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슈 지음/박규태 옮김/이학사/12000원
인간은 본능이 고장난 동물이다. 본능에 충실한 동물들은 종족번식을 위해 때가 되면 발정기가 오고, 그 때 성행위를 통해 자식을 갖는다. 하지만 본능이 고장난 인간들은 종족번식을 위해 본능적으로 성행위를 하지 않는다. 이 고장난 본능을 대체하기 위해 인간의 문화는 성욕을 발명해내고 그것을 조장해 온 것이다. 이 책은 이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이 "본능"이라는 단어에 주목해보자. 지금껏 우리는 흔히 성욕 자체를 "본능"이라고 설명하는 담론에 익숙해져있다. 성매매 방지법에 반발하는 논리들이 특히 이런 담론에 기대는데, 간략히 말해 성욕은 본능이라 어쩔 수 없으므로 매춘을 통해서라도 해소시키지 않으면 각종 성범죄를 양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돌려 생각해보면 이런 논리에는 아주 간단한 반론이 가능하다. 동물들은 매춘도 강간도 안 한다. 오직 문명을 이룬 인간만이 성욕을 어쩔 줄 몰라 쩔쩔맨다. 그렇다면 성욕은 본능이 아니라 문화라고 보는 것이 훨씬 설득력있지 않을까. 그래서 온갖 성범죄와 성차별들의 원인을 본능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그것을 양산해내는 문화 자체를 까뒤집어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이 작업이 녹록치는 않다. 보통 문화는 온갖 터부와 통념들로 자신을 감추기 마련이다. 때문에 우리는 종종 우리 문화가 보여주는 서로 모순된 양상들 속에서 길을 잃곤 하는 것이다. 이 거짓 알리바이의 함정을 피해, 문화가 무심코 내뱉는 진심들을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지는 끈질김만이 그 작업을 가능케한다. 이 책의 저자가 프로이트 심리학자라는 것은 때문에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저 깊은 곳에서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무의식의 세계를 휘집어 억압된 자아를 해방시키는 치유의 과정은 문화라는 이름의 집단적 무의식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으리라.
언제나 프로이트 심리학은 쉽게 부정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냉큼 받아들이기에도 거북살스러운 면이 있다. 본문에서 저자는 추정형의 문장들을 계속 사용하는데, 이는 논리적 정합성을 학문의 기본 요건으로 간주하는 사람에게는(물론, 나다 -_-) 어딘지 믿음직스럽지 못한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하나의 가정이 그를 통해 일관성을 가지고 이 세계를 설득력있게 해석해낼 수 있다면, 그 가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리 세상에 나온지 오래되지 않은 책이지만, 충분히 이 시대의 고전이 될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