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anuary 2006 | Main | March 2006 »

February 2006 Archives

February 22, 2006

전망 좋은 방

E.M.포스터 지음/고정아 옮김/열린책들/9500원

이야기 하나. 언젠가 한 후배에게서 프로그래머의 정년이 40세도 채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전공을 바꿔야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그 때가 내 나이 25세 무렵이니 후배는 20대 초반이었다 -_-) 또 한 친구는 지금까지 배운게 이 짓(?) 밖에 없으니 일단 생계는 회사에서 월급 받는걸로 해결하고, 가욋돈을 모아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노후를 대비해야한다고 역설한다. 다른 한 친구는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이야기 둘. 많은 대학생들이 취업에서 '도전'보다는 '안정'을 원하고 있다. 기업에서 '평생 고용' 개념이 사라져 가면서, 학생들의 직업선호도가 더욱 안정 희구 성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대학신문〉이 지난해 201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학생 의식 조사에서 39.6%가 공무원·공기업을 입사 선호 1순위로 꼽았다. 1998년 8.7%에 그쳤던 것이 구제금융 사태 뒤인 2000년 13.9%를 기록했고, 2004년 이후에는 대기업과 외국계 기업마저 제쳤다.(인터넷 한겨레 2월 19일, <<대학생들 너도나도 "공무원·공사 직원">> 기사 中)

이야기 셋. "... 그리고 가장 성공하지 못한 인생은 준비 없이 기습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준비하고 있는데 기습이 닥치지 않는 인생이다. 이런 종류의 비극에 대해 우리 영국의 도덕은 당연히 침묵을 지킨다. 위험을 대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고, 사람이건 국가건 완전 군장을 갖춘 채 비틀거리며 살아 나가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E.M.포스터 『하워즈 엔즈』(1910) p.141


나는 가끔 세상을 젊음과 늙음의 투쟁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곤 한다.(여기서 젊음과 늙음은 단지 나이에 따른 구분은 아니다) 젊음에게 세상은 새로운 신천지이며 기회의 땅이다. 이 기회의 땅에서 젊음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려하지만, 그 땅에 이미 터를 일구어 정착한 늙음의 저항과 경험부족에서 오는 시행착오들을 극복해야만한다. 반면 늙음은 자신들의 땅을 생소한 방식으로 바꾸어버리려는 젊음을 경계한다. 그들에게는 비록 예전의 정렬은 사라졌지만, 오랜 경험에서 축적된 완숙함을 무기삼아 젊음의 서투름을 압도하려한다. 이 투쟁에서 젊음이 늙음을 압도하면 우리는 너무 많은 시행착오를 감내해야하고, 반대로 늙음이 젊음을 압도하면 사회는 변화의 역동성을 잃게 된다. 요컨데, 이들 사이의 투쟁이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지할 때 그 사회는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종종 나는 우리 사회에서 늙음이 점점 젊음을 압도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젊음은 이제 실패를 너무나 두려워해서 늙음의 안정된 지식에 너무 쉽게 귀를 기울인다. 고등학생들은 취직 걱정을 하며 전공과 대학을 선택하고, 대학생들은 오랫동안 안정된 수입을 줄 수 있는 회사를 선택하고, 직장인들은 은퇴 후의 노후를 걱정하며 살아간다. 그럼 도대체 우리에게 '현재'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지금 내가 원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현재'는 막연한 '미래'에 저당잡혀 마치 아득한 '과거'처럼 희미해지고 있다. 젊음은 채 피어나기도 전에 늙음의 표정을 하며 이마에 주름을 잔뜩 잡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젊음이 조로한만큼 사회도 조로해간다.

이 책 『전망 좋은 방』은 기본적으로 낭만적인 로맨스 소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100여년 전 빅토리아 시대에 있었던 젊음과 늙음의 투쟁으로도 읽힌다. 소설의 축을 이루는 갈등관계는 루시로 대표되는 젊음과 샬롯으로 대표되는 늙음이다. 여기서도 늙음은 끊임없이 젊음을 포섭하려 한다. 젊은은 늙음에게 반항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경험 없음에서 비롯된 불안은 어느 틈에 젊음으로 하여금 늙음을 닮아가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자본주의가 조장한 경제적 불안감이라면, 빅토리아 시대의 젊음들을 짓누른건 과거의 권위들, 즉 종교와 관습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인 투쟁의 법칙은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늙음은 결코 젊음을 이길 수 없다. 결국 이 세계를 책임지고 이끌어갈 이들은 늙음이 아니라 젊음이기 때문이다. 현명한 늙음은 젊음과 헤게모니를 다투는 것이 아니라, 젊음의 투박한 열정을 다독이면서도 그들에게 자신의 방식으로 이 세계를 이끌어가도록 격려한다. 바로 조지의 아버지 에머슨 씨처럼. 혼란에 빠진 루시를 구원하는 사람이 열정에 가득찬 젊음(조지)이 아니라, 사려 깊은 늙음(에머슨 씨)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세상 모든 사람이 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젊은가 혹은 늙은가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무엇이 현명한가를 깨닫는 일일 것이다.

그래도, 잊지 말자!! 결국 이 세계를 책임지고 이끌어가는건 젊음이다. 젊음이 젊음답지 못한건 정말 슬픈 일이다.

ps. 이 소설의 원제목 『A room with a view』에서 view는 "전망"이라는 중립적 단어가 아니라, 그 자체로 '좋은' 전망을 뜻한다. 따라서 'good view'나 'bad view'가 있는게 아니라 'with view'거나 'without view'라고 쓰는게 옳은 표현 되겠다. with view인 아파트는 월세가 비싸다 ㅠ_ㅠ

February 28, 2006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이왕주 지음/효형출판/13000원

난해하게 느껴지는 철학 개념들을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들을 예로 삼아 알기 쉽게 풀어놓았다. 딱딱한 철학서를 시도해보다가 서문에서 잠들어버리는 사람들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볼만한 책이다. 복잡한 개념들은 가능한 쉽게 서술하려는 저자의 배려도 칭찬할만 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철학과 영화라는 두 재료를 버무려놓는 요리사의 솜씨는 그다지 매끄럽지는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제목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에서 알 수 있듯이 글의 중심이 되는건 철학이다. 영화는 철학 개념을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 발탁된 배우라고 할 수 있는데, 종종 저자의 영화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 정작 설명하고자 한 철학 개념과는 그닥 어울리지 못하는 사례들이 눈에 띈다.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조연으로 출연시켜놓고 너무 많이 카메라에 담아 주연이 누구인지 헷갈리게하는 감독 같은 느낌이랄까.

하나의 철학 개념에 종속되기에는 영화라는 텍스트에 포함되어 있는 기호들이 너무 다양한 탓도 있으리라. 오히려 거꾸로, 영화를 중심에 놓고 철학적으로 깊이 있게 분석해보는 방식도 좋았을 것 같다. 글의 분량은 길어지겠지만, 보다 알차게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

About February 2006

This page contains all entries posted to 다락방 서재 in February 2006. They are listed from oldest to newest.

January 2006 is the previous archive.

March 2006 is the next archive.

Many more can be found on the main index page or by looking through the arch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