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ctober 2005 | Main | December 2005 »

November 2005 Archives

November 2, 2005

헌법의 풍경

김두식 지음/교양인/12000원

예전에 법대 다니던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법대생들끼리 농담할 때 제일 강한 부정의 뜻을 표하는 말이 "그건 헌법위반이야!"라고 한다.(물론 몇몇 별스러운 법대생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법 이론을 제대로 배운게 아니라서 자세한 설명은 힘들지만, 어쨌든 어렴풋이 알기에도 헌법은 최상위 법으로 최종심급에서 법질서를 규정하는 법이라는 것 정도로는 알고있다. 이론적으로야 이렇게 알고 있었지만, 사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헌법을 떠올릴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헌법재판소로 세상의 시선이 쏠렸다.

대통령 탄핵심판과 행정수도 위헌 소송은 우리에게 잊고 살았던 헌법을 떠올리게 해 준 동시에, 헌법의 권위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사건의 최종 심판관 노릇을 하면서도 정작 그 결과로 자신의 권위를 떨어뜨렸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물론 나는 그 가장 큰 이유는 어정쩡한 정치적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관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어쩌면 우리가 헌법이라는 것에 대해 지나친 환상을 가진게 아니었나 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헌법이 표상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로써 가져야 할 기본정신이다. 그런데 우리는 헌법에서 모든 분쟁을 잠재울 솔로몬의 지혜 같은걸 기대하고 있던건 아닐까?

이 책은 그야말로 헌법이 우리에게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긴 책이다. 저자의 주된 비판의 칼날은 헌법의 기본정신을 살리기는 커녕 자신들의 기득권 안에 갖혀 헌법 정신을 사장시키고 있는 법조계를 향하고 있지만, 우리 스스로도 헌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못해 왔음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법조인들이 알아서 우리의 권리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것 역시 민주국가의 시민의식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은 단지 헌법을 해석하는 방법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우리의 사회를 일구어나가는 기본 정신(그것이 바로 헌법정신이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고려한 글쓰기가 고맙기도 하지만, 그때문에 때로는 논지의 전개가 너무 조심스러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조금 더 깊이 있고 과감한 논의가 담긴 책도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다고 너무 어려운 책은 싫고.. ^^;;

November 8, 2005

죽음의 미학

헤밍웨이 외 지음/살림출판사/6500원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2권

책에 실린 첫 단편 "우국"은 나를 매우 짜증나게 했다. 사실 이 책에서 "죽음의 미학"이라고 할만한 소설, 즉 죽음을 미적 가치로 형상화한 소설은 "우국" 밖에 없다. 다른 소설들에서 죽음은 끝이자 단절이기에, 아름답기보다는 슬프거나 절망적인 무엇, 기껏해야 피할 수 없는 무엇으로 그려질 뿐이다. 그런데 "우국"에서는 유독 죽음은 아름다운 무엇이 된다. 자신의 이상을 위해 결연히 목숨을 끊는 남편과 그에 순종하며 따라서 자결하는 아내. 소설을 읽고 있자면 새하얀 옷에 물드는 선혈의 색채가 주는 자극적 감각이 명멸하는 것은 사실이다.

근데, 이게 아름다운가? 소설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제의 환영 뿐이다. 죽음을 미적인 차원에서 논할 때, 오히려 죽음은 시야 밖으로 밀려난다. 정작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죽음으로써 지키라고 강요하는 이데올로기 자체요, 죽음은 그것을 장식하는 화환 같은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의 미학"이라는 제목은 나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정절을 강요한 은장도 같은 섬뜩함.

첫 소설의 짜증을 이겨낼 수 있다면, 이 책을 읽는 것은 매우 좋은 경험이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이다. 죽음은 삶의 한 측면이요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이기에,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곧 우리 삶의 자세와 연관될 수밖에 없다. 다양한 관점에서 죽음을 고찰해 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문학을 찾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ps. 책이 별로 내키지 않는다면, 서점에 서서 '연인의 죽음' 만이라도 꼭 읽어보길.

