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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풍자극

폴 오스터 지음/황보석 옮김/열린책들/9500원

오랜만의 폴 오스터 소설. 2005년 발표된 따끈따끈한 신작이다.

흔히 폴 오스터의 소설을 '우연의 미학'이라는 말로 표현하곤 한다. 보통 '우연'이라고 하면 네러티브의 개연성을 떨어트리는 요소로 생각되기 쉽지만, 어쩌면 그 우연들이야말로 가장 일상적인 우리 삶의 특성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에피소드들이 하나의 중심 사건을 향해 '필연적으로' 달려가는 것이야말로, 그야말로 '소설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물론 폴 오스터표 '우연의 미학'은 우연 자체를 다루는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소한 우연으로 삶의 경로가 바뀔 때 그 사람이 하는 '선택'이다. 그 선택 속에서 그의 내면에 자리잡은 용기와 미덕들이 진하게 배어나와 우리를 미소짓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아마 이 책은 브루클린에 대한 폴 오스터의 애정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된 책이리라. 브루클린. 다리 하나 건너면 뉴욕의 심장인 맨하튼이 나오는 동네지만, 어쩌면 현대 미국 문명의 가장 변두리 동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무한경쟁의 사나운 발톱에 갈갈이 찢겨 상처받고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주류사회에서 밀려나 하나 둘 모여드는 곳. 온갖 언어와 피부색이 뒤엉켜 저마다의 고단한 어깨를 기대고 사는 곳. 하지만 진정 사람 사는 냄새를 물씬 풍기는 곳. 그게 바로 이 곳 브루클린이다.

사람 사는 냄새. 어쩐지 90년대 이후 한국 문학에서 실종된 냄새가 아닐까 싶다. 냉소, 허무, 분노, 단절, 절망. 이런 감정들은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우리 문학에서 그래도 삶은 아름답다는, 잘못 산 인생은 없다고 말해주는 담담한 미소를 접해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왜일까? 만약 그것이 단순히 작가의 연륜 차이가 아니라(연륜은 젊은 작가들이 나이가 들면서 어느 정도 보완이 될텐데) 작가가 존재하는 공간의 차이라면 문제는 자못 심각해 보인다. 우리 문학에서 "브루클린"에 해당하는 다른 단어, 예컨데 "봉천동"이라던가 "월계동" 같은 지명을 찾기 힘들다는 것은 작가라는 직업이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지식인들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징후로도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구획화된 아파트의 골방에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쥐어뜯는 작가보다는, 동네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에 담긴 사람 사는 이야기에 미소짓는 작가의 이야기가 훨씬 더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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