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vember 2005 | Main | January 2006 »

December 2005 Archives

December 4, 2005

성은 환상이다

기시다 슈 지음/박규태 옮김/이학사/12000원

인간은 본능이 고장난 동물이다. 본능에 충실한 동물들은 종족번식을 위해 때가 되면 발정기가 오고, 그 때 성행위를 통해 자식을 갖는다. 하지만 본능이 고장난 인간들은 종족번식을 위해 본능적으로 성행위를 하지 않는다. 이 고장난 본능을 대체하기 위해 인간의 문화는 성욕을 발명해내고 그것을 조장해 온 것이다. 이 책은 이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이 "본능"이라는 단어에 주목해보자. 지금껏 우리는 흔히 성욕 자체를 "본능"이라고 설명하는 담론에 익숙해져있다. 성매매 방지법에 반발하는 논리들이 특히 이런 담론에 기대는데, 간략히 말해 성욕은 본능이라 어쩔 수 없으므로 매춘을 통해서라도 해소시키지 않으면 각종 성범죄를 양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돌려 생각해보면 이런 논리에는 아주 간단한 반론이 가능하다. 동물들은 매춘도 강간도 안 한다. 오직 문명을 이룬 인간만이 성욕을 어쩔 줄 몰라 쩔쩔맨다. 그렇다면 성욕은 본능이 아니라 문화라고 보는 것이 훨씬 설득력있지 않을까. 그래서 온갖 성범죄와 성차별들의 원인을 본능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그것을 양산해내는 문화 자체를 까뒤집어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이 작업이 녹록치는 않다. 보통 문화는 온갖 터부와 통념들로 자신을 감추기 마련이다. 때문에 우리는 종종 우리 문화가 보여주는 서로 모순된 양상들 속에서 길을 잃곤 하는 것이다. 이 거짓 알리바이의 함정을 피해, 문화가 무심코 내뱉는 진심들을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지는 끈질김만이 그 작업을 가능케한다. 이 책의 저자가 프로이트 심리학자라는 것은 때문에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저 깊은 곳에서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무의식의 세계를 휘집어 억압된 자아를 해방시키는 치유의 과정은 문화라는 이름의 집단적 무의식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으리라.

언제나 프로이트 심리학은 쉽게 부정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냉큼 받아들이기에도 거북살스러운 면이 있다. 본문에서 저자는 추정형의 문장들을 계속 사용하는데, 이는 논리적 정합성을 학문의 기본 요건으로 간주하는 사람에게는(물론, 나다 -_-) 어딘지 믿음직스럽지 못한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하나의 가정이 그를 통해 일관성을 가지고 이 세계를 설득력있게 해석해낼 수 있다면, 그 가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리 세상에 나온지 오래되지 않은 책이지만, 충분히 이 시대의 고전이 될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December 6, 2005

우리 생애 최고의 세계 기차 여행

윤창호 외 지음/안그라픽스/15000원

솔직히,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여행기를 보고 만족했던 경험은 한 번도 없다. 정보를 얻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론리플래닛을 보면 그만이다. 하지만 여행기라는 것은 정보를 주는 책이 아니라 경험을 공유하는 책이다. 실제 여행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간접적으로나마 독자의 오감을 열어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 사람이 쓴 여행기들은 읽고 나면 허전하기만 하다.

원인을 찾자면 우선 글쓴이들의 자질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글을 읽다보면 이들이 여행하는데 들인 노력에 비해 정작 그 경험을 정리하여 글로 묶어내는데는 건성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경우 그나마 저자들이 사진작가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풍광을 사진으로 잘 모았다는 장점은 있지만, 역시나 여행의 경험을 풀어내는 글에 있어서는 피상적인 단상이나 여행경로의 나열로 일관해 버린다. 직접 경험한 본인들에게는 그런 경로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그 때의 감흥들을 되살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읽는 독자로서는 영 밍숭맹숭할 수밖에 없다. 책을 쓴다면 적어도 독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느끼는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 저자의 기본 자세가 아닐까?