November 10, 2005

야야툰

홍승우 지음/문학과지성사/8500원

특히 남자들에게 성에 관한 이야기를 접하면서 '공감'을 한다는 경험은 쉽지가 않다. 남자의 성은 대개 과장된 형태로 그려지곤 하는데, 한편으로는 변강쇠 류의 무용담(?)에서 그려지는 거대 남근이 존재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조루 등으로 묘사되는 왜소한 남성이 존재한다. 허나 대부분의 남성들은 그 중간의 어디쯤에 위치하지 않을까. 저렇게 희화화된 양 극단을 보고 있자면, 성에 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야야툰'의 미덕은 여기에 있다. 그간 '비빔툰'에서 잘 보여준 것처럼, 홍승우 화백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그리는 '사건을 위한 일상'이 아닌, '일상 속의 사건'들을 능숙하게 그려낸다. 그가 이 '야야툰'에서 그려내는 성 역시, 사건으로서의 성이 아닌 일상으로서의 성이다. 특히 소년기와 청년기의 정보통의 모습에서는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여러번 할 수밖에 없었다. 비로서 나는 '공감'할 수 있는 성 이야기를 만난 것이다.

만화라는 특성상 1시간도 채 안되는 시간에 후딱 읽어버려서 좀 감질맛이 난건 사실이다. 덧붙여, 표지에 찍힌 19세미만 구독 불가라는 문구가 영 거슬린다. YES24에서 로그인을 안 하고 이 책을 찾아보면 나이제한 상품이라고 상세보기가 안되는데, 도대체 이런 책도 못읽게 하면 청소년 성교육은 어떻게 시킨단 말인가?

November 14, 2005

열린 사회와 그 적들

김소진 지음/문학동네/9500원

아무런 힌트도 없이 나타나는 갑작스런 시점 이동은 김소진의 글에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 중 하나다. 보통은 과거와 현재, 생각과 현실 사이를 오갈 때면 단락을 나눈다던가 하는 형식상의 변화가 독자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를 주기 마련인데, 김소진의 단편들에서는 이러한 배려(?)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 없다. 덕분에 이야기의 흐름에 몸을 실어 잠시 나른하게 읽다가도 갑작스래 정신을 곧추세워 다시 읽어내려가야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곤 하는 것이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러한 형식상의 특징도 일상의 나른함 속에서 그의 소설이 주는 정신적 각성 효과와 같은 맥락으로 느껴졌다.

나쁜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닌데, 김소진의 글을 읽노라면 세대차이 같은게 느껴진다. 그가 77년생인 내게는 익숙치 않은 우리 고유어와 사투리를 능란하게 구사하는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가 그리는 삶의 모습이 낯선 까닭이다. 예컨데 90년대 후반부터 많이 읽히는 하루키나 폴 오스터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곤궁함은 (젊은)주인공에게 닥치는 일시적 시련/고난의 성격을 지니는 반면, 김소진의 주인공들에게 가난은 어려서부터 뼈 속 깊이 스며든 삶의 본질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가난은 우리 부모 세대에서는 흔한 경험이었지만, 확실히 우리 세대에게는 낯선 경험일 뿐더러 우리 세대를 타깃으로 하는 작가들도 좀체 그리지 않는 삶의 모습이다. 다시 말해, 지금도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대부분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 삶의 모습들이다.

김소진이 지적하는 바, "열린 사회"의 이데올로기 역시 그 이데올로기의 관심사가 아닌 이들을 타자화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닫힌 사회"이다. 생각해보면, 서울역이나 종묘공원에서 집회가 열릴 때 그 주변에는 노숙자들이나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모여 있기 마련이었는데, 정작 이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싸늘했던 것 같다. 노동자/농민/빈민/장애인들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외칠 때 이들은 그 구호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다른건 몰라도, 자신들도 그 좋은 세상에 한자리 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느꼈을리는 없는 것 같다. 모두로부터 타자화된 삶. 그것이 김소진이 신문사를 그만두면서까지 소설로 담아내고 싶었던 이야기일지 모른다.

