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다 지음/김태성 옮김/북로드/13000원
결국, 아는 만큼 보인다. 파리 여행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에는 샹젤리제 거리의 명품 이야기도, 유명한 패션쇼 이야기도 없다. 에펠탑 이야기는 나왔던가? 나왔다해도 별로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을거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면 파리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깊고 풍성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저자들이 파리를 세련됨, 낭만 등과 같은 추상적 이미지들의 종합선물세트가 아닌 구체화된 역사적 실체로 재구성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여행의 키워드는 "혁명"이다. 파리는 근대국가의 출발점이 된 프랑스대혁명의 성지이다. 우리에게 혁명이란 어떤 가능성인 반면, 프랑스인들에게 혁명은 역사적 경험이다. 저자들은 파리에서 그 경험의 흔적들을 쫓아가면서 혁명의 의미를 되짚는다. 이 여행 경험이 씨줄이 되고 역사적 지식이 날줄이 되어, 책이 끝날 무렵이 되면 우리는 프랑스대혁명에 대한 꽤나 구체적인 의미의 그물망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저자들이 성지순례를 하듯 프랑스대혁명을 예찬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대혁명을 경험한 중국의 지식인들이 흔히 그러하듯, 저자들 역시 혁명에는 광기에 사로잡힌 민중들의 집단 광대극 같은 모습이 배어있음을 끊임없이 지적한다. 프랑스대혁명은 그 이념의 순수한 구현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오히려 끊임없는 자가당착과 모순의 역사였다.(혁명의 끝에 민중들은 나폴레옹 '황제'에 환호하며 혁명을 종결시킨다) 허나 그 혼란을 통해 인류가 한 걸음 진전한 것 역시 사실 아닌가. 중요한 것은 혁명이 내세운 거창한 이념의 아우라가 아니라, 혁명을 통해 저지른 잘못들과 숭고한 희생 양쪽 모두에서 배워야 할 교훈들이다.
제목에서 말하는 "책 한 권"은 프랑스대혁명의 배경으로 한 위고의 "93년"이다. 하지만 실제 책 내용에서 위고의 책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93년"도 읽어봐야겠지만, 일단은 이 책에 대한 만족감을 이렇게 표현하면 좋을 것 같다. 나는 파리에 갈 때 이 책 한 권을 들고 가겠다.