또한, 여행기를 하나의 문학 장르가 아닌 실용서처럼 간주하는 출판 관행의 문제도 있는 것 같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되면서 여행 관련 정보를 찾는 독자가 늘어남에 따라, 글의 수준보다는 기획으로 적당히 잘 포장한 책만 내놓아도 '팔린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의 경우도 4명의 사진작가들이 돌아다닌 곳들 중에서 기차여행이 포함된 경우만 모아서 편집한 것인데, 그러다보니 어떤 글은 더 풍성했을 여행기를 기차여행과 관련된 부분만 발췌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심지어 사진으로만 남은 기억을 책을 내기 위해 대충 글을 추가한 듯한 느낌을 주는 글도 있다. 이런 마인드의 출판 시스템에서는 질 낮은 여행기들이 범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악평만 잔뜩 써놓으니 왠지 좀 미안하네. 그래도 멋진 풍광들을 담은 사진들로 가득 차 있으니 그리 지루하지만은 않은 책이다.(이 정도로는 수습이 안되나 -_-)

December 13, 2005

네 멋대로 써라

데릭 젠슨 지음/김정훈 옮김/삼인/12000원

좋은 글을 읽고 나면 오히려 정리하기가 힘들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너무 많은데, 졸렬한 내 문장이 그 충만함을 오히려 갉아먹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좋은 글을 쓰는 법을 배웠어도 실천은 그리 녹록치 않다. 하하.

"네 멋대로 써라"는 별로 좋은 제목은 아닌 것 같다. 원제목인 "Walking on water"가 그다지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제목은 아니었겠지만, 저자가 말하는 글쓰기란 "네 멋대로"에 담긴 뉘앙스와는 좀 다른 맥락에 놓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글쓰기란 진정성, 즉 남이 기대하는 내가 아닌 스스로가 원하는 자기 자신이고자하는 노력의 발로이다. 이건 유독 글쓰기에만 적용되는 내용이 아니다. 중요한건 바로 우리 삶의 진정성이며, 우리는 저자에게 글쓰기를 통해 그것을 배운다. 그게 이 책의 핵심이다.

동시에 이 책은 산업문명이 어떻게 학교를 지옥으로 만드는가에 대한 통렬한 비판서이기도 하다. 저자가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 중 일부는 학교제도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속에서 저자가 겪는 현실적인 고민들과 창조적인 대안들이 인상적이다. 이 책을 그저 글쓰기에 대한 지침서라 생각했을 때는 책 뒷면에 적힌 하워드 진의 추천사(?)가 좀 생뚱맞을 수 있다. 하지만 글을 읽고 나면 왜 하워드 진이 그런 글을 썼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이라면 정말,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만큼이나 교사 지망생들의 필독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ps. 책 말미의 참고도서 목록(?)도 진짜 재밌다. 왜 다른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못 써줄까?