단편집 한 권 읽고 하기엔 좀 건방진 이야기지만, 확실히 김소진이라는 작가는 '아직' 미완의 그릇이라는 생각이 든다. 임존성이라던가 어릴적 담력 과시를 위해 철탑에 오른 이야기 등은 오롯이 그 자체로 의미부여가 되고 어느 단편에서는 중심 소재가 되는 내용인데, 몇몇 단편에서 별 비중 없이 소품처럼 재차 사용되다보니 오히려 소재의 가치가 닳아 없어지는 느낌이다. 소품으로 쓰일 소재를 좀 더 풍부히하고, 힘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냥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심리를 좀 더 면밀히 파고 들어갔더라면 하는 바램이 남는다. 이런 바램을 들어줄 수 없는, 35세의 나이로 요절한 작가의 생이 더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November 16, 2005

반딧불이의 무덤

노사카 아키유키 지음/서혜영 옮김/다우/7000원

이 소설은 "반딧불의 묘"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된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으로 더 유명하다. 애니메이션을 어쩌다보니 접할 기회는 없었는데, 그래도 중간중간 스틸컷들은 몇 번 본 적이 있었는지라 대충 지브리 스튜디오스러운(?) 동심의 세계를 그렸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점에서 문득 들춰본 책의 내용은 내 짐작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삽입되어 있는 알록달록한 애니메이션 스틸컷이 무색하게도, 소설은 전쟁 말기 두 아이의 죽음을 너무도 처절히 그려내고 있다.

전쟁이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승리를 목전에 둔 쪽에서는 가능한 빨리 확실하게 전쟁을 승리로 끝맺으려 들게 된다. 이 때 상대국의 항복을 압박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상대 지역에서의 무차별적인 파괴를 통해 힘의 우위를 과시하는 것이다. 과거의 전쟁에서 눈에 보이는 생명은 모조리 학살하는 행위가 그 예였다면, 현대전에서는 폭격이 이러한 파괴행위의 진수를 보여준다. 특히 폭격은 직접적으로 인명을 살상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삶의 터전을 완전히 파괴한다는 점에서 더욱 치명적이다. 당연히도 이러한 파괴행위의 최대 피해자는 민간인들, 그 중에서도 아이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일 수밖에 없다.

동시에, 내부적으로 전쟁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적 보호망조차 산산조각내 버린다. 특히 국민을 천황의 성스러운 전쟁에 동원할 물자로 간주했던 군국주의 국가에서는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소설에서도 폭격으로 죽은 어머니를 지켜보는 세이타의 귓가에는 폭격기의 몇 퍼센트를 격추했으니 하는 선전만이 맴돌 뿐이다. 또한, 전시동원 목록에는 들어있었던 세이타의 이름은 부모가 죽은 후 생계를 좌지우지할 배급 목록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전쟁에 눈먼 국가의 시야 안에 아이들은 없었던 것이다. 공적 부조의 빈틈을 메울 사적 부조 역시 부재하긴 마찬가지였다. 전쟁 때문에 각박해졌다고는 하지만, 세이타 주변의 어른들은 대부분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싸늘하거나 기껏해야 무심하다. 부역에 나서지 않고 세츠코를 지키려고만 하는 세이타를 책망하는 친척 아주머니의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한데, 어쩌면 오랫동안 사람들을 길들여온 군국주의 이데올로기가 아이들의 고통조차 천황을 위한 성전의 불가피한 측면 정도로 여기게 했던 것은 아닐까?

반면, 아무런 보호 없이 전쟁의 참화 속에 노출된 세이타는 모든 힘을 다해 세츠코를 보호하고자 한다. 세이타의 이 헌신은 전쟁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하는 가혹한 현실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비록 그 전쟁에서 우리에게 '가해'국가인 일본 사람들의 고통을 다룬 이야기지만, 내게 이 책이 일제의 전쟁에 대한 옹호가 아닌 강력한 반전 메세지를 지닌 글로 읽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생존에 급급한 고독한 존재로 내몬다는 면에서, 문명의 반대말은 '야만'이 아닌 '전쟁'이 되어야 할 것이다.

