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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노이즈

돈 드릴로 지음/강미숙 옮김/창작과 비평사/12000원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삶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지적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은 케이블 TV와 인터넷, 핸드폰과 떨어져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핸드폰과 일상 생활을 연결시킨 모 통신사의 '현대생활백서' 광고 시리즈가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오른편에는 핸드폰이 놓여 있으며, TV에서는 스포츠 중계가 나오고 있고, 나는 인터넷으로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

테크놀로지를 논할 때 우리는 비데나 에어콘을 예로 들지 않는다. 인간의 편익을 증진시킨 기술들은 인류 역사상 수도 없이 많았지만, 아무도 성급하게 테크놀로지의 시대를 선언하지는 않았다. 오늘날의 테크놀로지가 압도적인 이유는 과거의 기술들과 달리 그것이 우리가 세계와 관계맺는 방식 자체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TV, 인터넷, 핸드폰. 그 외에 당신은 무엇을 통해 세상을 만나는가?(물론, 이게 내가 책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설 속의 미국인 가정 역시 매스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접한다. TV와 라디오, 타블로이드 신문에는 온갖 정보가 넘쳐난다. 저녁 식탁에서 아이들은 서로가 새로 획득한 정보들을 과시한다. 대화가 멈춘 빈 공간을 채우듯 TV와 라디오는 계속 정보를 내뱉는다. 참으로 정보로 충만한 삶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충만함 속에 안도한다.

하지만, 환상이었다. 재난이 닥치자 그 모든 정보는 뜨내기 소문과 다를 바 없었고, 그들에게 남겨진 현실은 그들이 정작 아/무/것/도/모/른/다 라는 냉혹함이었다.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무엇이 가장 현명한 행동인지 결정할 지혜는 결코 정보의 형태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모습 위로 허리케인 카트리나 앞에 허둥대던 미국의 모습이 겹쳐진다.

정보의 범람 속에 길을 잃은 사람들을 지배하는건 두려움이다. 그들이 획득한 정보 속에 그들 삶의 고민을 해결해 줄 정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삶은 불확실한 것이 되고 만다. 이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쇼핑을 하고, 섹스를 하고, 정신상담을 받지만, 변하는건 아무 것도 없다. 지혜는 지식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미디어에 정복당한 우리 삶의 현주소, 우리 문명의 현주소이다.

White Noise :【물리】(모든 가청(可聽) 주파수를 포함하는) 백색 소음 (출처 : 네이버 사전)

White Noise는 본래 물리학 용어로서 모든 주파수대의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를 지칭한다. 정보는 우리 주변을 언제나 가득 채워 하얀 소음처럼 떠다닌다. 하지만 그 정보가 믿을만한 것인지, 우리에게 유용한 지식인지는 알 수가 없다. 정보의 홍수 속에 길을 잃은 셈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우리가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지는 알 수 없게 되어버린 현대 문명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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