December 21, 2005

파시즘

로버트 O. 팩스턴 지음/손명희, 최희영 옮김/교양인/27000원

6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 "~이즘"이라는 제목까지 달고 있으면 일단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관심을 가진 분야기에 구입해두고도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 있었는데, 막상 읽고 나니 이 책의 표지에도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큰 글자로 "Don't panic"이라고 박아주는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책은 놀랄만큼 잘 읽히고, 게다가 쉽다. 물론 이는 저자의 탁월한 능력 덕이기도 하지만, 파시즘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심오한 철학 체계라기보다 선명성을 생명으로 하는 대중정치 구호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파시즘 혹은 파시스트라는 단어는 그리 낯설지 않다. 하지만 정작 파시즘의 정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머리 속에 개념이 딱 잡히지는 않는다. 그것은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자신의 적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해 정치적으로 차용되어 오용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우파들은 스탈린주의를, 좌파들은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을 파시스트 정권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는 결국 "이 악마!!"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바 없는 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덕분에 파시즘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상이하거나, 아니면 인종청소를 불러일으킨 히틀러 같은 지배자의 "광기" 정도의 단편적 차원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파시즘의 이해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이 대중정치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이다. 권위주의 독재정권이나 스탈린주의가 대중을 수동적인 존재로 강제하거나 기껏해야 동원의 대상으로 간주한 반면, 파시즘은 대중을 열광시키고 그들의 열정을 통치의 동력으로 적극 활용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 개인에 대한 집단의 우위, 내외부의 적을 악마화하고 단호하게 처벌한다는 점 등은 대중들이 스스로 실천한 파시즘의 특징들이다. 오히려 아우슈비츠와 같은 대량 학살은 파시즘이 극단화하면서 나타난 비극일 뿐, 파시즘의 필연적 귀결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극단적인 경우들에 초점을 맞추어 파시즘을 이해하다보면 결국 모든 비극을 지도자의 광기 정도로밖에 설명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대중은 스스로 파시즘에 책임을 져야 한다. 지배자들은 대중의 열정을 이용하지만, 결국 그들이 권좌에 앉아 휘두르는 권력의 근원은 대중에게서 나온다. 외부의 적에게 당했다는 피해의식, 내부의 배신자(!)에 대한 격렬한 분노, 개인의 인권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고방식 등은 파시즘이 성장할 훌륭한 토양이 되는 것이다. 최근의 황우석 사태가 불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울한 생각이지만, 만약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진실되고 PD 수첩이 틀렸다면 우리는 더 큰 격류에 휩쓸리지 않았을까?

December 30, 2005

브루클린 풍자극

폴 오스터 지음/황보석 옮김/열린책들/9500원

오랜만의 폴 오스터 소설. 2005년 발표된 따끈따끈한 신작이다.

흔히 폴 오스터의 소설을 '우연의 미학'이라는 말로 표현하곤 한다. 보통 '우연'이라고 하면 네러티브의 개연성을 떨어트리는 요소로 생각되기 쉽지만, 어쩌면 그 우연들이야말로 가장 일상적인 우리 삶의 특성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에피소드들이 하나의 중심 사건을 향해 '필연적으로' 달려가는 것이야말로, 그야말로 '소설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물론 폴 오스터표 '우연의 미학'은 우연 자체를 다루는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소한 우연으로 삶의 경로가 바뀔 때 그 사람이 하는 '선택'이다. 그 선택 속에서 그의 내면에 자리잡은 용기와 미덕들이 진하게 배어나와 우리를 미소짓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아마 이 책은 브루클린에 대한 폴 오스터의 애정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된 책이리라. 브루클린. 다리 하나 건너면 뉴욕의 심장인 맨하튼이 나오는 동네지만, 어쩌면 현대 미국 문명의 가장 변두리 동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무한경쟁의 사나운 발톱에 갈갈이 찢겨 상처받고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주류사회에서 밀려나 하나 둘 모여드는 곳. 온갖 언어와 피부색이 뒤엉켜 저마다의 고단한 어깨를 기대고 사는 곳. 하지만 진정 사람 사는 냄새를 물씬 풍기는 곳. 그게 바로 이 곳 브루클린이다.

사람 사는 냄새. 어쩐지 90년대 이후 한국 문학에서 실종된 냄새가 아닐까 싶다. 냉소, 허무, 분노, 단절, 절망. 이런 감정들은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우리 문학에서 그래도 삶은 아름답다는, 잘못 산 인생은 없다고 말해주는 담담한 미소를 접해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왜일까? 만약 그것이 단순히 작가의 연륜 차이가 아니라(연륜은 젊은 작가들이 나이가 들면서 어느 정도 보완이 될텐데) 작가가 존재하는 공간의 차이라면 문제는 자못 심각해 보인다. 우리 문학에서 "브루클린"에 해당하는 다른 단어, 예컨데 "봉천동"이라던가 "월계동" 같은 지명을 찾기 힘들다는 것은 작가라는 직업이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지식인들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징후로도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구획화된 아파트의 골방에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쥐어뜯는 작가보다는, 동네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에 담긴 사람 사는 이야기에 미소짓는 작가의 이야기가 훨씬 더 듣고 싶다.

About December 2005

This page contains all entries posted to 다락방 서재 in December 2005. They are listed from oldest to newest.

November 2005 is the previous archive.

January 2006 is the next archive.

Many more can be found on the main index page or by looking through the arch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