"1945년 9월 22일 세이타는 죽었다."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간결한 문장에 전쟁에 희생당한 고독한 죽음이 함축되어 있는 듯하다.

November 19, 2005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무라카미 류 지음/한성례 옮김/동방미디어/8500원

고막을 찢을 듯한 음악과 뿌연 담배연기를 헤치며 술기운과 잠기운이 뒤섞인 몽롱한 기분으로 나는 지하 술집의 계단을 비틀거리며 올랐다. 감각은 이미 소진되어 세계는 어느 것 하나 분명하지 않다. 음악 소리는 등 뒤로 멀어졌지만, 귓가에는 여전히 드럼이 울려대는 듯하다. 나는 어두컴컴한 통로를 더듬어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온다.

갑자기, 달아오른 내 뺨을 차가운 바람이 후려친다. 폐를 훑는 공기의 전율에 초점을 잃었던 시야가 갑자기 선명해진다. 날은 이미 어슴프레 밝아오고 있었다. 온통 푸른 빛이 감도는 세계. 감각 저 편으로 잃어버린 세계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세계는 다시, 나의 것이 된다.

류의 새벽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November 24, 2005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권미선 옮김/민음사/8000원

맛있는 음식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배고픔을 달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했겠지만, 각 나라의 풍성한 음식문화가 웅변해주듯 '맛'은 음식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우리는 기념할만한 날이면 맛있는 음식을 먹곤 하는데, 그건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어차피 해야 할 식사에 멋진 '맛'을 첨가함으로써 우리 자신에게 하는 선물과도 같은 것일거다.

전통적으로 음식 준비는 여성들의 몫이었다. 물론 조선시대 왕궁의 최고 요리사는 남성이었고, 현대의 고급 레스토랑 쉐프도 대개 남성이라고 하지만 그건 아마 남성 권력이 표현되는 상징적 의미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대부분의 경우 요리는 가사노동의 한 부분이었으며 거의 전적으로 여성의 영역이었다. 그 여성들이 음식에 기막힌 '맛'을 첨가했고 그와 함께 자신의 감정을 함께 첨가해온 것이다.

"달콤 쌉싸름한 초컬릿"은 음식에 자신의 희노애락을 담은 여성의 이야기다. 책은 12개의 레시피(사실 이 중 하나는 음식은 아니다)처럼 구성되어 있는데, 이 음식들을 통해 티타는 인생의 기쁨과 고통, 사랑과 번민을 쏟아낸다. 독선적 어머니의 그늘 아래 침묵을 강요당한 그녀에게 요리가 하나의 배출구였던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근본적으로 요리라는 것 자체가 만든 이의 정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요리는 강요된 노동이기도 했지만, 여성이 인생에서 온전히 컨트롤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작품이기도 하였다.

기본적으로 이 소설은 남미 환상문학의 전통 안에 서 있다. 이 환상들은 현실의 장벽을 허물어 사람들의 감춰진 내면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 소설에서도 티타의 요리들은 그 음식을 먹은 인물들을 통해 만든 이의 감정이 흘러 넘치게 만든다. 입을 막고 얼굴을 가리게 한다고 행복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감춰지지 않는 법이다. 물론 현실에서 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억눌린 여성들과 그들의 음식에 바치는 헌사로는 그만이 아닌가.

오늘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그 음식을 만든 이에게 감사하도록 하자.

ps. 불행히도 대부분 매식을 하는 입장에서는, 맛있는 음식은 몸에 안 좋고 몸에 좋은 음식은 맛이 없으며, 맛있으면서 몸에 좋은 음식은 비싸다는 딜레마가 있다. -_-;

About November 2005

This page contains all entries posted to 다락방 서재 in November 2005. They are listed from oldest to newest.

October 2005 is the previous archive.

December 2005 is the next archive.

Many more can be found on the main index page or by looking through the arch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