과 죽음은 삶의 한 조건이지, 결론이 아니다. 내일 당장 죽음이 찾아올지라도, 오늘은 내 삶을 살아가야지 않겠는가.

Anyway, 마르케스의 소설을 여러 권 읽다가 보면, 이 마초 할아버지는 정말 "여자"들을 좋아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자들을 도구로 한 자신의 "쾌락"을 사랑하는 여느 오입쟁이들과 착각하지는 말자. 이 할아버지는 정말 여자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매혹되며, 감동한다. 에로스는 거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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