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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뉘엘 카레르 지음/윤정임 옮김/열린책들/8500원

이 책에서 다루는 장끌로드 로망의 사건은 1993년 프랑스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며, 이 소설(?)은 그 사건의 재판 과정에 실재로 작가가 개입한 기록이다. 사건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책은 작가가 현실의 사건과 어떤 거리를 유지하며 어떤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 생생한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도 인상적이다. 가상의 사건을 다룰 때야 누구의 관점에서 글을 쓰느냐가 작가의 기호 혹은 글의 전개를 위한 전략적 관점에서 선택될 수 있겠지만, 현실의 사건을 다룰 때는 훨씬 고차원의 방정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흔히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범인의 심리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사건을 개인적인 차원으로 환원시켜 그가 범한 죄의 무거움을 희석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거꾸로, 그가 행한 행위만을 부각시킬 때는 우리는 그 사건에 대한 입체적인 조망을 잃고 선악의 이분법 속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적절한 거리감. 이 책을 쓰면서 작가가 끊임없을 고민했을 문제는 바로 이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었으리라. 작가는 18년간 거짓된 삶을 살아온 로망의 삶을 가능한 객관적인 문체로 서술하되, 결코 그의 심리를 섣불리 추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로망의 삶을 뒤쫓는 여정을 따르다보면 어떤 섬뜩함이 마음 속에 자리잡기 시작하는데, 점점 형태를 갖추며 스멀스멀 모습을 나타내는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었다.

젊은 시절, 그 심리의 근저를 뒤집어보면 결코 자랑스럽지는 않은 어떤 헛된 자존심 같은 것들 때문에 내가 아닌 나를 가장한 적이 종종 있었다. 대개의 경우 그 위선의 가면은 내가 찾아서 썼다기보다는 다른 이들이 내게 투사한 이미지를(실제 나보다 훨씬 멋진 이미지) 부정하지 않는 침묵으로 승인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침묵의 대가로 이미지가 거꾸로 나를 옭아매어 그 이미지에 내 모습을 맞추기 위해 부던히 노력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내가 실제 그 이미지에 부합하는지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고, 그 기억들은 그저 젊은 날의 다소 민망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물론 요즘도 그런 모습이 남아 있겠지만.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을 짓누르는 것은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자신의 본모습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때 보일 실망감이 두려움의 본체를 형성하는 반면, 시간이 지날수록 진실이 알려졌을 때 사람들이 자신을 '위선자'라고 비난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게 자리하게 된다. 이쯤되면 진실을 밝힌다는다는 것은 "사실은 이러저러했어"라고 알리는 것 이상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사소한 거짓말조차 그럴지언데, 하물며 18년간의 거짓말과 그 위에 쌓아온 자신의 삶이 차츰차츰 종말을 맞아가는 것이 느껴질 때의 두려움은 어떠하겠는가.

"<적>은 성서에서 사탄, 즉 악마를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의미는 <거짓말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거짓말쟁이 = 악마" 이런 단편적인 도식으로 위의 문장을 이해하지는 말자. 다만 저 문장은 작가가 왜 <적>이라는 제목을 붙였는가에 대한 해명일 뿐이다. 세상에 '악'이라는게 존재한다면, 그래서 한 개인의 삶을 저주로 내몬다면, 그 삶의 모습은 바로 로망의 삶과 닮지 않았을까. 그 저주가 그의 삶 전체를 지옥으로 이끌기 전에, 그가 이제라도 거짓의 고리를 끊고 나올 용기를 지니기를 기도할 뿐이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사상 초유의 스펙터클한 거짓말의 한가운데 서 있는 우리 사회에 묘하게 시의적절한 책이 될 수도 있겠다. 물론, 거짓말하는 자가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쓰레기이며 악질"인지 "다른 사람들을 속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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